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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군대의 전통을 만든 6.25 학도의용군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 블루투데이
  • 승인 2016.10.0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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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군대의 전통을 만든 6.25 학도의용군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오늘부터 펜을 총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겠다” - 제1차 지원병 입대 축하식 학도병 대표 선서문 중에서
처참했던 6.25전쟁에서 학도의용군은 개전 3일 만에 탄생했다. 이미 수도서울이 함락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구국비상학도대’가 수원에서 조직되었다. 물론 이러한 등장은 급작스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6.25 발발 이전부터 학도호국단이 구성되어 반공 반탁을 주장하는 활동을 해오는 등 국가를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노력은 이미 존재했다. 학도의용군이라는 용어의 시작도 사실은 학도호국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독립 직후의 학생운동
학도호국단도 실은 그 뿌리를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튿날인 16일 서울학도대회가 열려 해방을 축하하고 그 다음날인 17일에는 곧바로 건국학도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후 8월25일에는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조선학도대가 조직됨에 따라 건국학도대는 해체되었다.
조선학도대는 좌우의 정치적 색채를 떠나 치안을 유지하겠다는 목표하에 조직되어, 일본 패잔병들의 파괴로부터 학교·관청·공장 등을 확보하며, 당시에도 여전히 활동중이던 일본경찰의 치안권을 접수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스스로 서울시를 6등분하여 치안유지조직을 스스로 조직하고 활동했다.
그러나 좌우 정치색을 따지지 않겠다던 조선학도대의 바램은 나이브한 것이었다. 좌익이 조선학도대에 침투하면서 극좌성향의 학생들은 조직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항하여 ‘후기 조선학도대’, ‘순국학생동맹’ 등으로 조직을 변경해가면서 자주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파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사회분열이 가중되었다. 이들에게 조선학도대와 같은 ‘우익’ 조직은 공작과 해체의 대상이었으며, 결국은 조선학도대는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좌익세력은 찬탁활동과 사보타주2) 활동을 높여나갔으나, 1947년 메이데이 사건을 계기로 세력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이후 우익의 학생운동은 전국총학생연맹을 위주로 적극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되면서 활발해지면서 남한 단독선거, 정부수립 등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48년 정부수립이후에도 좌익들은 학교에 깊숙이 잠복해있었지만, 이에 대항할 우익 학생단체들은 주도권 쟁탈전으로 이합집산 중이었다.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학도호군단의 탄생
정부수립 후 초대 문화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한 안호상은 대한민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념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민족의 운명은 젊은 학도들이 좌우하게 된다.” 라는 주장하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학도호국단 창설을 주요 교육정책으로 내세웠다. 좌익을 이겨내기 위해서 중학교 이상의 각 급 학교에 호국학도단을 조직하기로 했다.
한편 학도호국단은 1949년 8월 6일 공포된 병역법에 의하여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해야만 했다. 당시 우리 군은 정규군 규모를 최대 10만까지 늘리려고 하였으나 예산의 한계와 미국의 지원거부로 여의치 못한 상황이었다. 소요를 충족하기 위해 국방부는 호국군이라는 예비군을 만들기로 하였다. 호국군은 평시에는 군사훈련을, 국가비상시에는 정규군으로 편입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호국군의 계획이 좌절되면서 학도호국단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즉 학도호국단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은 단지 학생의 규율을 높이기 위한것이 아니라, 이러한 실질적 한계까지 감안한 조치였다. 1949년 8월 6일 공포된 병역법 제78조에서는 전국의 중등학교 학생 이상 대학생은 전원 의무적으로 학도호국단에 편입되어 학생군사훈련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1949년말 전국의 중학교 이상 학교는 모두 947개교였다. 학도호국단은 모두 45만 명의 학생을 총괄하는 전국적인 조직이 되었다. 특히 ‘이북 총진군’을 목적으로 내세운 안호상 장관은 군사훈련이야말로 학도호국단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예산의 지원이 부족하여 도보훈련이나 시가행진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6.25 발발 혼란속에 빛난 학도병의 활약
전쟁이 발발하자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국군은 혼란에 사로잡혔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학도호국단 소속의 젊은이들이 우선적으로 나섰다. 6월 26일 오전 일찍부터 대부분의 중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정부로부터 별도의 지시가 없자 학생들은 국방부로 찾아가 참전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며, 일부는 단지혈서까지 써가면서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6월 27일 저녁부터 서울이 북괴군에게 침입 당하자 학도호국단은 조직으로 모일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원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수원에 모인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아래 ‘비상학도대’를 발족했다. 최초로 모여든 200여 명의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전국학련, 이북학련, 반공학련 출신이었다. 국방부 정훈국에서 신분증을 발급했고 모두 3개 소대로 편성되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일부는 학도 전투대가 되어 서울로 다시 북상하면서 노량진 전투에 참가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서울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 7월 3일을 즈음해서는 수원까지 다다랐다. 물론 비상학도대 소속의 의용군들도 후퇴대열에 휩쓸려 대전까지 후퇴했다.
