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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회고록의 진실 (5) 이종락이 만든 조선혁명군, 김일성의 치적으로 둔갑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1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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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시절의 김일성 ⓒ 자주민보 기사 화면 캡처
‘세기와 더불어’ 2권은 3장 23절로 되어 있다. 그 4장은 ‘새로운 진로를 탐색한 나날에’ 라는 표제로 10절로 구성되어 있다. 김일성이 길림감옥을 ‘출옥’했다는 1930년 6월부터 연말까지를 행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6월까지 길림감옥에 투옥된 적이 없다. 그는 당시 남만주에 있었다. 그 증거로는 1930년 3월에 남만 흥경현(興京縣)에서 열린 동성농민총동맹 결성대회에서 그가 김성주(金成柱)란 이름으로 무송·안도지방동맹조직위원이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였다.

김일성은 1929년 가을이 아닌 그해 5월까지 밖에 길림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5월에 정의부 계통의 청년들로 구성된 허소(許笑)의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가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에 길림을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고록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 김일성은 초급 육문중학교 졸업을 한달 앞둔 채 중퇴한다. 그가 중학교를 중퇴한 사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 후 그는 남만으로 가서 국민부 산하의 청년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930년 6월 길림 서북쪽에 있는 카륜의 가가툰(賈家屯)이라는 한인농촌에 모습을 나타낸다. 제4장은 이 무렵부터의 김일성 행적을 왜곡하고 있다.

이 제4장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1930년 6월 김일성이 카륜회의를 열었다는 선전, 그리고 7월에 첫 당조직, 그리고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는 주장이다.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카륜회의는 민족주의 단체인 ‘남만청총’간부들이 지도

김일성이 카륜회의를 열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회고록에서는 1930년 6월에 장춘현(長春縣) 카륜에 모인 김일성 또래들이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주체사상 창시의 문제, 무장투쟁 문제, 반일민족통일전선 문제, 조선혁명의 성격 규정문제 등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을 이어나갔고, 6월 30일 ‘카륜회의’를 열었을 당시 김일성이 이를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표제로 보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이 말했다는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카륜에서 이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 립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 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립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 뿐이다….
우리가 그 론문에서 전개한 내용을 보면 모두가 주체사상을 핵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와 같은 주장은 이미 북한에서 날조를 끝마쳐 생긴 조작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따름이다.

첫째. 그 근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길림감옥에는 ‘투옥’된 일이 없었다. 이 무렵 그는 남만주에 가서 민족주의단체인 국민부 산하의 청년단체인 남만 한인청년총동맹에 속하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카륜회의에 참가했다고 그가 주장하는 차광수, 장소봉, 김혁, 김원우 등은 이 남만청총의 간부들인데 김일성 자신은 이 때 당시 간부가 아닌 평맹원이였다.

▲ 청년 시절의 김일성. 좌우 인물은 조부모인 김보현과 리보익 ⓒ 연합뉴스

따라서 카륜에서 김일성이 지도자였던 것이 아닌 남만청총에 관계가 있었던 청년간부들이 지도부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청년 간부들의 지도에 따라야 할 위치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당시 남만청총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지만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재건파였던 ML파, 화요파, 서울 상해파 등을 ‘종파’라며 배격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에서든 남만청총 간부들은 조선공산당 계통에는 들어가지 못한 민족주의 좌파 간부들이였다.

김일성은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간부들을 ‘공산주의자’로 왜곡, 그들이 조선공산당 재건파에 속하지 못하고 있엇던 사실을 ‘주체적 립장’이었다고 주장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북한은 ‘조선혁명의 진로’란 논문은 김혁(金赫)이 주필이었던 ‘볼쉐위크’ 지에 실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볼쉐위크’란 잡지는 당시 김일성이 매도하고 있었던 ‘종파’중 하나인 서울상해파가 1929년 4월부터 창간한 잡지였다. 이 잡지의 주필에 당시 국민부 소속인 김혁이 될 리가 없으며, 또 여기에 ‘조선혁명의 진로’가 실린 일 또한 없었다. 일본 경찰이 서울상해파의 기관지를 압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증거를 가지고 김일성의 주장이 허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넷째. 또 주체사상이 1930년에 창시된 것이라는 주장도 거짓이다. 주체사상은 19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 권력의 절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어용 철학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일성이 주장하는 카륜회의란 것도 사실상 그 존재부터가 의문시되는 어정쩡한 회의이다. 그는 이런 ‘회의’를 설정한 다음 ‘주체사상 창시’를 비롯, 자기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온갖 날조행위를 저질렀다.

