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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⑦] 눈물로 그린 수용소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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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혜숙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김혜숙(북창수용소, 1975~2002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13살, 수용소에 들어가다

나는 1962년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능동에서 출생했다. 식솔이 많은지라 부모님께서는 나를 몸이 불편하신 외할머니 댁에 맡기셨지만 나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1970년에 가족들이 수용소라는 곳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할머니께서 사정을 하신 덕분에 중학교 2학년까지는 계속 외할머니와 살 수 있었지만 결국 1975년 보위부원의 압박에 못 이겨 수용소로 향하게 되었다.

둘째 고모와 어머니를 수용소에서 5년 만에 만났는데 어머니는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야위어있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운 뒤 어머니를 따라 몇 시간을 걸어 곧 쓰러질 것 같이 초라한 집에 도착했다. 잠시 후 저녁상이 들어왔는데 나물 말린 것에 강냉이 가루를 조금 섞은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당시에는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먹을 수 있는지 음식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아버지의 안부를 여쭤보니 일 년 전인 1974년 12월 7일 보위부에서 아버지를 데려간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했다. 들어온 지 사흘 뒤에 어머니를 따라 학교에 갔는데 단층 건물 안에 있는 시설들과 교구들은 정말 초라해 실망스러웠다. 교사들조차 학생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글을 읽고 기본적인 산수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빨리 학교를 졸업시켜 광산 노동에 투입시켰다.

학생들은 재학 중일 때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저녁 9시부터 새벽 6시까지 학교를 지키며 숙직을 서야 했는데 산나물로 만든 도시락으로 저녁밥을 대신했다. 숙직을 선 다음날 아침에는 힘이 없어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결석을 하면 교사와 급우들에게 두들겨 맞기가 일쑤여서 학교를 빠질 수가 없었다. 소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은 하교 후에 진흙을 파서 탄광으로 옮기는 일을 했고 나는 오전에 통나무를 탄광으로 가져간 다음에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쉬는 날에는 온 가족이 산으로 올라가 먹을 수 있는 풀을 모조리 뜯어 허기를 달랬다. 사는 것이 이렇다 보니 어린 나이에도 죽고 싶은 생각이 울컥 치솟곤 했다. 하지만 자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곳이 수용소였다. 3세대를 한 조로 묶어 서로를 감시하게 하여 약간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담당 지도원이 인민 반장한테 고발해 노동 교양소에 끌려가 처벌을 받게 되니 딴 마음을 품지도 못했다. 이렇듯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지만 그래도 부모 형제 없이 살아가는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훨씬 형편이 나았다.

어머니의 죽음, 소녀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힘들게 우리를 키우시던 어머니는 결국 병이 나 앓아눕고 마셨다. 지극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하려고 했지만 결국 6개월의 투병 생활 끝에 1979년 5월 31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께서 떠나시고 나니 다섯 남매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지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세대주가 되어 할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학교운동장에 있는 건설작업장에서 일을 하는 고된 생활을 하다가 1979년 8월에 심산갱 채탄공으로 배치 받았다.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가혹한 노동이었고 규율도 엄격해서 ‘소 끌려 다니듯’ 일을 해야 했다. 허기를 달래고 동생들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상점에서 미역을 사서 죽에 조금씩 넣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다 보면 어찌나 서러운지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많았다.

한 번은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석탄물이 흘러나와 작업장의 노동자들을 덮쳤다. 당시에 나는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을 했다. 다행히 사망한 사람들은 없었지만 이렇듯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수감자들의 운명이었다.