물론 학도병의 노력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또다시 국방부 정훈국 아래에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여 학도병 모집이나 보도선전 등 임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나빠지면서 이들은 다시 대구로 후퇴했고, 여기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가 만나 7월 14일 대한학도의용대로 통합·개편되었다. 비슷한 시기 부산에서도 대한학도의용대가 생겨났는데, 두 조직은 서로 관계가 없고 이름만 같았다. 그러나 정부가 부산에 임시수도를 정하고 7월 26일 두 학도의용대가 통합하면서 본격적인 학도병의 출정이 시작된다.
6.25 전시 학도병을 공급하는 원동력은 바로 대한학도의용대였다. 개인적으로 군에 자원입대한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학도병들은 대한학도의용대를 거쳐 군에 입대했다. 이들은 국군 10개 사단 및 예하부대에 배속되었으며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학도병들은 낙동강, 다부동, 안동, 기계, 안강, 영천, 포항, 창년 등 최후의 교두보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서,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를 지켜냈다.
한편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병무행정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학도병에 대하여 학교복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대한학도의용대는 1951년 2월 28일 해산했다.
시발점이 된 수도사단 학도병
수도사단 학도병들은 대구지역에서 생겨난 대한학도의용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모병벽보를 띄우면서 학도병 출전을 호소했다.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가자! 김석원 장군의 휘하로!” 김석원 장군은 6.25 이전 제1사단장으로 개성 송악산 전투를 지휘하면서 용맹한 장수로 알려져 있었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교련시간을 통하여 김석원 장군의 활약상을 들어왔기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학도병들은 16세 중학생부터 24세 대학생에 이르는 87명으로, 스스로 중대라 칭하고(중대장 서울대 사범학부 교육과 2년 김용섭) 2개 소대 6개 분대로 편성했다. 7월27일 출전선서식 이후 대구시민들의 환송 속에 안동으로 도착하여 수도사단 후방지휘소를 찾았다. 김석원 장군은 이들을 반기며 사단 직할대 인근에 숙소를 정하고 무기를 지급하며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가 결정됨에 따라 수도사단은 8월 1일 철수를 시작했는데, 수도사단 사령부는 학도병중대를 하루 먼저 후퇴시켰다. 후방 집결지에서 수도사단에 재집결한 학도병들은 8월의 엄청난 폭염 속에서 낮에는 훈련을, 밤에는 사단지휘소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수도사단에는 학도병중대 이외에도 호림부대, 백골부대, 영남부대 등 민간 자원병부대들이 있었다. 김석원 장군은 8월 4일 후방으로 후퇴한 부대를 점검하면서 훈련을 참관하면서 학도병들의 훈련성과를 격려하고 이들에게 군복을 지급했다.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한편 8월 5일부터 북괴군 12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맹공을 가하자 수도사단은 전차 저지를 위한 육탄돌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육탄돌격의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기간병들 사이에서는 지원자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학도병들이 먼저 대전차 특공조로 지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김석원 사단장은 차마 학도병에게 이를 맡길 수 없었다. 이날 전투에서 학도병중대는 사단직할 대대의 후방 보호에 투입되어 첫 전투를 수행했으며, 이후 사단이 후퇴하면서 피난민 검문검색 임무 등 헌병을 지원하기도 했다.
