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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의 역사 ⑧ 문화 계몽 운동
  • 구교민 인턴 기자
  • 승인 2013.01.23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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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탁 학련'이 '전국 학련'으로 변경 한 후에도 이 명패를 사용했다.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전국 학련, 대(對) 국민 계몽에 나서다.


문화 계몽 운동은 전국 학련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문화 계몽 운동은 본래 맹원들을 위한 소양 교육과 일반 국민에 대한 계몽 및 문맹 퇴치운동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문화 계몽 운동이 필요한 이유는 거짓 선동으로 세력을 넓혀가는 공산 세력들에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은 민중이 계몽하여 문화를 수용하는 것 뿐이다. 반탁 학련을 계승한 전국 학련은 보다 적극적으로 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 당시 '전국 학련'의 월간지 '학생 공론'을 담은 동아일보 ⓒ 동아일보 캡쳐

전국 학련의 ‘학생 공론’, ‘학생보’ 발간

‘학생 공론’이란 월간으로 발행한 ‘전국 학련’기관지이다. 학생 공론은 1946년 7월에 발간되기로 했으나 인쇄소 사정으로 연기되어 10월 25일에 제1호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2호가 출간된 후 재정난으로 중단되었다. ‘학생 공론’의 편집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발행인 - 이철승
편집장 1대 - 송원영, 2대 - 정성관
편집위원 - 최찬영, 윤원구, 이종환, 이순종, 최원식, 강창홍, 양횽규, 이희복, 김경옥, 유진석, 이영신
지도위원 - 장덕수, 박순천, 이선근, 안호상
편집고문 - 김광주

‘학생 공론’은 시, 수필, 학생들의 각 의견 그리고 각 사상에 관한 해설 및 강의들이 담겨 있었다. ‘학생 공론’이 발간하자, 각계 인사에서 축사를 보내거나 의견을 표현했다. 대표적으로 조소앙, 김성수, 원세훈, 신익희였다.

또 ‘신탁통치와 학생운동’이라는 주제로 ‘학생 공론’에 기고했던 보전의 김진웅은 “신탁 통치는 과거 일본에 의한 한 나라의 지배로부터 4대 강국의 국제적 노예로 전락되는 계기가 되었다.”라며 소신을 밝혔다.

이와 같은 다양한 교양을 담은 학생 언론임에도 불구하고 2호를 발간하자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다.

학생보

1947년 4월 ‘학생 공론’은 ‘학생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학생보’의 정식 인가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다음해인 1949년 1월 22일에 이루어졌다. 발행인은 이철승이며, 주필에 송원영, 편집국장에는 이순종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발간행은 ‘1949년 9월 11자 제 46호’가 남아있다.

이 발간호를 보면 1면은 정치,시사면으로 사용되었고, 2면은 문화면으로 활용되었다. 또 1면 윗 부분에는 ‘발행인 이철승’이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과학적 해부 및 코민포름과 티토이즘과의 관계’란 주제로 기고했고, 그 아래 부분에는 ‘한숨보다 많은 학비’라는 제목으로 당시 각 학교별 공납금 금액을 기고했다.

당시 서울대학교의 학비는 12,000원, 고려대학은 22,500원, 연희대학(現 연세대학교) 30,000원, 동국 대학 37,000원, 이화여대 30,000원, 중앙대학 19,000원 등 기고 되어있었다. 제일 공납금이 비싼 학교는 세브란스 의대로서 42,000원이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비싼 가격이였다.

2면에는 당시 특파원 정진방이 “38선에 이상없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화여대 석영옥은 ‘해질 무렵’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었고, 제3여중 이강옥의 시 ‘초적’, 용산 중학생 김윤택의 수필 ‘가을이 오면’도 실려 있었다.

이외에도 반탁, 반공 사상을 가진 학생이나 작가들의 작품들도 실려있었다.

▲ 전국 학련의 웅변 대회에 격려사를 낭독했던 '백범 김구' ⓒ 네이버 카페 캡쳐

웅변 대회 개최

전국 학련은 1946년 8월 13일 종로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도 개최했다. 이 날 이승만, 김구, 조소앙, 김성수 등 독립인사들도 참여했고, 동아일보에서도 참여했다. 웅변대회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수는 천 명이 넘었고, 웅변 입상자들에게 이승만, 김구, 조소앙, 김성수의 상장 그리고 동아일보 상장을 수여했다.

입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문부>
1등 : 유학생 동맹, 김주연
2등 : 연희대, 박병길
3등 : 고려대, 함통

<중등부>
1등 : 양정중, 송원영
2등 : 부산진 여상, 정태경
3등 : 중앙중, 김호중

1946년 가을부터 좌익은 국대안을 문제삼아 맹휴를 선동했다. 전국 학련은 이것에 대비하여 맹휴 저지 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동시에 반탁 학생 운동 1주년 기념식을 준비했다.

