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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⑤]악으로 버틴 10년 북창수용소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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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옥순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박옥순(북창수용소, 1979~1989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올곧은 남편 수용소에 수감되다

남편이 벌목으로 돈 좀 벌겠다고 작정하고 소련으로 일을하러 들어간 것은 1973년이었다. 몸이 원체 약한 사람이었지만 친구의 도움으로 신체검사표를 조작해 간신히 들어갈 수가 있었다. 당시 남편이 있던 사업소에 간부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일본산 천 밀매를 남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남편이 소련말을 잘하다 보니 그가 준 일본 천을 좋은 값에 팔았고 그 돈을 고스란히 그 간부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주위 동료들이 남편의 밀매를 눈치채고 보위부에 밀고하였다. 남편은 후일이 두려워 도망을 갔는데 그곳이 평소 알고 지내던 소련인의 집이었다.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도망쳤다는 점도 수상쩍게 보는 판국이었는데 소련인의 집으로 도망을 갔으니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가는 사람으로 보기에 딱 좋았던 것이다. 결국 남편은 18호 북창수용소로 보내졌는데 그때가 1976년도였다.

남편이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던 해가 1976년도였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나는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로 3년간 남편의 생사여부를 모르고 지내던 1979년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귀국하면서 남편이 북창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에 북창수용소에서는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남편은 미안한 마음에 3년 동안 편지도 부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남편이 너무 밉기도 했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남편과 이혼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을 찾아갔다. 원래는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지만 남편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고는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수용소에 들어가 보니 길도 외길일 뿐 아니라 바로 옆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주변은 온통 산이라 도망치고자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북창수용소에 들어가서 남편을 보는 예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어서 차마 이혼하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는 세대주가 거주지를 옮기면 남은 가족들은 모두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는다면 나와 아이들도 모두 북창수용소로 이주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와 3명의 어린 자식들은 북창수용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북창수용소는 한 개 군보다도 큰 지역인데 돌이 많아서 석산리라고도 불렸다. 석산리는 제2의 평양이라고 할 정도로 간부급으로 있던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정치범보다는 경제범들이 많이 오는 곳이고 간부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여느 관리소보다는 감시·감독이 약한측에 속했다.

여자 채탄공으로 6년을 살다

북창수용소에서 주로 하는 일은 탄광일인데 1979년 9월에 수용소에 들어가 난생 처음 갱일을 접했다. 할당량이 매일 달라졌다. 보통은 1인당 하루에 몇 톤을 캐라고 정해주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남자들은 채탄공과 굴진공을 한다. 굴진공이 굴을 뚫으면 그 굴에 채탄공이 들어가 탄을 캐낸다. 여자들은 주로 조구통관리반에 들어가는데 하는 일은 벨트 콤페어를 통해 운반된 석탄을 받는 작업이다. 나는 여자임에도 채탄공으로 일하였다. 남편이 몸이 너무 허약해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자처해서 남편과 같이 탄광일을 했다.

모든 인부는 아침 7시까지 출근하는데 산에 올라가서 갱안에 세울 통발을 가져와야 한다. 나무를 하는 일만 해도 한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었지만 교대를 해주는 8시까지 작업장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나무를 끌고 산을 막 뛰어 내려와야만 했다. 저녁에 집에 오면 9시나 10시쯤이 되었다.

탄광 안에서 노동시간은 12시간 된다. 하루가 총화로 시작해서 총화로 끝나는데 아침에 정해준 계획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저녁 총화를 해주지 않았다. 저녁 총화를 받지 못하면 퇴근을 할 수 없기에 집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계획량을 달성해야 했다. 교대시간이 되어도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무가 끝난 후에도 탄을 찾으러 버력더미 사이를 헤맸다.

모두 새까맣게 물들어 퇴근할 때 샤워를 해야 하지만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갱 앞에 흐르는 도랑물의 얼음을 깨고 얼음물로 샤워를 하고 퇴근하고는 했다. 막장 안에는 안전장치도 없었다. 때로는 불도 없이 갱 안에 들어가서 작업을 했다.

탄광에서 무수히 죽어가는 사람들

탄광에서는 안전규정대로 마스크를 쓰고 갱에 들어가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탄광에서 일을 하다 보니 탄이 코로 들어가서 코를 풀면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탄이 나오곤 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농담 삼아 ‘구멍탄을 뽑았다’고 말하곤 했다. 가래를 뱉으면 석탄이 섞여서 항상 검은 가래가 나왔다. 탄광 일을 관둔 후에도 3년 동안 검은 가래가 나올 정도로 탄이 몸에 쌓여갔다.

석탄을 캔 자리에서는 가스가 나오기 때문에 탄광 안은 항상 가스로 가득 차 있다. 탄광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피곤함을 느꼈다. 일을 하던 사람들이 가스에 취해서 넘어지고 토하기 일쑤였다. 압축공기가 들어와서 공기순환이 되긴 하지만 워낙 양이 적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가스에 취해 사람들은 항상 두통을 호소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하루 업무량이 많아 많이 죽었는다.