학도병중대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되기도 전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8월6일 김석원 사단장은 수도사단에서 제3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김석원 장군 개인을 따라온 학도병들에게는 기운 빠지는 소식이었다. 학도병들은 수도사단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김석원을 따라 제3사단으로 갈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우선 이들은 수도사단에 남아 현행대로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학도병중대의 결의는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신임 백인엽 사단장은 학도병중대를 독립부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현지 입대할 것을 명한다. 학도병들은 다시 회의를 한 결과 대부분 학도의용군으로 남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따라 87명의 학도병 가운데 16명이 현지입대를 했고, 나머지 71명은 백인엽의 명령에 따라 군복과 무기를 반납했다. 결국 수도사단 학도병중대는 8월8일 10여일 만에 해체되었다. 백인엽은 귀향을 명령했지만, 71명은 고향 대신 김석원 장군을 찾아 무작정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전투의 시작
71명의 학도병들은 8월 10일 07시 포항역에 도착했다. 3사단 후방지휘소는 포항여중에 있었는데, 인근의 포항국민학교가 학도병들의 숙소가 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급박히 돌아가면서 북한군 5사단이 포항을 공격하기 위해 남진하자 3사단 전방지휘소는 장사동으로 철수하고 포항시민들은 피난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학도병중대도 포항여중 강당으로 숙소를 옮기고 부대를 재편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학도병들에게 신형 M1 개런드 소총과 인당 250발의 실탄이 지급되었다. 그야말로 싸움이 눈앞에 닥친 것이다.
8월10일 야간부터 적 게릴라들이 교란작전을 펼치고 적 5사단이 진격하자, 학도병중대도 3사단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11일 03시부터 완전무장을 갖추고 포항시내 방어선을 편성했다. 04시경 약 20여명의 게릴라들이 학도병중대의 전방에 나타났으나, 중대는 차분히 적의 접근을 기다려 일제사격으로 제압했는데, 이 전투에서 학도병들은 적 20여 명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날이 밝자 학도병중대는 이제 적의 공격방향으로 치열한 반격을 가했다. 학도병들이 교전한 것은 적의 주력병력이었다. 무려 1시간의 접전에서 피해를 입자 적은 병력이 물러나고 포격으로 대응했다. 간신히 사단사령부와 통신이 연결된 학도병중대는 ‘정면에 출현하는 적에게 반격하며 사단본부를 사수하라’라는 명령을 하달 받고 이를 실행한다.
겨우 71명에 불과한 학도병 중대는 수십 배가 넘는 북괴군 제5사단 2연대에 당당히 대항했다. 두 번째 공격을 물리쳐내자, 적은 포항여중을 삼면으로 포위하여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학도병들이 펼친 방어선은 매우 효율적이었고 적의 세 번째 공격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바로 이렇게 학도병중대가 치열하게 적 주공의 전진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3사단 후방지휘소는 중요문서와 보급품·탄약 등을 철수장소인 감포로 옮기는데 성공한다.
3사단과 포항시민을 구하다
그러나 북괴군의 네 번째 공격이 시작될 때를 즈음해서는 상황이 달랐다. 국군의 잔존병력은 철수했고 오직 학도병들만이 남아 적들과 싸워야만 했다. 이제 북괴군은 포항여중의 뒷산까지 장악하여 4면을 포위하면서 학도병중대를 압박해 들어왔다. 15시경이 되자 전투를 시작한지 11시간에 이르렀다. 무려 네 차례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사이 학도병들의 실탄은 바닥났고, 이들은 마지막 수류탄을 던진 후에 적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시작했다. 최초에 후송된 6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48명 전사, 4명 실종, 그리고 최후의 생존자 13명은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다.
