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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여성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⑨ 전투 현장에 뛰어든 육지의 나이팅게일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2.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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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 폭동 당시 건립되던 제3육군병원, 사진은 제3육군병원장의 취임식 ⓒ 봉생사회복지회 中, 봉생 50년사 자료 캡쳐

여수·순천 폭동에 투입된 간호장교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 중 일부인원은 제1육군병원에 배치되었고, 대다수는 충남 유성(現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제2육군병원으로 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수·순천 폭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처음으로 진압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19일 광주 근교에 급히 임시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간호후보생 제1기생 출신, 김순봉, 김재명, 이종화 소위가 파견되어 환자들을 돌보았다. 광주 근교에 설치된 임시 야전병원이 바로 제3육군병원의 모태가 되었다.

임시 야전병원의 시설은 열악했다. 모든 시설이 퀸셋건물(광복 후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이 급하게 지은 양철지붕으로 된 임시건물)이었다. 시설이 모자라 들것에 누운 채 복도에서 치료 받는 환자도 많았다.

의료장비와 약이 부족해 군의관이 처방하는 대로 투약을 할 수도 없었다. 알코올 같은 소독제, 거즈 붕대를 다시 삶을 정도로 기본적인 물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편 10월 말, 전북 남원에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본격적으로 토벌이 시작된 후 전상자의 적시적인 치료를 위해 초등학교를 빌려 임시 야전병원을 개설했다.

이 병원에서는 간호장교들도 ‘전투지역의 야전병원 근무수칙’ 에 따라 철모와 군화를 착용하고 근무했다.

수술이 급한 중환자들은 광주나 대전의 육군병원으로 보내고, 가벼운 총상이나 자상환자(칼, 송곳 등 날카로운 곳에 찔려 상처 입은 환자)들만 돌보았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간호장교들은 "너무 바빠서 철모가 무거운지도 몰랐고, 군화가 불펴한 줄도 몰랐다." 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한편 총상과 자상을 입고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여 파상풍으로 진행된 환자들도 간호장교들의 손길이 닿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다.

지린산지구사령부 야전병원에서 근무한 간호장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 절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물, 물! 목말라 죽겠어요.” 총상을 입고 막 실려 온 환자들은 얼마나 탈수증이 심했던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을 찾았다. 애원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그들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으면 그렇게 탈수증이 심할까. 우리보다 나이 어린 병사들을 대할 때는 고향에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그러면 걸음이 빨라지다 못하여 뛰었다. 종종걸음으로 물그릇을 들고 가면 눈을 뜬 채로 죽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단숨에 물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한 그릇 더 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였고, 물 한 그릇을 다 먹지도 못하고 죽은 병사도 있었다. (중략) 반란군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지침이 없었다. 그러나 군의관에게서나 간호장교에게나, 그들은 똑같은 환자일 수밖에 없었다. 치료가 필요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 히포크라테스나 나이팅게일 정신이다. 치료가 끝나면 포로들은 호송에 따라 어디론가 끌려갔다. 어떤 이는 조사기관으로 가고, 어떤 이는 감옥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더러는 총살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끌려가면서 “간호장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 는 말을 남기고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여순 폭동 및 6.25전쟁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간호장교 1기 ⓒ 다음 누리꾼 블로그 캡쳐

6.25 전쟁 발발과 간호장교의 참전활동

6.25 개전 초 국군의 모든 분야가 열악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군진의료분야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개전 초기 육군 의료기관은 5개 육군병원과 1개 요양소가 있었을 뿐이었다. 의무인력도 군의관과 간호장교 108명을 합쳐 250명, 위생병과 위생부사관 등 병 1,401명이 전부였다.

수많은 전상자를 수용하고 진료하는데 있어 애로사항을 극복하기 위해 민간시설을 징발했다. 천에 천막을 치고 환자를 수용하여 급히 육군병원, 이동외과병원을 증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간호 인력이 모자라 사회의 저명인사들까지 군의관으로 징집하여 각 육군병원과 이동외과병원으로 배치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전쟁터에서 계속 나오는 전상자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민간병원 간호사들을 '현지임관' 형식으로 간호장교로 선발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급히 군의학교에 간호사관생도 과정을 개설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을 뽑아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한편 전방지역에서는 간호장교들이 더욱 부족했다. 따라서 부대장 직권으로 민간간호사들을 소집했다. 이들을 간단한 제식훈련만 받게 한 뒤 간호장교로 임관시켜 부상병들의 응급처지를 맡게 했다.

이렇듯 계속된 군병원 창설 및 증편과 간호인력 확충노력으로 1953년에는 598명까지 늘어났다. 전쟁기간 중 참전한 간호장교의 총인원은 1,257명이었고 이들이 하루 평균 22,800명의 입원환자를 간호했으며 40만 명이 넘는 전상자를 간호했다.

▲ 6.25 당시 임관한 간호장교들 ⓒ 월간조선 캡쳐

6. 25전쟁 중 간호장교 양성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배출된 간호장교후보생 출신의 간호장교는 5개기를 다 합쳐도 1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병원 또한 새롭게 창설되어 간호 인력의 수요가 늘어나자 ‘현지임관’ 이라는 임기응변식의 간호장교 확보대책이 강구되었다.

간호장교의 지원 자격과 선발 방법을 완화했다. 지원 자격을 기존 19세 이상 30세 미만에서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각 도립병원 간호사와 민간병원 현역 간호사 및 간호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확대하여 모집했다.

간호장교후보생들의 교육훈련 기간도 짧게는 10일, 길면 20일 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바로 간호장교로 임관하여 육군병원으로 배치되었다.

간호장교후보 6기부터 8기까지는 각 지방 종합병원 소속 간호사들과 육군병원에서 실습 또는 의료봉사 활동을 하던 간호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주축 되어 구성되었다.

1950년 9월 5일부터 11월 1일까지 간호장교후보 제6기생 64명과 제7기생 7명, 제8기생 중 23명을 현지 임관시켰다. 나머지 제8기생 중 35명을 제1육군병원에서 보름간의 속성 교육과정을 거쳐 임관시켰다.

전시에서 간호 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심지어 11월 18일에는 간호원 2명을 따로 임관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간호장교 131명을 배출한 뒤, 육군의 여자의용군훈련소가 간호장교 양성훈련을 주관하여 실시했다.

한편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10월 14일 서울 퇴계로 일신초등학교(現 극동빌딩)로 옮겨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 대신동 경남상업고등학교에서 문을 열었다.

이처럼 전황의 급작스런 변동으로 간호장교 양성교육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계속되었다.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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