전국 학련은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지 1년이 되는 1946년 12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단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다. 28, 29일은 ‘전국 현상 웅변대회’를 열었고, 30일은 반탁 기념식 및 표창식을 열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반탁 운동의 과거를 회상함.
2. 학생 운동의 본질
3. 38선을 철폐하자
4. 한국의 장래와 학생의 사명
5. 한국의 독립은 어디로
6. 반탁과 지도 이론
7.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의 도미 외교 성공을 위하여

웅변대회는 수천 명의 학생들로 가득 매웠다. 웅변 연사는 김선적, 김진철, 송원영 강근호 등 19명이였고 심사위원은 장덕수, 설의식, 이선근, 진승록, 김산, 이철승, 김호영, 김인수, 정동립이였고 김구는 다음과 같은 ‘격려사’로 학생들을 격려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기구하여 해방이 되고 두 해를 넘기도록 자주 독립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지금껏 강대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앞으로 5년이 될지, 50년이 될지 모르는 신탁 통치안을 찬성하는 역적 도배들이 날뛰고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더욱이, 그 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찬탁 1주년 기념 행사를 하고 있다는데, 우리 민족 진영에서는 수많은 단체가 4분 5열이 되어 있어 이토록 의미 심장한 반탁 1주년을 맞고도 아무런 행사를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속에서 나이 어린 학생 여러분들이 이 같은 기념식을 갖고 지충 보국 하고자 하니 나의 심정은 착잡한 가운데서도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라는 내용이였다.

이날 입선자는 <대학부> 송원영, 함종부였고 <중등부>입선자는 ‘강근호’였다.

또 전국 학련은 기념식이 끝날 무렵 ‘미국 태평양 지구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보내는 글과 함께 ‘이승만 박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 박사에게 보내는 글

“우리는 작년 이 날 신탁통치가 들어온 날을 기념하는 전국 학련 주최 반탁 학생 운동 1주년 기념식에서 다시금 반탁과 38선 철폐를 강조했습니다. 우리 백만 학도가 있는 한 한국은 절대 안심이오니 뒤돌아오시지 마시고 하루 속히 성공하시어 우리 백만 학도는 복망하나이다.” 라는 글이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독립 문제로 인해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이로서 웅변 대회는 무사히 끝났고 방학을 맞이했지만 좌익계열 학생들의 맹휴 계획으로 개학 당일부터 각 학교를 소란스럽게 했다. 이에 ‘학련 중앙본부’에서는 이를 저지하고자 전력을 다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1947년 2월 초부터 지방의 중학교까지 맹휴가 확산되었다가 2개월 뒤에 겨우 진정되었다. ‘전국 학련’은 학생들의 무분별한 선동에 휩쓸림을 막고자 1947년 여름방학 부렵부터 문화 계몽 운동에 나섰다.

▲ 해방 후 시작된 문맹퇴치운동 ⓒ '국가기록원' 자료 캡쳐

문맹 탈출 운동

전국 학련에서 벌이는 계몽 운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반탁, 반공의 국민 계몽 운동’이며, 또 하나는 ‘문맹 퇴치 운동’이다. 당시 전인구의 78%가 문맹자였다. 이는 심각한 수준이였다.

이에 전국 학련은 전력을 기울여 지방마다 맹원들을 파견시켰다. 선발대는 7월 10일, 후발대는 20일에 출발하였고 활동은 1개월로 전했다. 떠나기 전 위원장 이철승이 각 지방마다 경찰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을 만나 협조문을 의뢰 받았다.

이에 경무부장 조병옥, 문교부장 유억겸, 공보처장 이철원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졌으며, 현지에서는 민족 진영의 독립 총성 국민회,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그리고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당의 협조로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 민족 계명 운동의 예술 분야로 활동한 '극작가 유치진' ⓒ 홈페이지 '디자인' 캡쳐

예술 분야에서의 계몽 운동

이외에도 전국 학련은 연극, 영화, 음악과 같은 예술 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러한 이유는 정치성의 집회보다는 예술적 활동이 민중을 계몽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전국 학련은 ‘반탁 학련’ 시절인 1946년 2월, 정동교회에서 첫 공연으로 예술분야에서도 계몽 운동을 시작했다.

8월 14, 15일에는 YMCA에서 8.15 1주년 기념의 행사로서 ‘해방 기념 남녀 학생 음악대회’를 개최했다. 피아노 연주곡은 베토벤의 월광고과 쇼팽의 이별곡이 중심이었고, 테너의 김동흥은 가극 ‘마르타’에서는 '꿈과 같이‘를 가극 ’셀크세스‘에서는 ’라르고‘를 불러 청중들을 열광하게 했다. 또 합창곡 슈만의 ’2인의 척탄병‘과 차이코프스키의 ’거리의 병사‘도 열창했다.

한편 좌익세력들은 이 음악회에 몰래 난립하여 선전 삐라를 뿌리고 도망쳤다.

전국 학련은 연극회도 개최했다. ‘극작가 유치진'에게 특별히 부탁해, 만든 ‘38 장벽’을 연극했다. 약 1시간 40분이 소요되는 3막 5장의 ‘38 장벽’ 내용은 북한 공산당 학정에 못 이겨 월남해 오는 어느 가정은 묘사한 것이다.

공산당원의 행패로 부상당한 아들이 고향을 떠나기 꺼려하는 아버지에게 “공산 학정을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갑시다” 라고 절규했다. 온 가족이 부둥켜 안고 울면서 남으로 향해 내려오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 장면이 이 연극의 클라이막스였다.

‘38 장벽’은 흥행하여 전라도를 위시해 지방공연을 열었고 서울에서도 수차례 공연되었다. 이외에도 ‘자명고’, ‘법흥왕’, ‘이순신’ 등을 공연했다.

‘국민영화사’가 제작한 ‘민족의 절규’는 서울의 약초 극장에서 상영했으며 여학생의 항일 운동과 수국을 묘사한 ‘애기와 여학생’이라는 영화가 지방 곳곳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 '광주 학련‘의 감찰부에서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좌익들의 테러로 감찰부장 차영후가 ‘하복부 관통상’을 입은 일도 있었다.

좌익들의 끊임없는 방해가 계속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계몽운동은 ‘전국 학련’에 의해 계속 되었으며 더 나아가 대한민국 건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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