8월 11일 18시경 결국 포항은 북괴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영일만에 접근 중이던 미군함 헬레나의 함포사격과 미군기들의 공습으로 인하여 북괴군은 포항 점령 3시간 만에 퇴각을 시작했다. 이후 포항은 아군과 적군의 치열한 격전장소로 바뀌어, 주간에는 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자랑하는 UN군이 탈환했다가 야간에는 적군이 도시를 점령하는 양상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이 시작되기 전에 3사단이 안전히 철수를 완료하며 적의 포항침입을 막는데 학도병 중대가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다. 특히 이들의 분전으로 적 주력의 진입이 늦어짐으로써 포항시민들은 7백여 척의 선박을 통해 안전하게 영일만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한편 김석원 장군은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멸한 학도병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8월 14일 간부 3명과 민간인 5명이 현지에 도착하여 5시간동안 시신을 수습하고 가매장을 했다. 이들의 주검 앞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판이 붙어졌다고 한다.
“여기 장렬히 싸우다 잠든 48구의 학도병이 있음. 후일 다시 찾을 때까지 누구도 손을 대지 말 것. - 국군 제3사단장 백 -”
포항여중 전투의 생존자들은 다시 김석원 장군을 찾아 조국을 구하고 전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섰다. 겨우 9명만 남았던 학도병부대는 경주, 울산, 부산, 대구. 밀양 등지에서 재모집을 시작하여 113명으로 증원되었다. 8월 24일 다시 모집된 학생들에게는 학도의용군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이들은 이후 9월까지 낙동강 방어전에서 기여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항을 탈환하고 적의 저항선을 돌파한 후에 단일부대이자 독립부대로서 당당히 반격작전에 참가하기에 이르렀다.
독립 제1유격대대
한편 사단 단위로 배속되던 독립부대와는 달리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결성된 학도의용군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였다. 독립 제1유격대대는 대적공작대장 임무를 수행하던 이명흠 대위(육사 5기)의 발상에서 기인한다. 그는 유격대를 미리 후방에 침투시켜 전선을 교란시두는 북한군의 전법을 염두 해 두고, 국군도 이러한 유격대를 조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계통에서 있던 국방부 정훈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명흠 대위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육본 작전교육 국장인 강문봉 대령을 찾아 끈질기게 설득하여 유격대 조직을 허락받아내었다. 다만 필요한 병력은 스스로 모아야만 했다.
이명흠 대위는 8월 24일 대구에서 560여명을 선발하여 밀양으로 보냈으며, 밀양에서 선발된 200여명과 합쳐 8월 27일부터 유격대대의 편성이 시작되었다. 약 760여명의 대원들 가운데 80%가 18~19세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부대는 9월7일부로 정식으로 창설되면서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라는 정식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이 부대는 부대장인 이명흠 대위의 이름중 ‘명’ 자를 따서 ‘명부대’로 불리웠으며, 현재까지도 이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명부대는 8월 31일 부산에 도착하여 육군본부 청사에서 9월 1일부터 11일까지 10일간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단순히 군사학, 병기조작, 사격술 등 유격전술훈련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이념이나 민족문화사 등 정신교육도 받았다. 엄청나게 급박한 전황을 생각한다면 상대적으로 매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셈이다. 이들이 이런 고강도의 훈련을 받은 이유는 명백했다. 중요한 임무에 이들을 투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바로 장사동상륙작전이다.
반드시 성공해야할 양동작전
어떤 전쟁이건 작전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기만작전은 필요하다. 특히 성공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상륙작전의 경우 이러한 기만작전의 필요성은 더욱커진다. 특히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예정하고 있던 UN군으로써는 완전히 반대방향인 동해안을 목표라고 적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9월13일 미 해군 주력전함 미주리는 수척의 구축함과 함께 동해에 나타나 삼척에 대하여 포격을 가했다.
바로 이러한 양동작전 임무가 독립 제1유격대대에게도 하달되었다. 9월12일 오후 이명흠 대위는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명부대를 적 후방인 동해안 장사동에 상륙하여 유격작전을 수행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장사동은 바로 제3사단이 해상철수를 실시한 곳으로, 영덕 남쪽 15km 포항 북쪽 26km 지점에 위치했다. 매우 중요한 작전이지만 실전경험이 없는 대원들을 데리고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전력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모두 투입되었기 때문에 명부대 이외에는 투입할만한 독립부대도 없었다.