강령,규약도 없는 첫 번째 당조직 ‘건설동지사’도 허구

‘첫 당조직’을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것도 허황된 조작일 뿐이다.
회고록에서는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지도사상’을 확립한데 토대하여 1930년 7월 3일 김일성은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등과 같이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했는데, 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지 않고 ㅌ·ㄷ의 강령으로 이를 대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첫 당조직’ 이란 명칭은 해방 후부터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가 1983년에 와서야 북한 로동당 기관지 ‘근로자’에 게재된 어용학자 주용목의 논문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김일성은 해방 전 조선공산당원이 된 일이 없는 인물인데 40년 간의 긴 세월을 거쳐 ‘당창건’을 날조하는 행위를 벌여왔다. 1983년에 ‘첫 당조직’이 날조된 후에도 ‘건설동지사’라는 조직 명칭은 여지껏 없었다. 그런 것이 1992년의 회고록에서 이 당조직은 ‘건설동지사’란 이름이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일성의 날조행각은 끝이 없어 보인다.

‘건설동지사’가 얼마나 허황된 날조인가 하는 것은 이 당조직에 공산조직의 생명이라고 하는 강령과 규약조차 없었다는 김일성 자신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ㅌ·ㄷ’란 김일성이 날조한 ‘공산조직’이므로 날조된 조직이 가진 그 ‘강령’이라는 것도 당연히 날조된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건설동지사’는 이런 날조조차 할 틈이 없었던지 ‘ㅌ·ㄷ’의 강령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첫 당조직’이 김일성에 의해 1992년 날조가 완성되었다는 점은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대원이 부대 결성자로 둔갑하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30년 7월 이통현 고유수(伊通縣 孤楡樹)에서 자신이 조선혁명군을 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과장된 날조이다.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부는 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 군사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조선혁명군의 제9대장 이종락이 1930년 4월 국민부를 탈퇴했다.

그는 장춘현 카륜과 이통현 고유수의 한인 농촌을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종락 부대에는 이 지방 청년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종락은 남만청총의 간부이기도 했으며 그의 주변에 국민부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모였다. 김일성도 그 중 하나였다.

1930년 7월 초 이종락은 장춘현 카륜에 모이고 있던 청년들까지 이통현 고유수로 불러 자기 대오를 형성하였다. 이때 부대명칭을 고치지 않고 ‘조선혁명군’이란 국민부 군대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이 부대의 지도자는 이종락이었고 당시 김일성은 참사(하사관)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을 통해 이종락이 국민부 좌파청년들을 모아 만든 조선혁명군을 마치 자신이 만든 것 처럼 왜곡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종락의 조선혁명군을 기술한 최형우의 ‘해외 혁명운동 소사’의 해당 부분도 마치 김일성이 조선혁명군의 지도자인 것처럼 변조하고 그 원문의 변조판을 사진판으로 찍어 김일성 전기에 싣고 있다.

또한 회고록에서는 1930년 7월 6일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었을 때 김일성이 ‘연설’을 통해 조선혁명군이 조선공산주의자의 정치, 반군사조직이며 그 사상은 도시와 농촌에서 인민대중을 각성시켜 본격적인 무장대오 형성을 준비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참사(하사관)였던 김일성보다는 대장인 이종락이 연설하는 것은 상식이므로 이 또한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이종락 세력들은 공산주의가 팽배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좌경화쪽으로 기울고는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은 아니었다.

