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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⑦ 여자공군의 참전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2.0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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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에 뛰어 들었던 여성공군들 ⓒ 국방부 자료 화면 캡쳐

6.25전쟁 이전 근무 실태

여자항공병 제1기생 교육 수료 이후부터 6.25전쟁 이전까지의 기록은 확인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정광모, 김경오, 윤금자 외 1명은 제2기생들의 기초군사교육을 담당했다. 이어 정광모, 김경오는 육군 군의학교에 파견되어 간호장교들의 훈련교관 직책을 수행했다.

한편 여자항공병 제2기생의 교육은 6.25전쟁 발발로 인해 4개월여에 불과했고 전쟁 발발 이후에도 교육훈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

1950년 3월 이후 여자항공병 제1기생 중 정광모 등 6명은 제대했다. 따라서 6. 25전쟁 발발 당시 여자항공병 제1기생은 8명만이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2기생 또한 6. 25 직전까지 6명이 전역했다. 따라서 2기생의 경우 33명만이 복무했다.

한편 여자항공병 제1기생은 15명 전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3개월이 지난 1949년 6월 1일에는 일병으로 진급했고 8월 15일에는 하사로 진급했다. 11월에 의가사 전역한 오원순 하사를 제외한 14명은 1950년 1월 15일 이등중사로 진급했다.

그러나 6월 5일 진급 시에는 이명진, 강홍업이 특무상사로, 정숙자, 김경오, 유영희는 이등상사로, 강덕희, 김덕순, 윤금자는 일등중사로 각각 진급했다.

한편 장교로 진급한 여군들은 여자항공병 제1기생 출신들이다. 6월 5일에 특무상사로 진급했던 이명진, 강홍업은 바로 다음날 소위로 임관했다.

▲ 6.25 당시, 다리 아래 피란길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여자항공대원의 위기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공군은 총병력은 1,897명이었고 경비해기 22대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북한 공군은 병력 2,200명과 무려 항공기가 198대였다. 북한 공산군이 월등한 전투력으로 대한민국에 밀고 내려왔다 26일부터 27일까지 공군 각 부대는 수원으로 철수했다.

이 시기 대한민국 공군은 전투기는 전무했고 개인보호장비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은 조종사 300명, 정비사 그리고 일부 행정요원을 제외한 나머지 장병들에 대한 통제와 책임을 각 부대장에게 일임시키고 특별히 임무가 없는 장병은 자유로이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6.25 발발시 김포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여자항공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정희 대위를 포함한 42명의 여군들은 개전 당일 다수는 외출과 휴가로 부재 상태였다. 전황이 다급하자 공군 지휘부는 여자항공대원들을 귀가 조치했다.

이에 여자항공대원들은 귀가한 여군들도 있었지만 귀가조치란 말을 듣지 못한 여자항공병들은 후퇴하다가 흩어졌고, 귀가조치 명령을 알고 있었던 여자항공대원들은 미처 개인행동을 하기도 전에 북한군에 잡혀갔다가 도망쳐서 일반 피란대열에 합류한 경우도 있었다. 한동안 여자항공대원들은 피란민으로 지내야했다.

공군 지휘부에서 여자항공대원들에게 귀가조치 명령을 내린 이유는 아래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공군본부 인사국장이었던 한용현 예비역 대령은 “여자항공병 문제는 내가 건의한 것인데 무기휴가로 집으로 귀가시켰다. 사태가 급하다 보니 인민군들이 들어와 달려들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 급하면 집에 가도 좋다고 김정렬 총장이 결심을 한 것이다. 육군도 밀리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만나기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정렬 중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캡쳐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정렬 예비역 중장에 대한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27일 자정 당시 용산우체국 근처에 있었던 국방부 본부에 각 군의 지휘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날 화합에서 결정된 내용은 일단 육군의 경우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해군은 진해에 집결해서 요인들은 해외로 망명시키고, 공군도 역시 김해에 집결, 대통령과 장관들의 망명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우선 27일 아침 공군본부에 들러 서류를 소각한 다음 후퇴준비에 착수하였다. 여자항공대라든지 훈련 중인 인원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후략)”

한편 이정희 대위와 정숙자 이등상사는 북한군에게 납치됐다. 생명이 위급했던 상태에서 정숙자 이등상사는 기적적으로 탈출했지만 이정희 대위는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여자항공병 제1기생 중 이명진, 강흥업 2명의 여군소위와 나머지 여자항공병들도 행방불명 및 남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따르면 같은 동료인 박혜연은 “피란 중 대전에서 포탄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알려졌다.

여자항공병들의 복귀 및 전시상태에서 복무 그리고 전역

여자항공대가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비행단에는 1950년 8월 16일 기점으로 4명의 여자항공병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여자항공병들이 귀가조치 될 당시에 귀가하지 않고 공군본부와 같이 후퇴대열에 합류하여 8월 15일부로 비행단에 전속되었다. 이들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근무했다. 4명의 여자항공병들은 다음과 같다.