석탄 하나하나에 탄광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배어있는데 안전부와 보위부 가족들은 연탄을 마음껏 사용하고 노동자들을 자기 마음껏 부려먹었다. 자기네 창고에 연탄을 실어다 주는 수감자들에게 감자 몇 알 삶아서 주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나마도 수감자들은 감사히 여기면서 게걸스럽게 먹어 굶주린 속을 채웠다. 쉬는 날에도 김매기, 석탄 나르기 등의 노동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수감자들은 단 하루도 중노동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노망이 든 할머니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3년 뒤에는 남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탄광 굴진공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 후 셋째 여동생도 내가 일하는 광산의 채탄공으로 배치를 받아 살림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는 게 조금 나아지나 싶던 중, 남동생이 탄광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그저 동생의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뒤에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올 눈물도 다 말랐는지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1982~83년 사이에는 강연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몇 명을 추려서 어딘가로 끌고 가는 일들이 일어났다. 연좌제에 얽힌 일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들이 대체 어디로, 왜 끌려갔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억압과 감시가 수감자들의 고통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수감자들은 배를 곯고 중노동을 시켜도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곤 했다.

짐승만도 못한 18호 북창 수용소 수감자

수용소에서는 1년에 20~30명이 총살을 당했다. 대동강 건너편의 14호 보위부 수용소로 건너가 옥수수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14호 수용소에 가서 옥수수를 훔치면 죽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총살이 결정된 수감자들은 안전부 초병들에 의해 공개 처형을 당했는데 공개처형은 수감자들 사이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97년 심화조 사건 당시에는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끌려 들어와 총살당했다. 이 중에는 김정일이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숙청한 김일성의 충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포시 와우도 엄정도 행정위원장은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았는데 엄정도와 그의 아들과 딸 모두 탄광에서 일을 하다 부상을 당해 불구가 되었다. 안전부 간부들은 심화조 사건 관련 인물들이 들어왔을 때 악독하게 굴며 귀한 물품들을 뺏어갔지만, 때로는 뇌물을 받고 석방시켜주는 경우도 있었다. 김정일은 이러한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해 “당의 은덕을 배반한 자들”이라면서 “석탄 1t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은 정말 짐승만도 못한 존재였다. 나와 같이 일하던 동료 김영숙은 점을 봤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당했고, 친구였던 정선화 부부는 남편이 아이를 낳은 아내를 위하여 병원에서 몰래 의약품과 의사들의 옷가지를 훔쳐 나왔다가 총살을 당했다. 대부분의 지도원들과 보위부원들은 수감자들을 가혹하게 대했지만 그 중 내 기억에 제일 선명하게 남는 악마 같은 자는 최원철이라는 지도원이었다. 그는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크게 부풀려 수감자들을 반죽음으로 몰아갔다. 후에 그는 수감자들의 식량을 탈취한 사실이 발각되어 쫓겨났다.

때로는 지도원들조차 가혹 행위와 고문에 휘말렸는데 하루는 심산 분주소 비서가 자신의 권총을 잃어버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아내는 해직되고 그는 노동교양소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몇 년 뒤에 그의 옆집에 살고 있던 담당 지도원이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권총을 훔쳤었다는 것이 우연히 밝혀진 이후, 그 지도원은 어디론가 실려 갔고 고문을 당하던 분주소 비서는 복직을 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복직을 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수용소에서 해제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소에 관한 내용을 일체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하지만,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갖은 악행은 저들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자루 속의 송곳이나 마찬가지다.

채탄공 김혜숙, 전업주부가 되다

남녀 간의 혼인은 남자가 30세, 여자가 28세가 돼야 승낙이 되었는데, 내 나이가 서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동생들까지 부양할 생각을 가진 남자들은 없었다. 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발파공으로 일하던 남자와 중매로 결혼하게 되었다. 근면한 그 사람은 동생 셋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수용소에 규칙상 혼인 뒤에 여성은 일을 그만두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사실 전업주부라도 탄광 지원 사업, 농촌지원 사업 등의 노동에는 참여해야만 했다. 그래도 노동자들보다는 시간이 많으니 어떻게 해서든 부업으로 상부에 바칠 뇌물을 마련할 결심을 했다. 관리위원회에 바치는 것이 많을수록 모범 가정으로 눈에 들어 수용소에서 해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돼지를 구해서 가족 전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돼지에게 먹일 풀을 뜯곤 했다. 부엌에서 기르자니 돼지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도난 사건이 끊이지를 않아 도저히 밖에 풀어둘 수가 없었다.