이종락 자체가 공산주의 이념을 소화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그들의 활동이란 것은 대부분 나라의 독립을 내걸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권총을 휘두르는 폭력적인 행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그들은 철저한 1국 1당원칙을 지키는 중국공산당에 들어갈 조선공산당 당원의 자격도 없었다.

이 점은 당시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공당이 끝끝내 그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 1월 이종락, 장소봉 등이 일제에게 체포됨으로써 소멸하게 된다.

미전향 좌익수 이인모까지 등장시킨 회고록의 픽션

제4장 5절에서는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에 대해 장황한 설명이 나온다. 특히 가관인 것은 김형권이 1930년 8월 조선혁명군의 국내 공작소조의 일원으로 풍산군 파발리 주재소에서 일본 순사를 처단한 후 수십 명의 군중들 앞에서 반일 연설을 했다고 기술하면서 그 당시 이인모(북한으로 송환된 미전향 좌익수)가 군중들 속에서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한 부분이다.

기존의 김일성 전기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던 이러한 내용이 이번 회고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북한이 이인모 송환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인모를 등장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이인모는 김일성이 기억할 만한 인물도 아니며 그 회고록에 등장될 만한 전력도 전혀 없는 인물이다.

▲ 1993년 7월,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기사 화면 캡처

북한이 이인모 송환문제를 부각시켜 대내적으로는 이인모를 40년 동안 수령과 당에 변절하지 않고 충성을 바친 혁명가의 전형적 모델로 돋보이게 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의 사상동요와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심 약화를 방지하고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 기치아래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단결시키는데에 이용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인모의 재북가족을 내세워 이인모를 대표적 분단의 희생자로 부각시켜, 대외선전 및 대남정략에 이용함으로써 남북 이산가족 상호방문의 고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김일성 회고록에서 난데 없이 이인모를 거론한 것은 다분히 북한의 정치적 이용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김일성의 ‘회고록’이란 것은 순수하게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김일성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가지 자기 자신의 개인우상화를 위한 왜곡날조이며 대내외적 정세변화에 따라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교묘하게 날조 조작해서 만든 정치 선전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길동지구 중국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다는 새로운 날조

끝으로 제4장 7절은 김일성이 1950년대에 스스로 주장했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감춘 그의 경력 일부를 다시 부활시켜 합리화하고 있는 내용이다.
1952년에 발간된 ‘김일성장군의 전기’에는 그의 경력의 일부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 있다.

“(김일성은) 중학을 졸업한 후 공산청년 동만특별구 비서로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그 요지가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다.

“나는 1930년 8·1폭동 후 하르빈에 가서 그곳 국제당 연락소를 찾았다. 이때 연락소에서는 나에게 국제당이 운영하고 있는 모스크바의 공산대학에 유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국제당에서는 나에게 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 사업을 위임하였다”

즉, 52년도 김일성 전기에서는 동만특별지구 비서로 활동했다던 것이 이번 회의록에서는 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로 바뀌어 있다. 길동이란 길림쪽을 뜻하는 것으로 동만보다 그 범위가 넓어 동만도 길동지역 속에 들어간다. 그는 이번 회고록에서 길동지구의 공청책임비서가 되었다는 말을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역할을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또다시 날조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 중국에 있었던 공산당은 중국공산당 뿐이었으므로 공산청년회도 물론 중국공산청년회(공청)이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하르빈에서 지도할 수 있는 조직도 중국공청임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한인 민족주의단체였던 남만청총의 좌경적인 청년이긴 했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공산당 조직에는 접근해 본 일조차 없었다.

그러한 그가 하르빈의 코민테른 연락소를 찾아갔더니 코민테른은 아무런 중공당원 경력이 없는 그에게 그 자리에서 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직을 내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김일성도 자신이 1920년대 말에 동만공청책임비서였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80세가 될 무렵 그는 동만보다 더 상급기관이 되는 길동의 중국 공청책임비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1930년 6~7월에 있었다는 카륜회의 개최, 첫 당조직과 조선혁명군의 조직, 그리고 중공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 취임 등은 모조리 거짓말인 것이다. ‘주체사상의 창시’라는 주장은 모두 이러한 유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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