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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①]나의 죄명은 일 잘 했다는 죄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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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장영걸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장영걸(요덕수용소, 1997~1998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일을 너무 잘 했다는 죄

북한에서 나의 직업은 러시아 무역성 담당자였다. 무역성 담당자로서 나는 김정일 일가의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외화벌이를 했다. 당시 외화벌이 1년 계획량은 백만 달러였다. 1994년까지 내가 근무했던 러시아 지구는 5년 이상 매년 백만 달러 넘게 외화를 벌어들이곤 했다.

매년 초과 달성을 했기 때문에 훈장도 여러 번 받는 등 외화벌이 사업자로서 나는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러시아 지구 담당자였기 때문에 북한으로의 출장이 잦았다. 그래서 1994년 갑작스런 출장 명령을 받았을 때도 아무런 의심 없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1994년 출장 명령을 받고 북한으로 들어가 공항에 내리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끌려간 117호 섬은 해외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따로 수감하여 조사하는 대동강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초대소였다. .

내가 체포된 이유는 ‘외화를 너무 잘 벌어서’였다. 외화벌이 사업소의 1년 계획은 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것이지만, 정작 북한 당국은 1년에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획을 달성하는 외화벌이 사업소는 당연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전제 하고, 잡아들여서 자신들이 이미 정해놓은 죄를 실토할 때까지 모진 고문과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5번의 초대소, 1번의 예심국 그리고 요덕수용소

나는 요덕수용소에 들어가기 전 3곳의 초대소와 1곳의 예심국을 거쳤고, 요덕수용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보위사령부 초대소 2곳에서 1년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내가 처음으로 조사를 받았던 117호 섬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사상 검토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성실하게 자기비판을 하라" 독방에 가두고 종이를 주면서 무조건 쓰라고 했다. 그들이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구타를 하고 다시 쓰라고 했다. 수감자들이 자살을 할까 봐 식사를 할 때도 수저와 젓가락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수저를 준다고 하더라도 손잡이 부분을 자르고 스푼 부분만 주곤 했다. 식사도 강냉이죽과 소금물이 전부다. 감방은 독방으로 되어 초대소 내에 누가 수감되어 있는지 서로 알 수 없는 구조였다.

1996년에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예심국으로 옮겨졌다. 예심국은 사실상 죽으러 들어가는 곳이다. 예심국의 감방은 마치 새집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독방에 수감되는데, 이 독방들은 천장에 달려있어서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감방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각각의 감방 밑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모든 감방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누가 움직이는지, 소리를 내는지 감시한다. 앞과 옆은 막혀있는 벽이지만 뒤는 쇠창살로 되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쇠창살 사이로 구타를 당하곤 했다. 비누는커녕 씻을 수도 없었다. 죄수들에게서 얼마나 냄새가 났는지, 보위부원들도 우리를 조사할 때 멀찍이 떨어져서 조사를 하곤 했다.

1년 동안 4번의 예심을 받았지만, 그들은 내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되자 혁명화 노동교화를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크게 범죄를 한 거는 없지만, 결함도 많고 재외생활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예심국에서 이루어지는 처형 방식은 실제로는 목을 꺾어 죽이는 방식으로 형이 집행된다. 우리 같은 죄인에게는 총알도 아깝기 때문에 그냥 목을 꺾어서 죽인다고 했다.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

예심국에서 판결을 받은 뒤 나는 곧바로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으로 옮겨졌다. 이곳에 수용되면자신의 모든 서류를 빼앗긴다. 당증이 취소되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여맹증도 취소되며, 사로청원증, 식량정지증명서 등 북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서류를 빼앗긴다.

당시 혁명화구역에는 가족세대는 없었고 모두 독신자뿐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일상은 매우 규칙적이고 통제적이었다. 보위부원들이 불시에 순찰을 돌아 일을 할 때도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밤에 잘 때도 불을 켜고 잤다. 경비들이 15분 단위로 숙소를 돌면서 빈자리가 있는지 항상 확인했다.

식사는 강냉이밥과 시래깃국에 소금을 조금 넣은 것이 전부였다. 수용소에서 배급해 주는 것만 먹어서는 영양실조에 걸려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보위원의 눈을 피해 뱀이나 개구리, 물고기 등을 잡아먹었다.

공무동력소대장 장영걸

나는 수용소에 있는 1년 동안 공무동력소대에서 소대장으로 일을 했다. 공무동력소대에서는 벌채, 제재(製材), 가구작업, 달구지 수리, 단야(鍛冶), 선반(旋盤) 등의 작업을 했다. 관과 공개총살을 위한 말뚝을 만드는 일도 우리 소대의 몫이었다. 특히, 혁명화구역에서 사용되는 관과 말뚝뿐 아니라 완전통제구역에서 사용되는 관과 말뚝도 만들었다. 공무동력소대에 있으면서 관은 거의 매일 만들었다. 죽은 사람의 체격에 따라 관의 규격이 달라졌기 때문에, 관을 보면 키가 큰 사람이 죽었는지 작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혁명화구역에 있는 공동묘지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광경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갈뿐인 너른 땅에 제대로 된 묘비는커녕 시체의 일부가 땅 밖으로 드러난 게 태반이었고 산짐승이 먹어서 시체가 훼손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먹지도 못해 땅을 팔 힘도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무로 비석을 만들어 놓아도 땔감이 부족한 수감자들이 와서 나무 비석을 가져가 버리기 일쑤였다. 매장하러 온 수감자들도 아무데나 빈자리에 찾아 관을 대충 묻어버린다. 그걸로 한 많은 인생의 모든 이야기가 묻혀버린다.

