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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회고록의 진실 (6) 김일성 ‘무장대오 형성’도 과장(1931~1932)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1.1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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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무장한 인민’의 전 5절은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이 일어날 때부터 김일성이 무장 대오를 형성했다고 주장하는 1932년 4월경까지에 대한 회고록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자기의 경력을 왜곡·조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날조하고 있는 부분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연길현 명월구회의, 둘째 북간도의 추수폭동, 춘황폭동, 셋째로 소위 반일 인민유격대 형성 문제 등이다.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명월구회의는 중국 동만 특별구위원회의 서기 동장영의 작품

‘연길현 명월구회의’는 중국공산당 동만특별구위원회가 1931년 5월과 12월에 개최한 회의였다. 이 두회의를 김일성은 자신이 조직하여 ‘보고’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1930년 11월 이종락이 이끈 조선혁명군에 참사(하사관)로 있었을 뿐이었고 중국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이 조선혁명군의 간부들은 1931년 1월 28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 잔당들은 그 후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하였다가 5월 3일 남만주에서 동방혁명군을 조직하였다. 동방혁명군도 중공조직이 아닌 국민부 좌파들이 조직한 민족적 무장력이었다. 김일성은 이종락등이 체포된 뒤 하르빈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남만주에 있는 무송으로 돌아와 무장작당(武裝作黨)을 하게 되었다. 그는 5월 ‘명월구회의’가 열릴 때에는 연길현에 있지도 않았으며 중공당원도 아니었다.

김일성은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도 자기가 조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해 열린 이 회의는 중공 동만특별구위원회의 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이 열었다. 동장영의 치적을 김일성이 가로채고 자신의 치적으로 왜곡 날조한 것이다.

둘째로, 중공의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계기가 된 1931년 가을 북간도 추수폭동에 대해 김일성은 “우리는 간도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조직하였다”고 자신이 지도한 것처럼 꾸미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31년 10월에는 조선 함경북도 종성(鍾成)으로 가서 거기에 활동거점을 잡고 그 후 다시 연길현으로 가서 12월에 ‘명월구회의’를 열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김일성의 항일무투쟁 상상도. 이러한 상상도를 통해 북한주민에게 '위대한영도자'의 이미지를 세뇌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회고록’내용도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김일성은 1931년 후반에는 북간도가 아닌 남만의 무송에 있었고 때때로 자기 어머니가 있던 안도를 왕래하고 있었다. 무송에서 계영춘(桂永春)과 김일성이 1929년에 국민부 산하단체인 새날 소년동맹을 만들었다는데, 그는 과거 이 동맹에 가담되어 있던 무송 소년들을 다시 모아 무장작당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송지역에서 중국인 농가를 털어 양식을 약탈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김일성의 약탈행위가 계속되자, 이를 안 국민부의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양세봉 장군은 김일성 일당을 징벌하기 위해 1931년 초 고동뢰(高東雷) 소대 10명을 유하(柳河)로부터 무송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김일성 일당은 그때 김일성을 징벌하기 위해 무송으로 도착한 고동뢰 소대를 오히려 야습하여 전멸시키고, 그들이 가진 권총까지 빼앗아 제각기 도망쳤다.

김일성이 1931년 후반부터 1932년 초에 걸쳐 상대하고 있던 대상은 이와 같이 한인 민족주의단체인 국민부였다. 무송에는 당시 중국공산당 조직은 없었으며 그가 관계를 맺어야 할 중공당원 또한 없었다.

그는 공산당이었던 것 같이 사실을 날조하기 위해 활동무대를 실제 있던 무송이 아닌 북간도 지방으로 설정하고 숱한 중국공산당의 업적을 ‘자기업적’으로 도용하고 있는 것이다.

▲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 유격대 활동 상상도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했다는 그 직전에 김일성은 한인농촌에 숨어 도망자 생활해

