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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⑥]정치범이 된 전화교환원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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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금란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이금란(요덕수용소, 2003~2006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요덕으로

북한에서 전화 교환소 일을 했던 나는 탈북 후 한국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엄마와 동생이 먼저 한국으로 들어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 12월 28일 내몽골에서 다른 북한사람들 7명과 함께 붙잡히면서 나의 요덕스토리가 시작되었다. 북송된 우리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내몽골로 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내몽골, 천도, 심양 등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남한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8명 중 한 사람에게서 성경책이 나오면서 상황은 우리에게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성경이 발각된 사람이 한국으로 가려고 했다고 자백을 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온성군 보위부 구류장, 평양 국가보위부 등을 거쳐 2003년 5월 15일에 요덕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보위부원들은 내가 남한으로 가려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요덕 수용소로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나의 엄마와 동생이 이미 남한으로 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요덕수용소에 수감되게 된 것은 나 하나의 죄뿐이 아니라 탈북한 엄마와 동생의 죄까지 모두 내가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나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을 고맙게 여겼다.

요덕에서의 생활

2003년 5월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동했는데 마지막으로 도착한 기차역에 ‘요덕’이라고 적혀있었다. 그곳에 수용소가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인계되어 화물차를 타고 세 시간을 더 달려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요덕수용소 정문에서 다시 담당 보위부원에게 인계되었다. 그 곳은 바로 내가 3년을 지낸 서림천,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이었다. 사면이 전기 철조망으로 되어 있는 그곳에서 나는 다시 심문을 받았다. 당시에는 내가 얼마나 그 곳에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들어간 지 3년 됐을 때 집에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때 그것이 3년 혁명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요덕에서 나는 2중대 여자소대에 배치되었다. 1999년에 새로 생긴 요덕수용소의 혁명화구역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3년형을 받고 수감한다. 다만, 내가 나온 후부터 혁명화 기간이 5년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산에 올라가면 완전통제구역이 보이는데, 오로지 넓은 벌판뿐이었다. 나도 그저 산나물을 뜯으러 가서 건너편으로만 봤을 뿐이다. 내가 있는 혁명화구역보다 훨씬 넓고 논밭과 공장도 있었다. 집으로 보이는 건물들도 있었는데 건물들의 외형은 비슷비슷했다. 완전통제구역은 가정집도 있다고 하니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던 혁명화구역에는 가족세대가 없었다. 부부가 같이 들어와도 각각 소대로 배치되어 따로 생활해야 했다.

그 안에서는 다른 사람이 무슨 죄로 들어왔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수감자들이 간혹 수용소의 자세한 위치를 알려고 하다 발각되어서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 안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온 승용차에 몸을 실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실려 간 사람들은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요덕에는 탈북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사기를 친 사람, 중앙당 간부, 국가 보위부 보위지도원이었다는 사람도 들어왔다. 수감자들 중에는 보위부원들 끄나풀이 있었기 때문에 행여나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을 문제 삼아 또 구류장으로 옮겨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남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간섭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내 생활에만 충실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수감자 이금란

내가 처음에 요덕에서 배치 받은 작업은 농사일이었다. 담배 따기, 옥수수 심기, 김매고 탈곡하기, 콩 심기 등을 했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는 일과 김매는 일을 했고, 여름에는 주로 풀베기를 했는데 여자들 중 일부는 산나물, 고사리, 두릅, 산딸기 등을 따러 다녔다. 풀베기가 제일 힘들었는데 한 사람당 하루에 500kg, 800kg씩 풀을 베서 등짐으로 지고 날라야 한다.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면 식사량이 절반으로 줄어버린다. 가을에는 탈곡하고 겨울에는 원목 끌기를 했는데 원목은 반드시 정해진 양을 혼자 끌어야 했다. 나무를 끌고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인민군대처럼 달려야 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원목을 놓치면 앞사람이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나도 뒷사람이 놓친 원목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는데 심하게 다쳐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새끼 꼬기 업무를 해야만 했다. 새끼를 꼬는 작업도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 수용소에서는 아파도 쉬지 못하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모든 강제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요덕수용소에 들어간 지 1년 뒤인 2004년 여름, 나는 염소사라는 일에 배치를 받았다. 염소를 몰고 다니면서 풀을 먹이고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보위부원들에게 성실한 모습을 잘 보이는 사람들이 주로 뽑혔다. 아주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염소를 몰고 염소집을 청소하는 일이기 때문에 농사일 등 수용소 내 다른 작업들에 비해 훨씬 수월했고 노동의 강도도 약한 편이었다. 이 염소사를 했던 것이 나에게는 휴식과도 같았다. 요덕에서의 생활이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제일 좋았던 일이라고 꼽을 만한 일이었다.

