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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합뉴스 | ||
님재준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군인이었을 때 그는 주변에 누구 한 사람 없는 밤에도 혼자 직각보행을 했을 정도다. 회식 끝 무렵에는 언제 어디서든 애국가를 4절까지 함께 불렀다. 독립군 군가로 알려진 양양가(襄陽歌) 또한 그의 애창곡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국의 앞날은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이슬 같이 기꺼이 죽으리라…”
남재준의 애국심이 어느 정도였는 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군 복무 시절 남재준 장군은 지휘관 임지마다 이순신 장군 영정을 가져가 걸어놨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가정보원장 재임 기간에도 국정원장 관저에서 그 전통은 이어졌다.
襄陽歌 부르고 관저에는 이순신 영정
“저 분 온화해 보이지만 장난 아니다. 종북세력들 전부 월북 준비해라.” 2013년 남재준이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한 시민이 인터넷에 올렸던 글의 한 대목이다. 이 네티즌은 군 복무 때 남재준 장군이 직속 지휘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사청문회에서 남재준 원장후보자는 “이 땅에 다시는 좌파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그 토양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이들을 뿌리째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종북세력의 선전선동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강하게 피력했다.
‘5.16 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의원들이 질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한 개인으로서 답을 한다면 5·16은 쿠데타다. 그러나 잘 살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을 결집해 산업화를 달성해 풍요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밥 굶는 가난한 나라가 민주화를 이룩한 일은 없다. 그른 관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화의 일등공신이다.”
국정원 개혁에 대해 그는 “국정원 역할은 새벽을 준비하는 것이다”는 말로 간명하게 정의했다. 국내 종북세력 준동에 대비하고 궁극적으로 통일한국을 위해 매진하자는 의미였다.
남재준 원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 안팎에서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거치며 지리멸렬하다시피 돼 버린 국정원 조직을 재건해 달라는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국내문제 개입 불가, 정치적 중립 다짐
남재준 원장의 취임사는 역대 국정원장 취임사 중 가장 짧았다.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되어 있다. 여러분도 전사가 될 각오를 다져달라. 여러분의 사기와 복리증진을 위해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이게 전부였다. 이전처럼 직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훈시를 한 것이 아니라 이 짤막한 취임사를 내부용으로 알렸다.
2012년 대선 때 그는 박근혜 캠프의 국방·안보특보였다. 청렴, 강직, 원칙주의, 탁월한 업무능력 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일각에서 정권의 2인자로까지 일컬어졌던 남재준은 임명장을 받을 때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혹시 부탁할 일이 있느나는 말을 듣고 “인사청탁 하지 마시라”고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남재준 국정원의 업무기조는 정치적 중립에서 출발했다. 취임 초 남 원장은 ‘국내문제 개입 불가’를 선언했다. 이를 토대로 조직을 추스려 사기를 붇돋우고 국정원 본연의 업무를 정상화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전 정권들의 경우 국정원 인사 때 원장뿐 아니라 1급 인사까지 모두 청와대가 했다. 이런 관행을 깨고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 1급 인사를 본인이 했다. 정치적 중립의 시발점이 그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남재준 원장은 규정과 규율에 어긋난다 싶으면 상대가 누구든 돌직구를 날렸다고 국정원 사람들은 전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었던 육사 16년 후배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를 만나 보라는 말을 주변으로부터 들었다. 1 대 1 면담을 하고나서 남 원장은 격노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비서관은 국정원으로 복귀해 한직에 대기성 보직 발령을 받았다.
노무현 ‘NLL 포기’ 기록물 전격 공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북 고급 인적네트워크, 즉 휴민트 자산이 와해된 것을 남재준 원장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 시절 대대적인 전문요원 물갈이로 국정원 대공부서가 무력화돼 제대로 일하기가 쉽지 않아졌다는 것은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대중 정부 때만 600여명이 강제로 국정원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원 내부고발, 양심선언, 밀고가 횡행해 조직원 상호간 불신이 만연해 믿고 일을 맡길 사람도 없을 정도라는 탄식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남재준 원장 재임중 겉으로 드러난 국정원 관련 최고 핫 이슈로 2013년 6월 이른바 ‘NLL 포기발언’ 대통령 기록물 공개가 꼽힌다. 남 원장은 그 중심에 있었다. 문제의 대통령 기록물은 30년후 공개할 수 있도록 분류돼 있었다. 남 원장은 그 기록물 생산자인 국정원 측에서 이를 일반문서로 분류해 등급을 낮춰 공개할 수 있는 법규에 따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전격공개했다.