육군 작전명령 제174호에서 규정한 명령의 핵심은 간단했다. “동해안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 해안에 작전상륙을 감행하여 김무정 중장 휘하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울러 적 후방을 교란하라”라는 것이었다. 출동일자는 9월 13일, 작전기간은 14일부터 16일 3일간 이었다. 이를 위해 유격전의 전문가인 전성호 대령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작명 174호에도 나타나지 않은 진짜 목적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대원들은 출동을 앞두고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유격대의 편성이 대대에서 사단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따라 중대가 연대로 바뀌어 180명으로 연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지휘관과 참모 계급도 상향조정되었다. 즉 적을 기만하기 위한 목적이 편성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유격대의 분전
명부대원과 육본 무전병 12명을 포함한 772명은 정일권 참모총장의 참관 하에 출정식을 마치고 문산호에 탑승했다. 2,700톤급 LST인 문산호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선박이었으나 징발되어 군용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선장과 선원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그런데 이 배가 출항하기 전에 명부대원은 승하선 훈련을 몇차례 반복했고, 명부대와 교대로 미군이 같은 배에 승하선을 했다. 북괴 스파이들에게 문산호가 미군이 탑승하는 선박인 듯 보이게 하려는 첩보작전이었다.
9월13일밤 부산항 4부두를 출항한 문산호는 영국 Q-34 구축함의 호위 아래 장사동을 향했다. 그러나 다음날 14일 새벽 4~5시 정도, 문산호는 목적지 해안 인근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목적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배의 앞문을 열었으나 모래사장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태풍 ‘케이지’의 영향으로 파도는 5~6m에 이르렀다. 상륙을 위해 최초에 뛰어내렸던 대원들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헤엄조차 익숙하지 않은 학도병들로서는 물리적으로 이동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명흠 대장은 백사장의 소나무에 밧줄을 걸고 그 밧줄을 따라 대원들을 상륙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7명의 특공조가 결성되었으나 이들 역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바다에 익숙한 문산호 선원 2명이 물때를 맞춰 해안에 접근하여 4개의 밧줄이 연결되었다. 제1중대(가칭 28연대)가 이 밧줄을 따라 접근했으나, 전면과 좌우 산에서 쏟아지는 적의 사격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제2중대도 그 뒤를 따랐는데, 상륙초기에 90여명이 부상할 만큼 학도병들은 치열한 전투를 치뤘다.
상륙한 28연대는 전방 200고지에서 문산호에 직접 사격을 가하는 적의 토치카를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제28연대장 이영훈 대령이 전사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여 적 토치카 3개소를 파괴하고 오전 9시경 고지를 점령했다. 고지를 잃은 적은 고지 후사면과 인근 220고지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후속 부대가 상륙하면서 장사동 해안의 주요거점인 200고지는 15시경 완전히 학도병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10시간의 사투 끝에 거둔 엄청난 성과였다. 비록 유격대는 더 큰 전진을 하지 못했지만, 단 한 번도 실전을 겪어보지 못한 신참 학도병들이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적 후방지역에 교두보를 구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적 39명을 사살하고 3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토치카 9개소를 파괴했다. 물론 유격대의 피해도 상당해서 전성호 대령과 황재중 선장을 포함 2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계속되는 전투와 고립, 그리고 구원
28연대 대원들은 200고지에 거점을 구축하고 밤새 고지를 사수했다. 9월15일이 되자 유격부대는 장사리 인 동해안 7번국도상의 교량 2개를 폭파하여 적군의 보급로 차단에 주력했다. 또한 부대병력을 재편하여 거점확보작전을 수행했다. 우선 포항-영천간 국도를 차단하여 잠시나마 북한군의 주력 2군단의 후방보급을 마비시켰다.
한편 9월16일이 되자 적의 반격은 더욱 커졌다. 200고지 전방으로 이동하던 유격대병력은 결국 고지의 진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시경에는 정찰대로부터 적 전차를 포함한 대부대의 접근이 보고되었다. 유격대를 격파하기 위해 북한군 정예 5사단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9월17일 하루 종일 제 28,32연대는 유리한 지형을 찾아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성하면서 적 전차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전선을 유지했다.
