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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⑩]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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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영순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김영순(요덕수용소, 1970~1979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영광과 몰락의 갈림길

우리집은 인민군 참모장이었던 오빠 덕분에 혁명열사가족으로 평양에 있는 고급군관아파트에 머물며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던 오빠 김창수는 후에 김석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군 창군멤버로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정치에 입성하라는 김일성의 제의를 거절하고 평양 철도 경비대 대대장으로서 인민군에 남아 북한군 창설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빠는 참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하였는데 오빠가 공식적으로 북한 혁명열사와 내각 공로자 명단에 등록되게 되어 우리 일가는 혁명열사 유가족으로서 많은 배려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오빠와 친분이 있던 자들이 훗날 모두 북한의 핵심적인 고위 관료가 되어 우리가족도 자연스레 혜택을 얻곤 했다.

나는 해방 직후 평양 최고 명문이었던 평양 제2인민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재학 중 무용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무용과 인연을 맺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10월 말부터는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군 간부 가족들이 중국 동북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우리 일가도 회령을 거쳐 흑룡강성 동부의 영안현 세화진 녹도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나는 훗날 김정일의 처가 되는 성혜림을 만났다.

정전 후 나는 전후 문예부문 재건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양종합예술학교에 무용학부로 입학했다. 성혜림 또한 동교(同校)에 영화연극학과로 들어와 나와 친분을 쌓아갔다. 평양종합대학 졸업 후에는 1956년 9월 화성리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무용부 전문배우로 입대하여 당대회공연, 국가연회 등 중요한 공연에 주로 참가하였다.

휴전 전부터 김일성의 종파 숙청의 피바람이 노동당, 인민군, 예술계 등을 휩쓰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의붓오빠 김석산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많은 고위 간부들이 숙청당하였는데 세계적인 무용수로 주목을 받던 나의 은사 최승희 선생님과 많은 인민군 고위 간부들이 관료주의, 군벌주의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북창수용소로 끌려갔다.

나는 성혜림이 김정일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되게 되었다. 본격적인 비운은 남편의 실종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 7월 남편 이동명이 실종되었는데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고 있던 남편이 뜬금없이 중국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 날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이후로도 계속 소식이 닿지 않았다.

수용소 나라의 상징, 요덕

남편 실종 이후 나는 서평양역에서 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어 어느 아파트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거기서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진술서를 무려 두 달간이나 썼다. 9월 말에는 보위부 간부 다섯이 찾아와 내 당증을 압수했다. 그 후 보위부원과 동행하여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싼 뒤 온 가족이 함께 요덕수용소로 향했다.

연좌제는 해당 정치범을 포함하여 아래로 3대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부모님은 법상 수감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용소에 들어가 고생을 할 내가 걱정되어 자청하여 수용소행을 택하셨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을 것이다.

수용소로 들어가서 우리 가족이 처음 배치 받은 곳은 공업대대와 관리위원회가 있는 구읍리였는데 배정 받은 집은 마른 옥수숫대로 엮은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수용소 자체는 경비가 굉장히 삼엄했고 수감된 정치범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시스템이었다. 기가 막힌 것은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죄목을 정확히 몰랐다. 심지어 우리 가족조차 정당한 재판 없이 수용소에 끌려갈 당시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요덕에 들어온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평생 농사 경험도 없이 곱게 자라온 여자가 나무를 하고 농사일을 해서 여섯 식구를 부양하려니 몸살로 끙끙 앓았다. 노동을 할 때에도 엄격한 통제와 감시가 이루어졌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보위부원이 해당 수감자를 구류장으로 끌고 갔다.

구류장에 들어간 자가 살아 나온 경우는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다. 수감자들에게 식량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고통을 당했는데 학교가 있다고는 하나 수감자의 자식들은 하루 종일 토끼 사육과 같은 노동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나는 출신 성분이 좋아 상대적으로 배급 사정이 나은 공업대대로 재배치되었는데 출근길이 10리나 되어 밥을 제대로 못 먹다 보니 소화 불량에 걸리고 간이 붓는 등 건강상태가 악화되었다. 수감자들은 열 두 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봄에는 영양보충을 위해 산에서 이름도 모르는 나물들을 뜯어먹었다. 작업중에 동상에 걸리거나 나무에 깔려 죽는 일은 다반사였다.

