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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6·25전시납북자⑤] 좌절된 귀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北, 납북자 교환 합의 일방 파기하고 “납북자 없다” 주장...납북자들 북한 정권에 이용당한 뒤 구금, 숙청당해
  • 김성훈
  • 승인 2018.09.14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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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 10월 26일 압록강 변까지 올라갔다. 자유통일이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참전했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1951년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긴다.

전쟁은 정전협정을 맺기 전까지 38도선을 기준으로 밀고 밀리는 양상을 보인다. 유엔군 측은 전쟁을 종결시킬 궁리를 하고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1년 7월부터 공산군 측과 정전협상을 시작한다. 유엔군은 정전협상에서 ‘납북자’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북한은 납북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은 이후 납북자를 포함한 남북한의 ‘실향사민’을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실향사민 교환을 시작하기로 한 1954년 3월 1일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귀향민만 받은 채 합의를 일방 파기하고 납북자는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한다.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부풀었던 납북인사 가족들의 가슴은 북한 정권의 일방적인 합의 파기와 거짓 주장에 무참히 짓밟혔다.

‘6.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가 2010년 12월부터 2017년 6월까지 7년여 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6·25전쟁 중 납북피해자는 총 9만 5456명에 이른다. 증언에 따르면 납북자, 국군 포로 등 북한에 끌려간 남한 출신자들은 북한에서 이용만 당한 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감금, 숙청되는 등 극도로 비참하고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휴전협정에 의한 민간인 교환에 관한 문건, 1954년 1월 13일 사회부·내무부 장관이 서울 시장 및 각 도지사에게 발송한 문서로, 민간인 교환과 관련해 남한에서 북으로 보낼 민간인에 대한 자격 내용이 담겨잇다. 우리 정부가 휴전협정에 의한 실향사민 상호 교환에 관한 약속을 이행하고자 구체적 지침까지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 납북자와 정전협상

6·25전쟁이 민족 내전에서 국제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자,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협정을 체결하기로 하고 1951년 7월부터 협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정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정전회담에서 협상을 주도할 수 없었다. 북한이 공산국 측 정전회담 본회의 대표단 수석대표와 수석연락관을 맡았던 것과는 달리, 우리 정부는 유엔군 측 정전회담 본회의 대표단의 참관인으로 참여해 발언권이 없었다.

유엔군은 납북된 민간인 석방보다 정전협정 체결을 더 중요시했고, 외국 민간인 석방을 남한 민간인 석방보다 우선시했다. 공산군은 외국 민간인 무조건 석방을 수시로 언급하며, 남북문제가 의제화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러자 유엔군은 ‘납북’이라는 용어의 직접적 사용 대신, ‘실향사민’이라는 우회적 표현으로 실질적인 납북자 귀환을 목표로 했다. 유엔군은 1952년 1월 6일 제24차 회의에서 ‘북한이 억류하고 있는 남한 민간인이 약 12만 8000명 이상’이라며 남한 민간인을 포로 교환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북한은 ‘납북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하고, 의용군이 자발적으로 지원’했으며 ‘수십만의 북한 민간이 유엔에 의해 납치됐다’는 주장을 펴며, 전쟁포로와 민간인 납치자의 일대일 포로교환을 거부했다.

이후 정전협상은 계속 답보 상태였으나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후 빠르게 재개되었고, 쌍방이 실향사민 귀환에 관한 정전협정 제3조 제69항을 합의함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 휴전 이후 북한의 송환 거부

정전 직후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실향사민 귀환을 논의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4년 1월 10일 제35차 본회의에서 실향사민과 외국 국적 민간인 귀환을 위한 행정 세부사항에 대한 합의를 이뤘다. 양측은 1954년 3월 1일부터 하루에 100명씩 실향사민을 남북으로 귀가시키는 데 합의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국민의 기대도 높아졌다.

1954년 우리 정부는 남한으로 귀환하는 민간인과 관련된 업무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 임시수용소와 구호물자와 같은 세부사항까지도 준비해놓았다. 마침내 1954년 3월 1일 남북실향사민을 교환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남한에서 북한으로 귀향한 인원 37명만 있었을 뿐,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향한 남한 민간인은 1명도 없었고, 19명의 외국인만 귀환했다. 북한은 남한으로 귀향하길 원하는 남한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결국, 납북자 귀환은 실패했다.