결혼 후 입덧이 올라와 돼지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번은 큰 개 하나가 무언가를 입에 물고 뛰는 것이 보여 뒤쫓아가봤더니 돼지껍데기가 아닌가. 보통 돼지를 잡으면 그 가죽을 식당 뒤 담벼락에서 말리는데 그것을 개가 물고 달아나던 중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돼지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산모라고 해도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는 못한다. 제대로 영양섭취도 못한 상태에서 91년 7월 첫 아이를 출산했다. 아기를 낳고 난 뒤에도 기저귀가 없어 거친 천을 입혔고 생리대로 쓸 천이 없어 찢은 속옷과 비닐로 대신했다.

3년 뒤에는 둘째 아이가 또 생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입덧을 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토마토는 그렇게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쉬는 날에 나를 채소밭에 데리고 가 일하고 있던 할머니에게 사정을 했다. 정말 고맙게도 할머니는 5kg 정도나 되는 토마토를 챙겨줬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토마토를 나는 꼭지까지 남기지 않고 다 씹어 먹었다.

김일성 시절에는 그래도 배급은 나름대로 잘 이루어지는 편이었는데 김정일 정권이 들어서자 식량이 제대로 지급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계속 굶주림에 시달려왔지만 이번에는 그 비참함이 한층 더 극심해졌다. 하루에 한 끼는 산나물이나 도토리 술 찌꺼기로 때울 정도였고, 길가에서 쓰러져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아사했고, 나도 제대로 먹지 못해 아이에게 먹일 젖조차 나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급성 펠라그라(니코틴산 결핍증후군이라고도 한다. 결핵·위장병 등이 있으면 걸리기 쉬우며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방에서 유행한다. 손발·목·얼굴 등과 같이 햇볕을 쬐는 피부에 생기는 홍반 및 신경장애와 위장장애가 주 증세이다.)에 걸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내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신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자니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었고 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시 병원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주워 먹고 사망한 자, 펠라그라로 사망한 자 등으로 넘쳐났었다. 사람들은 옥수수 밭에서 익지도 않은 옥수수 낱알들을 주워 먹곤 했는데 적발되면 노동교양소로 끌려갔다. 관리원들은 수감자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처참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비웃곤 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힘든 수감자들의 물건을 갈취하는 경우도 빈번해 수감자들의 삶은 나날이 비참해져 갈 뿐이었다.

나는 병에 걸린 남편을 대신해 97년 5월부터 건설사업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건설사업소가 담당하는 업무는 보위부와 안전부 간부들 그리고 수감자들의 가택을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수 시간의 중노동에 관리인들의 학대까지 더해져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몇 달 뒤에 기와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우리는 한 달에 13,500장의 기와를 생산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2대의 기계로, 그것도 그 중 몇 대는 고장 난 상태에서 요구 물량을 채우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화조 사건으로 수감된 이들 중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기와반으로 배치되었는데, 대부분 고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 주어진 작업을 버거워했다. 보위부 14호 수용소 직맹위원장이었던 박성철이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본인은 무고하다면서 상소 편지를 몇 번이나 올렸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공개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수용소 안에서 총살은 수감자들 사이에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행해지곤 했다.

건설사업소에서 일하는 수감자들은 주말에도 노동을 강요받았고, 탄광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급 또한 적었다. 나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토끼나 돼지 등을 당위원회에 바치며 수용소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꿈에도 그리던 해제 그리고 또 다른 비극

마침내 2001년 2월 16일, 우리 가족은 드디어 수용소에서 해제되었다. 당시의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뻥 뚫린 가슴으로 하늘을 훨훨 날아갈 듯이 좋았다. 일반 공민증을 받고 난 뒤 큰아버지를 뵈러 평안남도 회창군 회창읍으로 갔다. 큰아버지의 소재는 안전부 주민등록과에서 알려주었다. 큰아버지를 만나고 나서야 나는 우리 가족이 왜 28년 동안 수용소에서 피눈물을 쏟아야 했는지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월남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연좌제에 걸려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추방된 것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수용소를 빠져 나왔건만, 또 다른 비극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시집으로 도움을 구하러 간 사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제 겨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어머니, 동생, 그리고 할머니에 이어 남편까지 내 곁을 떠나가니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나는 그저 죽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자유를 찾아 탈북을 결심하다

