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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일성의 어린시절 혁명가계 조작의 실체
  • 홍성준 기자
  • 승인 2012.09.0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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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제1권 제1장은 ‘비운이 드리운 나라’ 이다. 이 장에서는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전후로 그가 소학교를 마칠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나라의 당시 정세가 쓰여져 있지만 그 주요 내용들은 김일성의 가정, 그의 성장과정에 집중 되어 있다.

▲ 김형직 동상

‘혁명적 가정’이란 거짓말

김일성의 가정이 ‘혁명적 가장’으로 우상화 되고 있다. 그러나 과장되고 왜곡된 그의 가계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의 부계는 증조부 시절부터 평양 만경대에 자리잡은 농가였다. 모계는 부계보다 지식 수준이 높은 농가이자 기독교 집안이었다.

일제 식민치하 시절에는 기독교 가정의 청소년들이 애국운동에 투신한 일이 많았다. 김일성 친가와 외가에서도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 동생 김철주, 외삼촌 강진석 도 그러한 청년 이였다고 한다.

그들의 애국투쟁이 사실임이 밝혀진다면 김일성의 가정도 독립유공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

그 당시에는 친가 및 외가를 합쳐 희생자를 서너 명 냈을 정도의 애국적인 가정은 수천가구에 달 할 것이다. 이보다 더 한 애국적 집안이 허다한데 북한에서는 오로지 김일성의 집안을 ‘혁명적 가정’ 이라 추켜세우며 신성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36년 식민지 시대에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벌였고 우익에서 좌익에 이르기까지 각색의 사상과 투쟁경력을 갖춘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을 모두 애국선열로 높이 모시고 있다. 하지만 ‘세기와 더불어’ 에서는 오직 김일성과 인연을 맺은 인물만이 애국열사로 인정 된다. 황당하게도 김일성이 만든 항일투쟁사 속에 등장하지 못하는 애국자,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종파분자’로 낙인을 찍어 버려 김일성의 불구대천의 ‘원쑤’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주장하는 ‘혁명적 가정’의 실체는 김일성의 눈 밖에 난 모든 독립유공자들을 ‘원쑤’로 만들어 버리는 신화이기도 하다. 1000명의 독립운동가들 중 김일성의 마음에 드는 1명만 살리고 나머지 999명은 ‘원쑤’ 로 처단하는 식의 신화라는 그 본질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뒤바뀌는 김형직의 경력

‘혁명적 가정’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에 대해 알아보자.
김형직은 ‘혁명적 가정’의 대표인물로서 온갖 우상화 작업이 총 동원되고 있는 인물이다.
1952년 4월 20일, 북한 로동신문은 ‘김일성장군의 전기’ 라는 조 선로동당 공인의 전기를 게재했다. 북한에서 로동당 기관지에 실렸다는 것은 곧 김일성의 말을 바탕으로 하여 서술되고 그의 최종적 검열을 거쳐 발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전기는 로동신문에 나온 이외에 다시 소책자로 10만부가 인쇄되었으며,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북한 주민 거의 대부분이 읽었다.

▲ 김일성의 아비 김형직

그 후 이 전기는 1953년부터 시작되는 남로당파 숙청도구로 사용되었고 북한으로 넘어간 모든 남로당원들이 이 전기를 기준으로 ‘종파분자’로 몰렸다. 북한에서 김일성 전기란 언제나 김일성 자신의 생애만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기준하여, 김일성의 절대화를 이루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기에는 김형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김형직은 러시아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직접적 영향하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일 시위운동을 조직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였다. 형기를 마친 그는 중국 동북에 건너가 민족해방운동을 계속하였지만 감옥생활에서 받은 상처와 민족해방운동에서 얻은 과로로 인하여 1928년 36세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김형직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왜곡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상화가 최종단계에 이른 이번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김형직의 경력이 또다시 바뀌게 된다.

“1894년 태어난 김형직은 1912년 평양숭실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여 교편을 잡게 되었다. 1916년 그는 북간도와 상해에 가서 손문(孫文)의 국민혁명파와 연계를 맺었다.

그는 1917년 봄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그 해 가을에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918년 가을까지 평양감옥에 갇히었다. 출옥을 전후하여 그는 의학 공부를 하였다.