요덕에서 경험한 형편없는 식사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에게 소화가 잘된다며 죽밥이라는 것을 주었는데 옥수수와 쌀겨를 섞어 묽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 것을 먹고 하루 500kg, 800kg씩 풀을 베는 고된 노동을 하면 배가 항상 고플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에 못 이겨 뱀도 잡아먹고 쥐도 잡아먹었다. 풀베기 할 때 나온 번데기를 구워 먹기도 하는 등 먹을 수 있겠다 싶은 것들은 다 먹었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어느 누구도 꺼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위생 따위는 당연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해진 식사 이외에 먹는 것들도 걸리지 않게 아는 사람들끼리만 몰래 몰래 먹어야 했다. 하루 하루가 생명의 위협이었다.

요덕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요덕에서는 여자라고 편의를 봐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숙소는 한국의 단칸방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여자 숙소는 방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한 칸은 8명, 다른 칸에서는 22명이 잤다. 여자라고 따뜻한 방을 제공해주지도 입을 옷이나 생리대를 제공해주지도 않았다. 그곳에서는 신발이며 옷도 처음 들어간 그대로 입고 지내야 한다. 군인들이 입던 군복 중에 못쓰게 된 것이 수용소로 오게 되면 받아 입기도 하고 해제되어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옷가지를 구하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여자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요덕에 들어갈 때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단벌옷이 전부였기 때문에 생리대가 없어서 옷을 사각으로 찢어 계속해서 사용했다. 생리대를 구할 수 없는 곳이라 잃어버리면 큰일 나기 때문에 천을 빨아 내 가슴에 차서 말려서 다시 사용하곤 했다. 생리중이라도 일과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할당량은 반드시 채워야 했다. 영양상태도 안 좋고 몸이 힘들다 보니 2년간 생리가 끊어지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에도 정상적인 생리주기를 되찾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여자 소대에는 30여명이 있었고 숙소는 중대 언저리인 둔덕에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연애나 결혼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애는 고사하고 남녀 접촉조차 금지된 수용소 내에서도 몰래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했다.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임신을 한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보위부원들은 뱃속의 아이를 약물로 유산시켜 땅에다가 파묻었다. 또 연애를 한 죄를 물어 남자는 6개월, 여자는 1년 형기가 연장되었다. 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아이도 잃고 가혹한 처벌까지 받게 된 여자를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수한 죽음들

내가 있었던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100명이 넘게 죽었다. 그러나 장례는 고사하고 관도 없이 그냥 대충 시체를 실어다가 땅에다 묻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이 영양실조로 죽었는데 특히 구류장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구류장에서는 국수를 주는데 세 번 젓가락질 하면 끝인 양을 제공했다. 그런 양을 몇 개월씩 먹다 보니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이미 구류장에서 반죽음이 된 사람을 수용소에 데려다 놓고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강제노동을 시키니 이미 상한 몸이 어떻게 회복을 하겠는가. 어찌 보면 구류장에서 살아나온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2003년 6월에는 28살, 32살짜리 남자 둘이 배가 고파 도망가다 잡혀 총살을 당한 일이 있었다. 둘 다 일을 곧잘 했는데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도망을 친 것이다. 그러나 사면이 다 전기철조망이고 깊은 산골짜기인 그곳에서 도망을 치면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그들은 수용소 안을 뱅뱅 돌다가 붙잡혀 공개처형을 당했다.

요덕에서 나를 버티게 한 힘, 종교

나는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지만 요덕에서 살아남을 조그만 힘이라도 얻기 위해 더욱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기도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마음 속으로 항상 외웠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일가를 숭배하는 것 외엔 종교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수용소는 기독교를 믿다가 발각되는 사람이 잡혀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울 뿐이었다. 항상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기도를 했는데 어느 순간 그 감사가 진짜처럼 느껴지면서 나에게 살아나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요덕수용소를 나와서

수용소에 수감되면 그 즉시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3년 동안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철저히 감춰졌던 것이다.

요덕수용소에서 풀려나면 군(郡) 보위부로 제일 먼저 가게 된다. 2006년 5월 해제된 나는 군 보위부 사람에게 인계되어 온성군 보위부로 가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조사 이후에도 나의 존재를 담보할 사람을 확인 해야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조사과정 중 내 서류에 ‘5894 군부대 노동자’로 기입되어 있었는데 군 보위부에서 이 명칭을 보더니 ‘당신 요덕 15호 갔다 왔네’라고 말을 하고 해서 내가 있던 곳이 요덕수용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나는 더 이상 이전의 전화 교환원 이금란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깝던 사이였어도 사람들은 나에게 반동분자라고 손가락질 했다. 감시하는 보위부원이 항상 붙어서 나의 하루 하루가 상부에 보고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직장을 구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직장을 구하고 싶어도 다시 탈북할까봐 사람들도 나를 꺼려했다. 더구나 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나는 밤마다 다시 잡혀가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또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도 무사히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요덕수용소에서 나온 지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악몽에 시달린다.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를 때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옥죄어져 온다. 수용소에서 당한 모진 노동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지금도 계속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옥 같은 그곳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오늘을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다.(Konas)

이금란(요덕수용소, 2003~2006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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