탄이 없어서 통발을 세워둔 위까지 파다 보면 통발이 헐거워져 갱이 무너지는데 한번은 12명이 죽었다. 묻힌 사람을 구하겠다고 들어갔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었다.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 일어났던 가장 큰 사고였다. 사람이 죽어도 보상이라는 것은 전혀 없고, 그저 죽은 그날 바로 장례를 지내주는 것이 끝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관을 짜서 산에 묻어주는 식이었다.

탄광 안에서는 매몰 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맥을 잘못 건드려 물이 터지는 일이 종종 있다. 수맥이 터졌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물에 젖은 석탄이 빠른 속도로 탄광을 덮치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갱의 천장 부근까지 죽탄이 찰 정도의 큰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지만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자가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떨어지는 돌에 얼굴을 맞아 왼쪽 볼에 구멍이 난 사람도 있었다. 나도 떨어지는 돌에 허리를 다쳐 지금도 척추가 좋지 않다.

수용소 생활 중 가장 큰 문제는 건강이었다. 채탄공은 폐에 탄가루가 들어가고 굴진공은 폐에 돌가루가 쌓여갔다. 나는 6년 동안 채탄공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약초반이라는 병원 소속의 업무로 직업을 바꿨는데 그때 규폐에 걸려 입원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규폐에 걸린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하고 금방 죽었다. 걸음도 겨우 걷는 수준이었고 내 주먹보다도 적은 양의 쌀을 주어도 그것을 들 힘이 없었다. 특히 굴진공의 경우에는 폐에 돌가루가 차다 보니 공기가 들어갈 공간이 부족해서 건강한 사람이 한번 내쉬는 숨을 그 사람들은 10번을 내쉬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북창수용소의 기억 : 공개처형과 배급

내가 있을 때는 월급을 조금씩 줬는데 내가 채탄공을 관둔 이후부터는 탄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 월급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월급이라고 해봐야 우리가 일한 만큼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돈이 생기면 사람들끼리 몰래 쌀을 매매하였는데 월급으로는 쌀을 사 먹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수용소는 배급제였는데 배급표는 갱에서 주었다. 그것을 받아 배급소에 가서 배급을 받는 식이었는데 그나마도 1996년부터는 배급이 끊겼다.

공개 처형이 있는 날에는 다 모이라고 인민반으로 통보가 온다. 대동강변에 공개 처형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통보가 오면 모두 그곳으로 모인다. 싫어도 무조건 가야 한다. 나는 공개처형 하는 장면을 본 적이 한번 있다. 그곳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개처형을 보았기 때문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남자 네 명을 처형했는데 처형장에 나오는 것부터가 이미 절반은 죽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끌려오다시피 하는데 눈은 천으로 싸매져 있었다. 나무에 세워놓고 동아줄로 머리와 가슴, 다리를 묶고 총을 쏘아 동아줄을 명중시킨다. 처형하기 전에 안전원이 죄명을 말하는데 그 내용을 들으면 죽을 만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죄목도 많고 죄질도 나빴다. 하지만 그 내용이 조작된 것이라는 건 어린아이들도 다 알았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공개 처형되는 경우도 많았다.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없었다. 워낙에 지형이 묘한데다,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탈출을 해도 갈 곳이 없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탈출 성공도 불가능한데다, 잡히면 공개처형을 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탈출할 생각조차 안 하고 힘들어도 묵묵히 주어진 탄광일을 하곤 했다.

북창수용소에서 해제되다

우리 가족은 수용소에 들어간 지 만10년만인 1989년에 해제가 되었다. 북창수용소는 80년대 초부터 해제가 시작되었는데 보통 해제가 되도 그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해제가 되기 전까지 해제된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북창수용소에서 해제가 되도 지낼 거처가 있고 해제자의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이 있어야만 외부에 나갈 수가 있다. 대부분 갈 곳이 없고 보증해 줄 사람이 없어서 해제된 이후에도 계속 18호 내에서 산다).

그 안에서 해제가 안 된 사람들은 말하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사람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머슴이 지주되면 더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제된 사람이 오히려 해제 안 된 사람을 더 괴롭혔다. 행여나 싸움이 나서 해제된 사람이 칼부림을 해도 해제 안 된 사람은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서러운 나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해제가 됐을 때 뛸 듯이 기뻤다. 해제가 된 이후에도 우리가족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북창수용소에서 살았다.

봉창 17호 수용소

봉창은 북창 18호 수용소의 가장 끝인 잠상과 명학 옆에 위치해 있다. 봉창 17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봉창에 있는 사람들은 보초들 때문에 가시철조망 주변에 있는 도토리를 줍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구역에 있던 사람들이 17호 수용소 근처에 가서 도토리를 주워오곤 했다. 봉창은 정치범으로만 구성된 곳이라 감시·감독이 엄격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곳 사람들은 말을 할 때도 안전원의 존재 유무를 항상 살피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사람이 철조망 근처에서 소를 돌보던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는 몰래 이것저것을 물었던 모양이다. 그 아이의 말에 따르면 봉창 사람들은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고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따로 지내고 남자·여자 모두 흩어져 별도의 숙소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인민학교 4학년까지만 공부를 시키고 그 이후에는 바로 일을 시킨다고 했다. 워낙 엄격하고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18호 수용소 사람들도 봉창 17호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곤 했던 기억이 난다.(Konas)

박옥순(북창수용소, 1979~1989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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