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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포 든 화기 분대장, 북한군 서울 진입 ‘발목’ 잡다<5> 백석천의 무명용사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16.02.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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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거친 북한군 전차 앞세워 창동 향해 진격
2사단 25연대 무명용사 로켓포 쏘며 백석교 사수
적 전차 방향 돌려…미아리 전선 정비 ‘수훈 갑’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T-34 전차.? 필자 제공
▲ 전쟁기념관 자료 인용개전 초기 서울을 향해 진격하는 북한군. 전쟁사 자료
▲ 6·25전쟁 당시 서울 남대문 부근을 통과하는 T-34 전차. 전쟁기념관 자료 인용
▲ 초기전투에서 사용된 2.36인치 로켓포와 화염병 및 수류탄. 전쟁기념관 자료 인용
● 의정부 남쪽 회룡역 부근서 격돌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수차례 겪었다. 그때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영웅들의 활약이 있었다. 의정부 남쪽 지금의 회룡역 부근을 흐르는 백석천에서 활약한 무명용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제2사단 제25연대 제5중대 화기소대의 2.36인치 로켓포 분대장이었지만 아직도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25연대는 의정부에 있는 제7사단 소속이었지만 충남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7사단은 동두천에 제1연대를, 포천에 제9연대를 배치해 38도 선을 경계하고 있었다. 사단의 예비로 제3연대를 운용하고 있었지만,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전환됐다. 제3연대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열흘 전인 1950년 6월 15일 용산으로 이동했다. 그 대신 제25연대가 6월 20일부로 제7사단으로 전환됐다. 따라서 제25연대는 6·25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부대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7사단은 예비대도 없이 초기전투를 치러야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옹진, 개성, 동두천·포천, 춘천, 강릉 등 크게 5개 축선과 동해안 등에서 전면남침을 감행했다. 그중에서도 북한군이 주력을 투입한 곳은 제7사단의 2개 연대가 배치된 동두천과 포천 축선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의정부 방향으로 제4사단과 13대의 전차를 투입했다. 포천-의정부 및 태릉 방향에는 제3사단과 80여 대의 전차를 투입했다. 그러나 태릉 방향으로는 전차가 기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정부-서울 방향에는 90여 대의 전차가 몰리게 됐다.
 북한군은 당시 최신형인 T-34 전차를 앞세워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들고 맞섰다. 그러나 국군이 발사한 로켓포탄을 정면에서 맞은 북한군 전차는 잠시 멈칫했을 뿐 아군 방어진지를 향해 포탄과 기총을 난사하며 돌진했다.
 육군본부는 수도권의 가용 부대를 모조리 서울 방어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제25연대는 대전에 있는 제2사단과 통합해 의정부 지역에 투입하도록 했다. 제25연대는 제1대대를 안동에 파견 중이었다. 대민지원을 나가 있던 제2·3대대가 출동을 서둘러 25일 밤 온양역에서 장항선 열차에 탑승, 26일 아침 용산역에 도착했다. 오늘의 주인공 백석천의 무명용사도 용산역에 도착했다.
 당시 제25연대는 경계용 탄약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연대장 김병휘 중령은 육군본부에 탄약 보급을 건의했다. 육군본부는 의정부 금오리에 위치한 제2사단 사령부에서 조치한다고 답변했다. 다시 열차 편으로 창동을 거쳐 낮 12시쯤 의정부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아침 식사는커녕 탄약 보급조차도 이뤄지지 못했다.
● “백석천에서 적을 저지하라”
 그들이 금오리로 향하고 있던 12시30분쯤 적의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을 비롯한 지휘부와 방어병력이 모두 분산된 채 철수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의정부 남쪽에 도달하자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부대를 가로막았다. 사단장의 보직을 해임한 총참모장은 김병휘 중령에게 “백석천에서 적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제2대대는 실종된 대대장을 대리해 제5중대장 나희필 대위가 지휘했다. 나 대위는 대대를 백석교 일대에 배치했다. 오후 1시쯤 의정부를 점령한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창동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석교를 통과해야만 했다. 선두 전차가 백석교로 다가서자 매복하고 있던 제5중대의 2.36인치 로켓포 4문이 차례로 불을 뿜었다. 그러나 적 전차는 막무가내로 진격했다. 마침내 1번 전차가 교량을 통과했다. 이어 3대의 전차가 통과했다. 화기분대의 분대장으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무명용사가 사수의 포를 빼앗아 들고 직접 교량 부근으로 달려갔다. 그때 5번 전차가 교량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분대장은 적 전차의 오른쪽 궤도를 향해 로켓포를 발사했다. 5번 전차는 교량 위에서 파괴됐다. 모두가 환호했다. 그때 뒤따르던 6번 전차가 연속으로 포격을 가했다. 무명의 분대장과 사수는 현장에서 전사했다. 부사수와 탄약수 등은 중상을 입었다. 마침내 후속 전차는 방향을 돌려 의정부 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북한군의 공격은 한동안 이뤄지지 못했다.
● 신원 확인하고 공훈 선양해야
 그 광경을 목격한 제2대대장 대리 나희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분대장이 일등 공로자다. 만일 여기서 전차대를 통과시켰다면 미아리 전선이 하루 먼저 위기를 맞았을 것이며, 그러면 서울이 과연 어떻게 됐겠는가? 결국 그의 힘으로 하룻밤을 더 지연시킨 것이다. 그 뒤로 혼란 중에 이 분대장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부상당한 부사수마저 끝내 찾지 못해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제5중대장 나 대위의 증언은 훗날 소련의 ‘라주바예프보고서’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라주바예프보고서’란 6·25전쟁 당시 북한 주재 소련대사, 군사고문단장, 무관의 3개 직책을 겸임한 ‘라주바예프’ 중장이 관련 자료를 수집해 본국에 보고한 문서를 말한다.
 극비로 분류됐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북한군은 의정부 축선에 90여 대의 전차와 핵심전력을 투입해 개전 이틀 만에 서울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당시 남북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때 충분히 달성 가능한 계획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이 기습남침 후 서울을 점령하는 데 사흘을 소모한 것은 그들의 전술적 잘못과 일부 국군의 용전분투에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 북한군이 기습남침 후 이틀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 위기를 수습하는 데 무명의 분대장이 크게 기여했음이 증명된다.
우리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공훈을 선양하며, 그분들의 나라사랑정신과 교훈을 이어받는 데 현재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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