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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北 전차에 화염 치솟자 북한군 우왕좌왕<6>고(故) 배익성(裵益成) 소령과 미아리고개전투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16.02.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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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 뚫고 北 전차들 길음교 출현

제1대대, 미리 설치해둔 폭약에 점화
폭발 늦어져 전차 두 대 길음교 통과
세 번째 전차 진입할 때 다리 와르르
절호의 기회 포착한 국군 화력 집중
북한군 무기 버리고 창동 방향 도주
▲ 1960년대에 촬영된 미아리고개의 모습(돈암동에서 북쪽으로 촬영)
▲ 최근 미아리고개의 모습(돈암동에서 북쪽으로 촬영), 오른쪽 끝 부분의 건물이 ‘돈암삼성아파트’
▲ 화물열차에 탑승해 전방으로 이동 중인 국군 용사의 모습 (전쟁기념관 자료 인용)
‘미아리고개’는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과 길음동을 잇는 고갯길이다. 지금은 왕복 6차로가 개통되면서 표고가 많이 낮아졌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전차의 종점이 돈암동이었기 때문에 미아리고개 북쪽은 도심 밖이었다. 고갯길 정상을 중심으로 공동묘지가 조성돼 있어 그 당시엔 으스스한 곳이었다.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철학관 등 점을 치는 업소들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미아리방어선전투에서 활약한 고(故) 배익성 소령은 1927년 8월 4일 경상남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8년 5월 5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장교후보생 제6기로 입교했다. 그해 7월 28일 육군소위로 임관한 그는 경남 마산에서 창설된 제15연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배 소위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은 창군 초기였기 때문에 부대이동과 개편이 수시로 이뤄졌다. 그가 소속된 제15연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 소위와 제15연대는 1948년 8월 9일 전남 순천으로 이동했다. 이듬해인 1949년 5월 12일에는 광주에서 창설된 제5사단에 예속됐다. 그 후 배익성 소위와 제15연대는 전북 전주로 이동해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에서 무장공비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그사이에 배익성 소위는 중위를 거쳐 대위로 진급, 제7중대장에 보직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됐다. 그날 오전 8시 육군본부는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에게 사단의 전 병력을 12시까지 서울 용산역에 집결시키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했다. 물리적으로 시행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많은 병력이 대대 또는 중대 단위로 작전지역에 파견돼 있을 뿐만 아니라 휴가와 외박을 나간 병력도 많았다. 제5사단은 최대한 빨리 부대를 이동시키기로 하고 출동준비를 서둘렀다.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연대의 예비인 제3대대를 우선 출동시켜 문산 축선으로 투입했다. 이어 제2대대가 26일 오전 연대장을 뒤따라 수색역에 도착했지만, 수정명령에 의해 용산으로 복귀했다.
 용산에서 숙영한 배익성 대위와 제2대대는 27일 오전 8시 제20연대장인 박기병 대령의 통제를 받아 미아리고개에 투입됐다. 제2대대는 미아리고개 우측의 132고지(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돈암삼성아파트)에 진지를 구축했다. 배익성 대위와 제7중대는 132고지의 동측을 담당했다. 같은 시기에 배치된 제20연대 제1대대는 미아리고개 좌측을 담당했다.
 제15연대 제2대대와 제20연대 제1대대가 공병부대와 인근 지역주민의 지원을 받아 진지 편성을 완료한 때는 6월 27일 오후 2시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 전방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너무나 황급하게 부대이동을 강행했기 때문에 보급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후가 되면서 애국부인회 등 민간단체가 돈암동 전차종점(현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 야전 솥을 걸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보급하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배익성 대위와 제7중대는 대부분이 끼니조차 거른 채 전투준비를 계속했다. 적의 야간공격에 대비해 고지에 배치돼 있던 기관총과 2.36인치 로켓포를 하단으로 이동시켜 길음교를 지향하게 했다. 날이 저물면서 먹구름이 두껍게 낀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세찬 장대비로 바뀌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온 초저녁 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제20연대 제1대대가 나무로 구축된 길음교를 폭파하기 위해 사전에 설치해 둔 폭약에 점화했다. 그러나 다리 가운데 구멍이 났을 뿐 무너지지 않았다. 그사이에 북한군 전차 2대가 다리를 통과해 미아리고개로 향했다. 이어 세 번째 전차가 길음교에 진입했다. 그때 다리가 무너져 내리면서 뒤따르던 전차 대열이 정지했다.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제20연대 제1대대가 화력을 집중하자 북한군의 전차 대열에서 화염이 치솟으면서 북한군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불빛에 비쳤다. 확인 결과 40여 대로 판단했던 북한군의 전차 중에서 실제 전차는 5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트럭을 전차로 위장한 것들이었다. 초전에서 타격을 받은 북한군은 수많은 무기와 사상자를 남겨둔 채 창동 방향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잠시 후 공격을 재개한 북한군은 전차 화력으로 제20연대 제1대대를 견제한 후 제15연대 제2대대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배익성 대위와 제7중대가 적 전차를 향해 2.36인치 로켓포를 발사해 명중시켰지만, 전차는 개의치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제5중대장 김순 대위가 다가오는 전차를 향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들었으나 적 전차의 기관총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어 대대의 특공대원들이 전차를 공격했으나 전차는 유유히 미아리고개를 넘고 말았다.
 북한군의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통과한 후 돈암동에 있던 제5사단의 지휘부가 철수를 시작하면서 전방부대의 지휘체계도 무너지고 말았다. 28일 새벽 1시가 되면서부터는 소규모 부대로 흩어져 철수하기 시작했다. 배익성 대위와 제7중대는 서빙고 방향으로 철수해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넜다.
 배익성 대위와 제15연대 제7중대가 한강방어선전투에서 활약한 구체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배익성 대위의 병적기록을 통해 그가 7월 1일 전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를 수습해 안장(33묘역-895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배익성 대위는 미아리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적의 전차를 격파하지 못한 채 방어선이 붕괴하자 한강 남쪽으로 철수했으며, 혼성부대로 재편성돼 한강방어선전투를 수행하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사(제1권 516~519쪽)의 미아리전투 수행 기록과 수습된 그의 유해를 통해 그의 책임감과 나라사랑정신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소령 계급을 추서했으나 전쟁 중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어떠한 무공훈장도 수여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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