수용소에서는 대부분 영양실조로 사망한다. 특히, 설사병에 걸리게 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설사가 나면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데, 수용소에서는 오히려 설사가 나면 기름 한 숟가락을 준다. 너무 못 먹은 나머지 생기는 설사병이기 때문이다.

어느 죽음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공개처형 되는 수감자의 죽음은 더욱 참담하다. 공개처형을 당하는 수감자는 포박 당한 채 사형장으로 끌려오는데, 손은 주머니에 넣어진 상태로 허벅지에 꿰매지고 입에는 자갈을 쑤셔 넣어서 숨만 겨우 쉴 뿐이다. 처형하기위해 판결문을 읽는데 있을 수 없는 죄목만을 나열한 엉터리였다. 난사 당한 처형자의 시체는 거적에 대충 말아서 화물차 뒤에 묶어 땅에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볼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요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수용소 내에서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수감자들 중에도 보위부원들 끄나풀이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보위부원들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힘든 수용소 안에서 우리끼리라도 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이라도 먹을 것을 얻게 되면 혼자 먹지 않고 꼭 작업반으로 가지고 와서 다른 소대원들과 나눠 먹고는 했다. 나의 마음이 통했는지 소대원들 역시 나를 잘 따라주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개울에 갔다가 도롱뇽이나 귀한 물고기라도 잡으면 무조건 소대장인 나에게 갖다 주었다.

당시 혁명화구역 내에서 공무동력소대 신세를 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리가 수용소에서 사용하는 모든 작업기구와 물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병원이나 발전소, 농업반 때로는 경비병들에게서도 도움을 받곤 했다. 겨울이 되면 대숙리 꼭대기 저수지부터 발전소까지 연결된 수로가 꽁꽁 어는데 나는 항상 다른 소대보다 먼저 얼음 깨는 작업을 완수하고, 소대원들을 이끌고 발전소로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먹을 것을 얻어먹곤 했다. 통행이나 왕래가 철저히 통제되는 수용소 내에서 허락도 없이 발전소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된 사항이지만 우리 소대는 발전소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전소 사람들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공동으로 작업을 할 때면 시합을 붙이곤 했는데 가장 먼저 작업을 완수하는 팀에는 강냉이를 부상으로 주곤 했다. 우리 소대는 거의 항상 1등을 했다. 부상으로 받은 강냉이는 절대 우리끼리 먹지 않고 꼭 작업반에 가지고 와서 모든 소대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모두 함께 고생하는 처지에 누구는 먹고 누구는 먹지 않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같이 끝까지 버텨서 이곳을 살아서 나가자는 의지를 함께 다지곤 했다.

모순덩어리 북한의 축소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있던 정양소(요양소)는 몸이 약하고 병이 있는 사람들이 한동안 쉬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노동법에 정양소를 설치하고 운영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곳이지만, 실제로 수감자들이 정양소에서 요양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에 정양소는 보위부원들이 와서 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성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일을 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보위부원들의 목욕물을 받아주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었다. 수감자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할 정양소는 사실상 보위부원들을 위한 유곽이었던 셈이다.

예심국에서 요덕으로 가라는 판결을 받았을 때 나는 내가 가는 곳이 수용소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있던 지역이 요덕군 대숙리라는 것은 후에 당 이동증에 기입된 것을 보고야 알았을 뿐 아니라 그 곳이 15호 수용소라는 것은 한국에 온 뒤에야 알았다. 북한은 매우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적이다. 그런 곳이 있다는 소문은 있어도 관계자가 아닌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15호 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기밀유지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다. 만약 수용소 내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한다면 다시 수용소에 수감되게 된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북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축소, 극대화 된 곳이 바로 수용소다.

요덕수용소의 혁명화구역에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도 많이 수감된다. 해군사령관을 역임한 방철갑도 1980년대에 수감됐었고, 락원군 책임비서, 정찰국장 등으로 있다가 끌려와 수감된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의 예술영화인 ‘민족과 운명’ 제작에 관여했던 사람도 혁명화에서 몇 년을 지내고 나갔다. 그는 김정일과도 알고 지내는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모함을 받아서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나오기 전에 가족세대가 들어왔는데 김일성의 가계로 외교관을 하던 사람이었다. 발전소에 일하던 사람들은 국가과학위원회나 영변 핵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수감된, 하나같이 수재인 사람들뿐이었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쳐 충성해야 할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요덕수용소의 혁명화 노동교화인 나라 그 곳이 바로 북한이다.(Konas)

장영걸(요덕수용소, 1997~1998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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