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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의 역사 ⑩ 북한괴뢰집단에게 짓밟힌 조국
  • 구교민 인턴 기자
  • 승인 2013.01.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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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전범 김일성과 박헌영 ⓒ 중앙일보 포토 캡쳐

북한이 불법 남침을 하기까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우리 민족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괴뢰집단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눠 300만명이 희생된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은 같은 민족에게 씻을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북한은 그전에도 미국의 한반도정 책의 허술함을 이용하여 남한 공산화 계획하며 끊임없이 노려왔다. 찬탁 운동을 선동했지만 우익진영의 반탁 운동으로 좌절되었다. 초조해진 북한과 소련은 남한의 좌익세력들을 이용해, 대구 10월 폭동, 국대안 반대 소요, 8.15 폭동 음모, 2.7 구국 투쟁, 4.3 제주 사건, 여순·순천 반란 등을 주도했다.

그 외에도 갖갖 방화, 살인, 테러 등으로 폭력 혁명을 계획했으나 오히려 민심만 잃었다. 이에 북한과 소련은 최후의 수단으로 6.25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쓸어버리를 방법 밖에 없었다.

북한은 1946년 2월 8일 이미 평안남도 진남포 부근의 도학리에 평양 학원을 창설했다. 그 목적은 입북한 군 출신을 규합해, 단기로 공산교육을 시켜 당 간부 및 북한군 창설 기간 요원으로 육성했다. 6월에는 평안남도 강서군 성암면에 김일성 직계의 부하와 평양학원 출신들이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해 북한군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1948년 2월 8일이 되자 북한괴뢰집단은 군 창설에 관해 발표를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노동당의 군대로서 인민군 창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것은 바로 조선 인민의 혁명적 무장력인 것이다.”

이 발표를 통해 북한은 간접적으로 남한까지 공산화를 시킬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북한이 결정적으로 남침을 결정한 것은 ‘미군 철수’였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고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애치슨 라인’의 발표로 한반도가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되자, 북한은 남침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사실 미군의 철수는 소련군의 북한 철수로 인한 결과였다. 1948년 10월 31일 국회의원 박종남 등 40여명의 의원은 외국군 철수안을 제안했다. 또, UN에, 한국 대표가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 승인을 요청했으때도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소련과 북한괴뢰집단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북한과 소련의 속셈이였다. 북한은 두만강 하나만 넘으면 소련 영토였기 때문에 유사시 소련은 언제든지 북한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철수로 미군도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전후로 북한은 번번히 유격대를 침투시켜 도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뒤늦게 1950년 1월 26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무장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 본토에서도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쫓겨 대만으로 건너가 중국 본토는 공산당이 완전 장악했다. 이에 북한은 북중 협정, 북소 비밀협정 등을 체결했다.

북한은 이와 같은 유리한 정세로 대한민국을 무력통일 하려는 계략을 본격적으로 세워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1950년 5월 17일에는 평화통일 달성 방안대회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었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는 끝까지 평화적 수단으로 모색하여야 한다. 그러나, 무력적 수단이어야 한다는 시기가 내일이 될지, 모래가 될지는 모르나, 모든 군사 관계자들은 무력통일의 수단을 취할 수있도록 이 회의가 끝나는 즉시 착수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남침 명령 내린 것이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도 북한의 남침 야욕 정보를 입수했다. UN 감시 위원단도 38선을 시찰하며 감시했다. 하지만 북한괴뢰집단은 북한의 계획을 은폐시키고자 위장 평화 공세를 펼쳤다.

1950년 6월 8일에는 그동안 극렬 반대해 왔던 남북한 총선거를 제의했다. 6월 15일에는 서울에서 국회를 소집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남한에서 체포된 북한 간첩 이주하, 김상룡을 북한에서 억류하고 있는 민조 지도자 조만식과 상호 교환하자는 제안도 했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6월 21일 일선 지구에 특별 경계 지시를 내렸다가 이틀 뒤에는 경계를 해제 시켰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인 24일에는 전방에 있던 육군 병력의 3분의 2를 휴가 보냈다.

▲ 대전 시내에 진군한 북한군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38도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괴뢰집단

다음 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이 당시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북한에게 비교가 되지 못했다. 육군이 10만이라고 하나 총 없는 군인이 태반이였고, 소총을 가졌다 하더라도 일본군이 두고간 99식 소총뿐이였다.

반면 북한은 육군 15만, 해군 1만 4천, 공군 2000명, 그 외 3만 4천명 으로 총 20만이 넘었고, 전투기 212대, 전차 242대, 함정이 30여척의 강력한 무장을 했다. 북한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38도선을 밀고 내려왔다. 게다가 대한민국 국군의 전방병력이 3분의 2나 휴가를 간 상태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선은 급격히 밀려 불과 3일만에 서울이 함락당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불과 2년만에 존망의 여로에 서게 되었다. 게다가 북한군이 지나간 곳곳마다 북한의 만행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였다.

어제의 제자와 스승이 총을 겨누며,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흡혈귀로 돈별하여 살인에 가담했다. 돌, 낫 그리고 도끼 등으로 수십만의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반동’으로 낙인 찍히면 부녀자, 노인,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처참하게 학살 당했다.

▲ 9.28 서울 수복 이후, 중앙청에 다시 걸리는 태극기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9.28 서울 수복 후, 북한괴뢰집단의 만행을 본 국민들은 모두 치를 떨었다. 우물과 웅덩이, 경찰서, 형무소, 부락의 뒷산마다 수십 명, 수백 명, 심지어 수천 명을 묶어 집단 학살해, 쓰레기 버리듯 해놓은 광경이 펼쳐졌다.

한 쪽에는 죽은 어머니의 젖꼭지를 문 채로 죽어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놓은 끔찍한 광경이 있었다.

북한괴뢰집단에 대항하여, 대한민국의 애국에 불타는 젊은 반공 학도들은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반탁, 반공의 투철한 정신으로 총궐기했으며, 존망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선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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