우리 가족은 어렵사리 닭 네 마리를 키웠는데 그나마도 같은 수감자들에게 도둑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수용소를 못 버티고 탈출하려다가 발각된 수감자들은 공개 처형을 당했다.

요덕수용소가 형성된 초기에는 고위 간부들이 많이 끌려왔는데 그 중에는 최승희 선생님의 최고 수제자인 김현숙 선생님과 최민수의 외할아버지인 강홍식도 있었다. 강홍식은 펠라그라 병으로 고통 받으면서 1971년경에 사망할 때까지 영화를 향한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1975년 김정일 후계자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혜택을 받아 해제되었다.

1971년 8월 5일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실 아버지는 나의 생부가 아니셨다. 친자식도 아닌 나를 위해 선뜻 수용소행을 택할 만큼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한 마디 위로 없이 밤중에 몰래 찾아온 남자 두 명이 거적에 아무렇게 말아서 땅에 묻는데 정말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4년간 생리가 멎었을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3년 여름에 큰아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사망하고 말았다. 나의 삶에 한 가닥 희망이었던 아들을 땅에 묻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1976년 1월에는 온 가족이 영문도 모르고 완전통제 구역인 용평리로 끌려갔다. 다행히 나는 출신 성분 덕에 요덕 7반장을 맡기도 했으나 용평 완전통제구역은 요덕 수용소보다 더 심했다. 결혼도 금지되어 있고 배급도 이루어지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살아야 하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특히 매주 사상투쟁회의를 시행했는데 수감자들이 동석한 보위부원들에게 서로를 밀고하며 물어뜯는 자리였다. 실로 마지막 인간성과 양심마저 말살된 곳이었다.

영양실조로 앓아누운 어머니는 1976년 1월 말에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제대로 된 관도 장례절차도 없이 시신을 거적에 말아 산에 매장하며 나는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도 나는 어김없이 새벽 4시 반에 출근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다 1979년 1월 대략 9년 만에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한번 정치범은 영원한 정치범

우리 가족이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지옥과 같은 그 곳을 벗어났다는 것이 후련했다. 내심 평양으로 가기를 기대했지만 나는 혹한과 중노동으로 악명이 자자한 장진 중흥광산으로 배치되었다. 한번 수용소에 갔던 사람은 해제가 되어도 이전과 같은 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 평생을 죄인으로 낙인 찍혀 해제 이후에도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중흥광산은 고지대에 있었는데 12월에는 기온이 영하 30도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광산의 금맥은 질이 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순금 추출은 거의 순수한 인력(人力)에 의존했으므로 고생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이따금 다른 조와 말싸움이 나기도 했는데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깡만 남은 나는 고래고래 악을 쓰곤 했다.

1979년 여름에는 올케가 힘을 써준 덕분에 9년 만에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이동의 자유는 있었는데 정부의 지시에 의해서만 다른 지방을 갈 수 있으니 실로 종살이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평양에서는 외사촌 언니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감사하게도 형부와 언니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평양에서 고영희가 성혜림에 이어 김정일의 다음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80년 정초 함흥 시내에 놀러 갔다가 우연하게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근무하던 시절 알게 된 안전원을 만났는데 그에게 우리 가족을 중흥광산에서 벗어나 함흥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에게 명태 등 선물과 돈 2천원을 건넨 뒤 함흥 사포구역 거주권을 샀다. 둘째 아들은 중흥광산에서 계속 남아서 일하기로 하고 딸은 남에게 입양시켰으니 남은 건 고작 열세 살이 된 막내아들뿐이었다. 나는 북송교포 하나에게 옷 만드는 법을 배우고 양복점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도 나는 감시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루는 내가 살던 곳에서 다른 동네로 잠시 이사를 갔다가 돌아왔는데 담당구역 보위부원들이 내가 없어졌다는 통보를 받고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도 나는 여전히 정치범이었고 아들들은 군 입대 나이가 되었음에도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1989년 말에는 함경도 보위부 청사로 소환 당한 일이 있었다. 평양 중앙보위부 고위간부인 반탐국장이 말을 했는데 그의 얘기를 듣던 중 드디어 나는 20년 만에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은 적이 없으며 그러한 유언비어를 듣거나 퍼뜨렸을 경우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옛 친구 성혜림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이다.