■ 납북 규모를 증언하는 명부

6·25전쟁 중 북한이 자행한 납북피해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는 남아 있는 납북자 관련 서류와 명부 등을 종합해 그 피해 규모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통계연감에 1952년의 납북자는 8만 2959명, 1953년의 납북자는 8만 4532명으로 기재돼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납북의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해 납북이 확실치 않으면 대부분 행방불명자로 집계했으므로 실제 납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2010년 12월 31일 출범해 2017년 6월 12일까지 총 7년간 납북피해 신고를 접수·처리하고, 납북 관련 자료를 수집·분석했다. 또한 납북사건 발생 당시 한국 정부, 적십자사 및 납북인사가족회가 작성한 신뢰성 있는 명부를 종합하여 납북자 통합명부(중복 등재자 및 월북자 제외)를 작성했다. 이 명부에 따르면 6·25전쟁 중 납북피해자는 총 9만 5456명으로, 6·25전쟁 중 납북된 남한 민간인의 규모는 ‘약 10만 명 내외’로 추정할 수 있다.

실향사민 명부(왼쪽), 1953년 국제연합군 총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대한민국 대표단이 작성한 것으로 원래 2권이었으나 현재는 1권만 전하고 있다. 발견되지 않은 2권까지 합하면 약 2만 명 이상이 수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의 1959년 정기보고서(오른쪽), 유엔군 총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대한민군 군 대표단에서 발간한 실향사민명부 작성에 가족회가 도움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가족회가 명부 작성 중 유엔군을 방문했음을 알려주는 기록.

현재까지 전시 납북자 관련 명부는 총 12종이 발견됐다. 납북자 명부는 각 명부에 따라 납북자 규모와 작성 시기, 작성 기관, 작성 방법 및 내용에는 차이가 있으나 납북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납북 관련 명부는 정전협정 당시부터 현재까지 “북한에 납북자는 없고, 자진 월북한 사람들만 있다”는 북한 측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자료이다. 앞으로 미발굴된 명부를 지속적으로 발굴·조사해 납북피해 진상규명을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 북한에서 납북자들의 삶

납북자들의 북한 억류 실태는 북한으로 납북된 후 10년간 납북인사들과 같이 지내다 귀환한 조철이 납북인사들의 북한 억류 실태를 기록한 ‘죽음의 세월’이나, 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을 신경완이 증언하고 이태호가 저술한 ‘압록강변의 겨울’ 등에서 극히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압록강변의 겨울’, ‘압록강변의 겨울’은 북한에서의 납북자들의 삶을 목격한 귀순자의 증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 등 간부급에 있던 증언자를 통해 ‘모시기 작전’ 등 북한의 납북계획과 납북인사에 대한 정책, 처우 등을 비교적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죽음의 세월’(왼쪽), ‘죽음의 세월’은 6·25전쟁 중 납북됐다가 탈출한 조철이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1962년 3월 29일부터 6월 14일까지 5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납북인사들의 행방과 북한에서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납북자 아들의 편지’(오른쪽), 납북자 최영수의 장남 최규재가 ‘죽음의 세월’에서 최영수의 죽음을 확인하고 아버지를 향해 쓴 편지다. 최규재는 이 편지를 남긴 채 행방불명됐다.

북한은 납북된 인사 가운데 남한 출신 학생·교수 등을 행사에 동원하고 대남 통일전선공작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일례로 북한 당국은 1956년 7월 2일에 납북된 남한의 국회의원, 국무의원 등을 지낸 인사 103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재북평통)를 결성하여 체제 선전에 이용했다. 그러나 재북평통은 1958년 갑자기 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재북평통의 구성원들은 숙청돼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거나, 국영 과수농장·공장 노동자로 좌천됐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대해 다룬 1956년 7월 4일자 노동신문, 북한 정권은 납북 인사들로 이루어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재북평통)란 단체를 만들어 체제 선전에 이용했다. 재북평통에 소속됐던 납북 인사들은 이후 감금·숙청되거나 노동자로 좌천됐다.

정치인, 사회 저명인사, 종교인, 의료인, 문화인 등 분야를 막론하고 납북자, 국군포로, 의용군 등 수많은 남한 출신자들은 북한에서 이용만 당한 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감금, 숙청되는 등 극도로 비참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기사에서 계속...

[잊혀진 전시납북자⑥] 귀환을 위한 노력, 다시 무너진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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