국정원과 청와대에 1부씩 보관돼 있던 이 문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북한 김정일에게 약속했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남 원장은 기록물 공개와 관련해 “야당이 자꾸 공격하고 왜곡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정원이 더 이상 정쟁이나 정치공방에 휘말려서는 안 되며, 그럴 경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야당은 국정원 명예가 국가이익이나 기밀보다 중요하냐고 따졌으나 남 원장은 그것을 계속 그렇게 몰아가서는 안 될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국정원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맞불로 공개했다거나 청와대의 정략에 맞춰 공개를 강행했다는 등의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남 원장의 성격상 그런 상상은 하기 어렵고 국익만 생각했을 것이라는 분석들이 많이 나왔다.
“간첩 활보하는 반역자 천국” 개탄
또 하나는 ‘탈북위장 간첩 조작사건’. 탈북자 A씨는 가족을 만나러 몰래 입북했다가 북한 보위부에 붙잡혀 간첩 지령을 받고 다시 입국한 다음 남북한을 오가며 활동하다 국정원에 적발됐다. 그는 대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아 석방됐다. 중국 옌벤 관공서에서 국정원 요원이 발급받은 공문서의 A씨 북·중 출·입경 내용이 변조돼 법원이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던 해당 국정원 요원은 증거조작으로 처벌을 받았다.
남재준은 평소 대한민국이 반역자들의 천국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국정원장 퇴임 후 그는 무단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돌아온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무죄로 풀려난 사건을 몇 차례 들먹였다. 담당 재판부가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른을 뵌 것은 미덕’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한 것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이 이렇게 됐다”고 탄식했다.
남재준은 국정원장으로 부임했던 2013년 12월 국정원 핵심간부 송년회에서 “2015년 통일을 위해 다 같이 죽자(열심히 하자)”고 했었다. 당시는 북한이 장성택 처형 이후 거의 붕괴 국면에 접어든 것이라는 진단이 대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올해 초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국정원장으로 6개월만 더 있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는 “통일은 우리 하기 나름이며 그 때 제대로 준비했으면 분명히 그렇게 됐을 것이라는 뜻이다”고 설명했다.
취임한 지 약 1년 2개월만에 남 원장은 비교적 일찍 물러났다. 배경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데다 다소 뜻밖에 조기 하차한 것을 놓고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비슷한 시기에 불거지기 시작한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최순실 조사에 착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는 취지의 보도들도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최순실 알았으면 총들고 청와대 갔다”
남재준의 국정원은 북한과 종북좌파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남재준 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최순실 조사 여부에 대해 질문을 받고 “현재의 국정원법으로는 사찰커녕 인사검증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다”며 일축했다. 그러면서 “소설들 쓰지 마라. 징계위원회도 열리지 않았으니 경질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알았으면 그냥 있었겠나. 권총이라도 들고 청와대에 갔을 것이다”는 말도 했다.
남재준은 퇴임식 없이 직원들에게 짧은 고별사만 남기고 국정원을 떠났다. 고별사 행간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 있었고 그날 국정원 분위기는 숙연했다. 일부 여직원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원장 취임 후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던 직원들에게 “누구라도 우리의 조국과 조직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면 나의 등 뒤에서 비수를 찌른다 해도 끝까지 감싸안고 함께 할 것이다”고 약속한 그였다.
‘사랑하는 직원 여러분! 여러분은 밝고 희망찬 내일을 위해 영하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국의 새벽을 열어가는 호국 전사들로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중략)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해도 여러분의 임무는 포기돼서도 포기해서도 안되며 오직 자식들에게 물려줄 조국의 내일을 위해 반드시 수행돼야 한다. 마음은 여러분 곁에 남겨 두고 몸만 떠나려 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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