김형직은 1918년 가을부터 19년까지 1년 동안 평안도의 각 지방과 만주 일대에 나가서 조선국민회의 조직을 제건하였다. 1918년 11월에 그는 청수동(靑水同)회의를 소집하여 무산 민중을 조직에 묶어세울 데 대한 활동지침을 밝히었다. 이 기간 만주와 러시아, 레는과 10월혁명에 대하여 알게 된 그는 무산혁명방침을 세우게 된 것이다.

1918년 가을 김형직 일가는 평북 중강진에 이사하였다. 그는 1919년 7월에 다시 청수동에서, 8월에 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차례로 회의를 열어 우리 나라 반일 민족햅아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방침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1919년에 김형직은 중강진의 압록강 대안인 중국의 임강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졸업증’을 걸고 ‘순천의원’을 차렸다. 방문자의 태반은 반일운동가였다.

1921년 4월, 백산무사단에 소속하고 있던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김형직은 거처를 임강으로부터 팔도구로 옮겨 거기에 ‘광제의원’을 차렸다. 그는 이곳 예배당을 반일운동의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1924년 말 그는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평북 포평(葡坪) 으로부터 후창(厚昌) 으로 압송당하는 도중 그의 친구가 일본경관에게 술을 먹이고 취하게 하는 틈을 타서 압록강을 건너 무송(憮)松)까지 탈출하였다. 도중에서 그는 두 번이나 심한 동상을 입었다.

1925년, 김형직은 무송에 ‘무림병원’을 차리는 한편 민족주의운동단체에 망라되어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 얻은 병과 탈출시의 동상이 악화되어 1926년 6월 사망하였다.”

▲ 김일성이 말을 하면 그 말이 법으로도 되고 역사적 사실’로 둔갑되기도 한다.

자기 아버지의 사망일 까지 조작

1952년 ‘김일성의 전기’가 말하는 김형직의 경력은 40년이 지난 1992년에 출판된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상과 같이 왜곡 날조된다. 이 조작된 ‘김형직 전기’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드러난다.

① 김일성은 1952년 그의 나이 40세까지 선친 김형직이 사망한 해와 사망시의 나이를 알지 못 했다. 1952년의 전기에서 그의 선친이 1928년에 사망하였다고 했다가 이번 회고록에서 1926년 6월에 사망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② 1916년 김형직이 중국의 손문과 연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1982년까지의 김형직, 김일성 전기에는 전혀 없었던 부분이다. 또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 또한 지금까지 나온 일이 없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말을 하면 그 말이 법으로도 되고 이와 같이 ‘역사적 사실’로 둔갑되기도 한다. 날조 행위는 김일성에게는 일상적인 것이다.

③ 1917년 봄에 평양에서는 장일환이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국민회는 미국에 있었던 안창호의 영향 하에 결성된 기독교 계통의 비밀결사였다. 이 조선국민회에 회원으로서 김형직이 들어갔다.
그런데 ‘세기와 더불어’ 에서는 의도적으로 장일환의 이름을 삭제하고 마치 김형직이 이 비밀결사를 결성한 것처럼 왜곡 시켰다. 이렇게 왜곡하지 않으면 그 후의 김형직의 ‘눈부신 투쟁활동’을 서술할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④ 1952년의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3·1운동 직후에 평양감옥에 투옥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회고록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반 전에 투옥된 것으로 변경되었다. 어느 쪽도 투옥된 사실을 증명하는 객관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성이 3·1운동 이전에 자기 아버지가 ‘투옥’된 것으로 변경한 것은 투옥시기가 앞당겨 져야 3·1운동 이전에 김형직을 ‘사회주의자’로 둔갑시킬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⑤ 3·1운동 당시 김형직이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이 회고록은 밝히지 않고 있다. 사실 이 무렵 김형직은 중강진에 있었다.

회고록은 그 대신 김형직이 1918년 11월과 1919년 7월에 청수동호회의를 ‘소집’하고 특히 1919년 8월에 있었던 중국 관전현 홍통구 회의에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 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 전환시켰다는 허구를 만들고 있다.

이 허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김일성은 자기 아버지가 1918년 가을부터 1년 간 평안도, 만주, 연해주까지 돌아다녔다는 ‘새로운 사실’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들은 1982년까지의 어느 김일성 전기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국민회라는 기독교 계통의 비밀결사에 참가한 김형직을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키기 위해 그를 만주, 구소련지방으로 떠돌아다니게 하는 조작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테러에 피살된 김형직

⑥ 김일성은 중학중퇴인 김형직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졸업증을 걸어 놓고 의원을 차렸다고 말하고 있다. 가짜 의사였던 사기꾼 김형직을 김일성은 오히려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직은 의원을 차린 후 이러한 사기행위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 증거로 일본관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조사결과가 있다.