다음날에도 새벽부터 공격이 계속되었고, 유격대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지만 아군의 지원이나 증원이 전혀 없는 고립무원상태에서 무작정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애초에 3일 작전을 예상하고 투입되었기 때문에 명부대는 탄약과 물자는 물론이고 식량조차 부족했다. 결국 명부대는 적 후방에서 고립된 상태를 스스로 풀고 남쪽의 낙동강 전선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UN군에서 해상을 통한 철수를 준비하고 지원함에 따라 9월 19일 애초에 상륙했던 장사리 해안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철수작전은 05시부터 시작되었다, 좌초한 문산호 인근에 조치원호가 정박했으나, 여전히 높은 파도에 해안까지 접근이 어려워 철수가 크게 지체되었다. 애초에 정오에 승선이 완료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15시가 넘도록 철수가 계속됐다. 유격대의 철수를 알아차리고 북괴군은 소화기 사격과 박격포 공격을 집중했고 적지 않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적의 공격이 거세지자 결국 조치원호를 지휘하던 미군 소령은 30여명의 대원이 남아서 철수를 지원하는 가운데 해안과 연결된 밧줄을 끊어버리고 후퇴해버렸다. 이로써 772명 가운데 약 640여 명의 대원들이 구조되어 9월 20일 경 부산항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부산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을 수행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유격대는 북진하면서 아군의 후방에서 잔적소탕임무를 수행했으며, 특히 10월 12일 경에는 용문산, 홍천 등지에서 북괴군들을 소탕했다.
전쟁에서 학도병의 의미
전쟁은 결국 병력의 싸움이다. 병력이 소멸되는 군대는 더 이상 싸울 능력을 잃고 의지까지 잃어 항복할 수 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 총력전 개념이 뿌리내리면서 국민개병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모든 국민이 전쟁에 투입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제1·2차 세계대전이 그 이전의 어느 전쟁보다 더욱 치열하고 피비린내났다. 그러나 1948년 이후 꾸준하고도 명백히 전쟁을 준비해온 북한에 비하여 남한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심지어는 국민개병제를 외쳤으나 실제 예산의 부족으로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했다.
이런 와중에 학도병의 등장이 갖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특히 당시 학생이란 지금의 대학생과는 달리 사회 지도층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즉 사회적 엘리트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국가 수호에 나섬으로써 소위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국가가 가장 크나큰 위기에 처한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나 비록 미숙한 군사적 숙련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는 재일동포 학생들까지 고국의 전쟁 소식에 재일학도의용군에 지원하여 미 제7사단과 함께 인천으로 상륙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뤄낸 군사적 성과는 미약할지 모르나, 젊음을 불사르는 애국의 열정을 전 국민에게 전달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아무리 일부 비뚤어진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폄하하더라도, 당시 우리 정부는 학생조차 전쟁의 도구로 생각하던 공산정부와는 전혀 달랐다. 학도병이 무분별하게 전쟁터로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약 30만 명의 학도병 가운데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27,700여 명이고, 나머지는 후방지역에서 선무공작 활동에 투입 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은 멀어지고 심지어는 서울까지 내주었지만, 1951년 3월 중순 이후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점차 정부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한 학생들을 학교로 복귀시키기 위한 담화문을 발표했고, 문교부 장관은 복교령을 내렸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 군도 더 이상 학도의용군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학도병들은 다시 학교로 복귀하거나 현지입대를 통하여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섰다. 어떤 경우건 이들의 활약이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민국의 운명을 구한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1) 본 발표문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 학도의용군연구”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발췌·요약한 글입니다.
2) 제2차 세계대전중 점령군의 기재(器材)에 대한 파괴활동에 대해서 붙여진 명칭으로 일반적으로는 전선(戰線)의 배후 또는 점령지역에서 적의 군사기재, 통신선과 군사시설에 피해를 주거나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 효과를 갖는 행위를 가리킨다. 스파이와는 달리 정보수집이 목적이 아니며 또한 작전지대 내에 한정되지 않고 적의 지배지역 전반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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