▲ 6.25 전쟁 발발시부터 귀가하지 않고 복무한 명단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함에 따라 10월 1일 공군본부 선발대가 서울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이전의 청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10월 중순에는 전 공군분대가 서울 복귀를 완료했다. 17일에는 공군의 개편을 단행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신속하게 북진함에 따라 10월 30일에는 평양 미림기지로 전진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이 무렵 지난 8월 중순 비행단에 배속되었던 강덕희 일등중사 등 기존 4명 외에 또 다른 여자항공대원 22명이 복귀했다. 이로서 총 26명은 비행단 및 공군본부 인사국, 군수국, 정훈감실, 재무감실, 병참감실 그리고 본부중대에 배치되어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한참 북진했을 당시인 10월 말, 여자항공대원 3명이 전역했다. 이로서 1950년 12월 일부로 공군여군은 23명이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26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년 12월 1일부터 2차 후퇴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평양 미림기지에 전진 배치되어 있었던 공군비행단도 11월 30일에 대전으로 철수 했다. 이어 수송임무를 담당한 백구부대만을 대전기지에 잔류시킨 채 주력 비행단은 제주도로 이동했다. 12월 21일에는 대구로 후퇴하여 효성여자중학교 자리에는 공군본부가 주둔했고, 항공기지사령부는 경북산업주식회사 자리에 각각 주둔했다. 공군사관학교는 12월 22일 영등포에서 대구 칠성초등학교로 철수했다.

한편 통신대로 전속된 조로득 하사 등 7명은 1951년 6월 1일부로 제4기 통신하사관 후보생과정에 입교하여 6개월간의 통신교육을 받았다. 이때 기상대로 전속된 인원들은 기상도를 그리는 업무와 통신기로 모스부호를 수신하여 기상도를 그릴 수 있는 자료를 생산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기상대 소속의 여자항공병 강덕희 이등상사와 하사계급인 안승주, 김부성, 조영숙, 박종순, 김연래가 의병 및 의가사 사유로 전역했다. 또 그동안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 이정희 대위도 1951년 7월 1일로 전역조치 되었다.

1951년 12월 1일 여자항공병 중 통신하사관 후보생과정을 수료한 대원과 김경오 소위, 윤금자 일등상사를 포함한 통신대 소속 여자항공병 9명 전원은 제50기상전대로 전속되었다. 이어 29일에는 기상대 소속 정숙자 소위가 결혼과 함께 전역했다. 남은 여자항공대원은 총 14명이 되었다.

1952년 1월부터 4월까지 7명이 의가사 전역하고 10월 15일까지 추가로 5명이 전역했다. 이로써 여자항공병 제1기 출신 김경오 중위와 윤금자 일등상사만이 휴전이 될 때까지 현역으로 복무했다.

윤금자 일등상사는 5월 말부터 공군본무 서울분실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11일에는 제106기지전대로 복귀함과 동시에 제66통신대대로 배속되었다. 이후 1953년 5월 1일에 준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14일 24세의 나이로 대구병원에서 병사했다. 그 후 1958년 11월 15일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여자항공대 출신 중 마지막 여자 공군 김경오 대위 ⓒ 다음 누리꾼 블로그 캡쳐

한편 김경오 소위는 1952년 5월 1일 제1전투비행단 101기지전대 기상반원으로 배치되었다가 9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1952년 11월부터 제1전투비행단 제101기지전대 기상반에서 제50기상전대 제151기상대대로 전속된 되었고 이듬해인 3월 15일에는 다시 기상반으로 전속되었다.

1954년 3월 1일 대위로 진급하였고 공군본부 비행반원으로 배치 받았다. 약 2달 동안 L-19항공기로 공중비행훈련, 수평비행, 비상불시착 훈련과 조종사로 비행 중 상황 판단 및 긴급조치훈련, 항법교육 등 52시간의 비행교육을 받았다. 동년 5월 12일에는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이 공군본부 참모부장들을 배석시킨 상태에서 조종사 흉장을 가슴에 직접 달아주었다. 공군본부 작전국장이었던 김신 예비역 중장의 지시로 유대식 소령을 전담교관으로 지명하여 공군참모총장 전용기(804호)로 대구 동명비행장에 비행교육을 실시했다.

김경오 대위는 1954년 9월 30일까지 6개월 10일 동안 비행반에서 근무한 후 10월 31일부로 전역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자항공병들은 처음 군에 자원입대하면서 ‘여자 해방사’가 되겠다는 꿈과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들이 최초에 품었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귀가조치 되었다.

그렇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많은 여자항공병들이 다시 공군부대로 복귀하여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기상, 통신 등 분야에서 맡겨진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여자항공대를 창설한 이정희라는 구심점이 사라지고 전황도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여자항공병들은 전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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