팔도구(八道溝), 의사, 김형직, 33, 배일, 천원 (자산), 평남평양출신, 한학의 소양이 있다. 대정 8년(1919년)3월, 조선독립소요사건의 주모자였는데 관헌의 체포를 겁나하여 동년 월, 대안(만주)으로 도망하여 당시 불령배의 우이를 잡았다. 개전 후 의사에 종사하고 있다.

1925년에 조사된 이 일본 기록에 따르면 김형직은 3·1운동 당시 중강진에 있으면서 만세사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9년 5월에 만주 임강으로 건너간 후 사상적으로 변절하여 일제에 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6년 사이에 중국 장백현에서 최고의 재산가가 된다. 그의 자산은 당시 무려 1천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⑦ 1924년 말 김형직이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후창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탈출했다는 일화는 1968년에 이른바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라는 전기 책자에서부터 나오게 된다. 이 때는 그가 동상을 한 번 밖에 입지 않았는데, 회고록에서는 두 번 동상을 입은 것으로 되어있다.
과장이 또다시 과장되고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낳듯, 이 일화를 선전하는 무리들이 김일성 충성분자이기 때문에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검증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⑧ 김일성은 김형직을 ‘공산주의자’ 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의 활동무대는 의원(醫院), 예배당, 민족주의 운동단체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라면 반드시 ‘동지’ 가 있어야 한다. 그는 동지가 ‘한명도 없는’ 공산주의자로 되어 있다. 사실은 그는 기독교 비밀결사에 한때 참여한 일이 있는 민족주의 계통의 한약방 주인이었다.

⑨ 김형직은 감옥에서 얻은 병이나, 탈출 때 입은 동상이 악화되어 죽은 것이라고 전기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가 정의부 계통의 민족주의자이며 부호였던 탓으로 그 당시의 미숙한 공산주의 청년이 벌인 테러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형직의 친구였던 고 이도일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형직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였던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에 관계하고 있었다. 단장은 김호(金虎) 라는 사람이었는데 모두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무렵 공산주의운동이 팽배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 독립진영에 금이 가서 분열하게 되었다.

한방 의사였던 김형직은 독립군에는 약을 주거나 치료를 해 주었는데 공산당에게는 냉담하였다. 이러한 형직을 공산당원들이 어느 날 밤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김성주(김일성)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에게 살해당하였는가도 모르는 채로 지금 공산주의 운동에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회고록에선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의 단원이었던 것을 암시하는 글이 나와 있다.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의 단원이었다는 사실은 김일성 전기로서는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이도일 씨의 증언은 신빙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정리 해보면, 김형직은 기독교인으로 한때 조선국민회에 참가하였다가 백산무사단 등 우익계 민족단체에 가담하였고, 후에 정의부계통의 인사가 된 한방 의사였다.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하여 한때 기세를 떨쳤지만, 전문적인 독립운동가는 아니였다. 그는 공산주의와는 너무나 상반된 길을 걸은 일개 신흥 쁘띠 브루주아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자를 공산주의자로 날조하는 ‘주체’의 본질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은 ‘김형직의 유언을 받들어 공산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형직은 가짜 의사라는 사기적 행위를 통해 돈을 벌어 자산가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산으로 당시 민족주의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자산가가 부르주아를 타도하려는 공산주의자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하여 김일성의 ‘혁명적 가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김형직인데, 김형직이 마치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영향으로 우리 나라 민족주의 운동을 공산주의운동으로 방향 전환시킨 사상가처럼 꾸며 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이러한 김형직의 뜻을 이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국내, 국외의 객관적 자료와 많은 김일성 전기가 서로 지니고 있는 모순 때문에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김일성의 부친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부친의 뜻을 계승하였다는 김일성의 주장과 그가 추구하는 ‘공산주의’란 도대체 어디에 뿌리를 둘 수 있겠는가.

그가 북한에서 실시하고 있는 공산주의체제란 그들의 말로는 마르크스주의도 레닌주의도 스탈린주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운동, 공산주의운동도 ‘종파’, ‘반동’이라며 배척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분석으로 우리는 북한이 내세우는 ‘주체’란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주장하는 ‘주체’ 또는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독재성을 옹호하기 위한 김일성 그 자신의 절대성 논리로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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