셋째로,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소사하토기점(安圖縣小沙河土
器店)골에서 반일 인민유격대란 항일무장대오를 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에 유격대를 창건하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이런 주장이 없었다. 또 이 유격대가 토기점골에서 결성되었다는 주장은 1962년 후 10년이 지난 1972년 처음으로 나왔다. 유격대의 이름이 ‘반일 인민유격대’였다고 주장한 것은 훨씬 뒤인 1981년이다. ‘반일 인민유격대’를 조직하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은 김일성이 이러한 대오의 날조에 얼마나 집요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회의’를 지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결성한 대오는 1932년부터 생겨난 북간도의 중공유격대와 그 대명이 같아야 할 것이란 점이다. 당시 북간도의 중공유격대는 ‘○○현 항일유격대’란 이름이었다. 따라서 김일성의 대오가 ‘반일인민유격대’였다면 그것은 중공유격대가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안도현 항일유격대’이건 ‘반일인민유격대’이건 김일성이 조직한 유격대라는 것은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김일성 일당은 1931년 초 국민부의 조선혁명군 고동뢰 소대를 무송에서 야습하여 전멸시킨 후 뿔뿔이 흩어졌다. 그 태반은 무송 서쪽에 있는 몽강현(濛江縣)으로 도망갔고 그 일부는 무송 동쪽의 안동현 방면으로 도망갔다. 김일성은 모친이 있는 안도현으로 가는 도중 돈화현(敦化縣) 푸르허 라는 한인 농촌에서 1개월 반 가량 숨어 지냈다.

이 때 그는 무송으로부터 고동뢰소대 암살범을 추격해 오는 경찰 기마대를 따돌리고, 농촌에서 머슴노릇을 하게 된다. 푸르허는 중공 안도현구위원회의 영향 하에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신분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는 1932년 3월, 푸르허를 빠져 나와 안도현 소사하로 갔다. 그 후 같이 도망친 소년들과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만 행동하는 떳떳하지 못한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같이 행동한 사람은 수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식량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 같은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김일성은 만주사변 후 항일의 기치를 들고 있던 중국인 반일부대인 ‘왕덕림구국군’의 안도현 조직을 찾아 가기로 했다. 소사하 남쪽에 있는 안도현 성에는 당시 우사령(于司令)이 안도현 구국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을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안도현 성을 찾아간 김일성은 우사령의 별동대가 되기를 원했지만 우사령은 그를 사령부 선전대장으로 임명하여 별동대 문제는 무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한인 청년들 7, 80명이 공산주의자란 혐의로 구국군에 체포되었다. 김일성은 반공주의자였던 우사령을 설득하여 이들을 구출하고 이들을 토대로 끝내 한인 별동대를 형성하고야 말았다.
한인 별동대는 소사하에 김일성이 남겨 두었던 비밀유격대와 합하게 되었고, 그들의 행동도 떳떳한 것으로 되었다.
우사령의 별동대가 된 반일인민유격대는 1932년 4월 25일, 100명이 넘는 대원으로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김일성이 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되고, 그의 모친 강반석은 열병식에 참가하였다.

중공당 업적을 도용한 김일성의 민주 항일무장투쟁

그런데 반일 인민유격대가 실은 우사령 구국군의 별동대였다는 ‘사실’은 이번 회고록에서 처음 밝혀지면서도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종래 북한의 전기 작가들은 반일 인민유격대가 별동대냐, 아니면 별동대와 다른 조직이냐 하는데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1975년에 나온 전기에서는 그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일성은 안도지구의 별동대 제1지대의 활동경험에 기초하여 왕청지구에 이광(李光)을 책임자로 하는 별동대 제2지대를 조직하였다.”

이 문장은 김일성이 반일 인민유격대를 결성하였는데 그 외에 별동대 제1지대라는 것도 결성하여 우사령에 붙게 하였다. 이를 모범으로 왕청의 이광은 제2지대를 형성하였다라는 의미이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중국인의 반일부대에 붙은 왕청의 이광 별동대는 1932년 2월에 결성되었다. 만약 김일성의 ‘별동대’가 1932년 4월에 ‘결성’된 것이 사실이라면 ‘제1지대’는 마땅히 이광부대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딴 데에 있다. 문제는 김일성이 이광을 이용하여, 고동뢰 소대를 참살한 범죄자 집단인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대오가 공산조직이 아닌 중국인 민족부대 우살영에 붙은 사실을 여러 모로 정당화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이번 회고록에서 한 김일성이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반일 인민유격대란 우사령의 별동대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은 반일 인민유격대를 결성한 것이 아닌, 우사령을 따라 다니는 한인 반일부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구국군의 성격으로 보아 이 별동대는 공산조직은 아니었다.

이상 살펴본 제5장 ‘무장한 인민’은 9·18사변이 일어난 직후 중공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의 업적인 ‘명월구회의’, 춘황폭동, 항일유격대 결성 등을 모조리 자기 업적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에 있어서 김일성이 이처럼 중국공산당의 업적을 마치 자기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도용한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 ‘걸출한 영웅’, ‘민족의 태양’으로 신격화 할 수 있는 그럴 만한 업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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