수용소를 떠나 2002년 8월, 평안남도 평성에 있는 이모 집에 의탁을 하게 되었는데 눈치가 보여 우연히 만난 동창생을 통해 집도 구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장사였지만 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찰나, 2003년 7월에 홍수로 집이 떠내려 가버리는 대사단이 났다. 나는 집과 함께 떠내려간 두 아이를 정신없이 찾아보았지만 아이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남편에 이어 두 아이마저 나를 떠나가고 만 것이다. 멍하니 앉아 눈물을 흘리던 나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수용소에서 얻은 무릎의 신경통을 고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결국 청진에까지 이르러 다행스럽게도 뜸과 침으로 효과를 볼 수 있었지만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아 무엇을 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하루는 공원에 앉아 한숨을 푹 쉬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 하나가 다가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중국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차피 가족도 다 죽고 먹고 살기도 힘드니 이판사판이다 하는 마음으로 중국행을 택했다.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 두만강을 건넜다. 거기서 조선족 남자의 소개로 화룡시내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2006년 겨울에 식당 사장이 북한 무산으로 들어가 새끼돼지를 사오라고 시켜 다시 북한 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지도원들에게 발각되어 안전부에 구류되고 말았다. 나는 그 곳에서 온갖 모욕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지만 당시 수중에 있던 돈 여덟 뭉치 중 넷은 삼키고 나머지 넷은 자궁에 넣어두는 등 악착같이 참고 견뎠다.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떠나다

2006년 11월 3일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청진 도집결소로 호송되었고 그 후에 그 지옥과 같았던 18호 수용소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중간에 탈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지만 호송 경비가 삼엄해 결국 수용소로 끌려가고야 말았다. 끌려가서 봉창 분주소에서 20일 가량 대기하고 있다가 2007년 2월 15일에 노동교양소 6개월 형을 판결 받았다. 그렇게 노동교양소에 수감되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감시가 느슨해지는 때만을 기다렸다. 3월 2일이 면회일이라 모두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논다는 사실을 알고 그 날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날 아침 8시 30분경, 나는 결국 교양소에서의 탈거(脫去)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여기저기 지인들 댁에 의탁하다가 결국 다시 중국으로 향하기로 결심했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월경(越境)하여 연길을 지나 도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 안내인이었던 중국 아주머니와 아들은 탈북자들을 주 타깃으로 삼는 인신매매범들이었다. 나는 53세의 한족에게 팔려갔다. 어느 정도의 감시가 있었지만 나는 심성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다른 탈북 여성들은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까. 이들의 혈루(血淚)는 마를 날이 없다.

그렇게 9개월을 지내다가 나는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내 솔직한 마음을 함께 살고 있던 한족에게 얘기했다. 다행히 그 한족은 허락을 하며 한국행 브로커까지 소개시켜주었다. 그리하여 2009년 3월 4일에 연길에서 장춘까지 버스로 이동했고 다시 중국 남부의 곤명이라는 곳까지 갔다. 거기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동행한 아주머니 한 분이 악어에게 물려 물속으로 빨려가는 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난관과 역경을 헤쳐 나가야 했다.

태국에 도착하자 이민국에서 재판을 받고 이민국 수용소에 수감되어 더위와 싸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0일 정도 지났을까 내 이름이 호명되는 것이다. 나는 정말 한국으로 가는 것인가 반신반의하면서 차를 탔는데 방콕 비행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다섯 시간 동안 창공을 헤치고 난 뒤 내가 탑승한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나는 천신만고 끝에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하였다.(Konas)

김혜숙(북창수용소, 1975~2002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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