180센티미터의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막내아들은 2.8 비닐론 공장 용접부에서 근무했는데 1988년 겨울에 탈북을 시도하다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 몇 년 후 성천구역 안전부 예심과에서 아들을 사랑하던 여자가 찾아와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탈북을 재시도하다가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차라리 여기에서 짐승처럼 살 바에는 저 세상에서 편히 있거라’라며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

정치범에게는 흔치 않은 경우였지만 내게는 인민반장의 직위가 주어졌다. 아마 나를 자신들의 통제권 안에 넣으려는 보위부의 계략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인민반장으로 일하면서 북한 사회의 통제 체계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북한 일반 주민들은 당, 행정조직, 그리고 인민반을 통해 숨 막히는 통제를 받았다. 인민반장의 임무는 자신이 맡은 가구의 일거수일투족의 파악과 보고였으며 인민반 내부에도 보위지도원이 몰래 심은 감시자가 있어 인민반장의 동태를 보위부에 수시로 보고했다.

철저한 감시와 통제 외에도 당적 과제, 인민반 과제 등의 사회동원도 북한 주민들의 삶을 더욱 고달프게 만들었다. 주민들은 자신만의 삶이란 것을 꿈꿀 생각조차 못했다. 인민반장이라는 직위 덕분에 북한 사회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파악이 가능했지만 여행자 상점에서 근무하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재소했던 경험 또한 큰 밑바탕이 되었다.

자유를 향한 장정

나는 막내아들이 총살당한 1989년부터 탈북할 방도를 꾀하기 시작했다. 결국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은 것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던 1997년이었는데 집단으로 굶어 죽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있으면 나도 죽겠구나 싶어 일단은 외가가 있는 중국 심양을 향해 기차를 타고 떠났다. 연길에서 외사촌 동생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는데 동생은 북한에 돌아가지 말고 탈북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것이었다. 아들 또한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들과 나는 2003년 11월 24일에 한국 행 비행기에 탑승해 25일 새벽 5시에 자유의 조국 대한민국에 도착하였다. 자유의 땅에서 나는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그중 하나가 세계 최초의 북한 정치범 수용소 소재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안무 지도를 맡은 일이다. ‘요덕스토리'를 개막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정성산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들까지도 공공연히 제작 중단을 요구하는 협박을 받기도 했고 투자자들도 떠났다. 그러나 많은 스텝들과 배우들이 흘린 땀과 눈물 덕분에 뮤지컬 ‘요덕스토리’는 7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철조망 사이로 노래를 부르는 수감자들을 통해 북한인권의 현실과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요덕스토리를 볼 때 마다 이제라도 이러한 비극을 알려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북한은 철저한 통제와 억압으로 둘러싸인 비인간적인 사회다. 외국에서 들여온 매체는 엄격히 금지되었고,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되었으며 학교에서, 직장에서, 당에서 숨쉬기도 힘든 통제를 받았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인다는 선동을 앞세우면서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3백만 명의 주민을 굶어 죽인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지금도 북한에서의 악몽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상상도 못할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나 혼자 자유를 누리는 것이 미안할 정도이다. 이제는 김정일 정권의 독재에 시달리는 무고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양심 있고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이 뭉쳐야 할 때이다.(Konas)

김영순(요덕수용소, 1970~1979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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