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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史 ① 갈등으로 시작된 미국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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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2.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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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미국이 평양 대동강에 상륙할 당시 탑승한 상선, 제너럴 셔먼호 ⓒ 한미우호협회 공식 네이버 블로그 캡쳐

한미(韓美)간의 협력관계는 2차 대전 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이 한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하지 않아 실질적인 동맹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미동맹의 시발점으로 의의가 크다.

사실 한미 양국 간의 협력은 이 시기부터 시작했으나 한미관계의 시작은 이보다 훨씬 전인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제네럴 셔먼호는 덴마크인 페이지(Page) 선장과 선교사 토마스 로버트 영국인 선교사 등 총 33명이 타고 있었다. 조선에 통상을 요구 했지만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으로 거부 당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평양 주민들을 공격하고 이현익을 납치했다.

▲ 평안도 감사 박규수의 초상화 ⓒ 네이버캐스트 캡쳐

이어 박춘권은 제너럴 셔먼호에 몰래 잠입해 이현익을 구했다. 이어 평안도 감사 박규수는 빈 배에 나무들을 가득 채우고 불로 태워 제너럴 셔먼호에 보내 수장 시켰다.

이 사건을 뒤늦게 알게 된 미국은 두 차례 조선에 탐험을 보냈다.

1871년 미국은 주청(淸)전권공사 F. 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았다. F. F 로우의 조선원정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 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했다. 5월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조선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6월 1일, 강화해협을 탐사하는 도중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다.

미국 대표는 조선 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어 미군은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조선 측은 강화해협은 미군이 조선 당국의 허락 없이 항행( 배나 비행기 따위를 타고 항로 또는 궤도를 다님)한 것은 주권침해,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했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을 동원해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했다.

▲ 신미양요 당시, 미 극동함대 콜로라도호 ⓒ 한국학중앙연구회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했다. 6월 11일 미군은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고 광성보로 진격했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시켜 이에 대비했지만 결국 미군은 광성보를 함락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 정책에 부딪혀 7월 3일 미군은 조선개항을 단념하고 철수했다.

▲ 조미수호통조약 체결 당시 조미 양국이 작성한 외교문서 ⓒ 한국학중앙연구원 캡쳐

한국과 미국의 인연은 1882년에 재개되었다. 1876년 조선은 일본에게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자 미국도 조선과의 강화조약에 서둘렀다.

1879년 청국의 이홍장은 청국의 주선 아래 조선과 미국 간의 의 수교를 성립시켜 일본의 독점적인 조선침투를 견제하고 국제사회에 청국의 위신을 높이고자 당시 영부사 이유원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권고했다.

미국은 이를 받아 들여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청나라 이홍장의 주선으로 조선 측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미국 측 전권공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3년 4월 조선주재 미국 초대공사로서 푸트(Lucius H. Foote)가 입국해서 5월 19일자로 비준서(批准書)를 교환했다. 조선 측도 6월 민영익을 수반으로 보빙사 일행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이로써 조선은 미국과 교류를 시작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단절 되었다.

▲ 서울 남대문에 진군하는 미군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1945년 해방 된 조선은 38도선 이남에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 제24군단이 주둔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미양국간이 과거보다 격상되어 협력관계로 발전되었다. 미 육군성은 곧 군정을 실시했다.

한편 미 본국은 종전 후 급속한 병력감축을 단행하면서 전략적 중요도를 고려하여 해외주둔 병력을 조정했다. 1947년 4월 29일 미 합참합동전략조사위원회의 보고서 ‘국가안보의 견지에서 본 타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 에 따르면 “대(對)한 원조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낮다.” 고 평가되었다.

이 같은 전략 평가에 기초하여 미 군부는 미군 주둔이 필요 없는 ‘도서변방전략’을 채택했다.

1948년 4월 8일, 미군정은 “주한미군은 철수하고 한국에 대해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는 국가안보회의 문서 8호를 채택했다.

이어 1949년 3월 22일에는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1949년 6월 말로 조정하고 추가적으로 한국에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할 것” 이라는 국가안보호의 문서 8-2를 추가했다. 이에 따라 6월 29일까지 군사고문단 479명만 남기고 철수했다.

그 결과 소련의 지원을 꾸준히 받아 군사력을 확충한 북한에 비해 남한은 적정한 수준의 전쟁억제력을 보유하지 못해 국가안보가 심각한 위협에 노출됐다.

▲ 애치슨 라인 ⓒ 메가스터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

설상가상으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1950년 1월 12일에 ‘아시아에서의 위기’ 를 연설하면서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 면서 “이 방위선 밖에 위치한 나라의 안보와 관련한 군사적 공격에 대하여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 고 밝혔다. (계속)

<출처 : 국방부 국방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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