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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해외 파병史 ① 베트남 전쟁 발발과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해외 파병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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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3.0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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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협정에 의해 분단된 베트남 ⓒ <월남패망, 우리에게 남긴 것> 영상 캡쳐

베트남전쟁의 원인

1946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의 독립을 선언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의 전쟁(제1차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5월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호치민이 이끈 베트남 공산당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약 두 달 뒤,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협정’ 이 체결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철수하고,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정부가 들어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하 북베트남)’과 자유정부가 들어선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 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공백은 자유진영을 대표하던 미국의 몫으로 자연히 돌아왔다. 이에 미국은 자유정부가 들어선 남베트남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9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서는 바오다이 황제를 국민투표로 강제 퇴위시키고 응오 딘 지엠(Ngô Ðình Diệm)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은 족벌 정치와 친가톨릭 정책을 펼쳐 당시 불교를 주로 믿었던 국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당시 지엠의 친가톨릭정책은 주요 요직에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을 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토지개혁을 펼쳤을 당시에도 가톨릭을 믿는 주민들에게는 혜택을 크게 부여했다.

▲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하 베트콩)은 남베트남내에서 끊임없이 반정부활동을 벌였다. 탱크 위에 보이는 깃발은 베트콩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 누리꾼 블로그 캡쳐

지엠의 독재가 계속되자 이에 반발한 남베트남 국민들이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하 베트콩)을 결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콩은 점점 늘어만 갔다.

이에 위험을 느낀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렸다. 1961년 말 약 3,200명의 군사원조단이 불과 1년 만에 약 12,000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964년 북베트남에 남파된 공산주의자들과 베트콩은 본격적으로 반정부행위를 벌이고 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베트남에 개입할 명분을 찾던 중, ‘통킹 만 사건(미국에 따르면,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통킹 만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구축함[매독스 호]을 향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을 했다. 훗날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자작극임을 시인했다)’ 을 일으켰다.

통킹 만 사건을 명분으로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함으로써 제2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자유 우방국들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구했다.

▲ 박정희 대통령(5.16 쿠데타 당시에는 육군 소장)이 5.16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사진은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육군 소장과 수하들의 모습 ⓒ 연합뉴스

주월한국군 파병 계기

한편 1961년 5월 16일, 한국에서는 박정희 소장(당시 제2군 부사령관)의 주도로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이틀 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5·16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국정을 움직이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국가최고통치기관)’ 를 창설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에 부임했다.

2년 뒤, 박정희 의장은 육군 대장에서 예편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미국은 5.16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 대통령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베트남에 파병된 태권고교관단의 경기 모습, 태권도교관단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많은 사관학교 학생들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태권도를 가르쳤다. ⓒ 누리꾼 블로그 캡쳐

베트남 1차 파병

그러나 이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 개입 할 명분을 찾고 있었고 한국을 포함한 자유 우방국에게 파병을 요구했던 시기다.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 참전으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전쟁특수를 기회삼아 경제발전을 이루려했다.

이에 국회에서 베트남 파병안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 끝에 1964년 7월 31일 1차 파병 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이 사이공으로 파병되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다.

▲ 1964년 9월, 제1차 파병으로 베트남에 갔던 안상정 간호장교, 뒷 건물은 이동외과병원으로 쓰여진 건물이다. ⓒ 월남전과 한국 홈페이지 캡쳐

제1이동외과병원은 1964년 7월 15일 원부대였던 제7후송병원에서 장병 130명으로 창설되었다. 장병 130명은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태권도 교관단과 함께 1964년 9월 22일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어 붕타우(베트남 호치민[남베트남 당시에는 사이공]에서 남쪽으로 125㎞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로 이동한 후 베트남 공화국 육군 정양병원에서 첫 임무를 시작했다.

이듬해 1965년 제106후송병원이 파병되고 1966년에는 제209이동외과병원과 제102후송병원이 각각 파병되어 현지 국군 분대와 민간인들을 치료했다.

또한 간호장교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나환자촌 위문 및 대민치료 등을 맡아 “따이한(대한:大韓) 최고” 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한편 제1차 파병부대로 태권도교관단도 파병되었다. 태권도교관단이 파병된 원인은 1957년 응오 딘 지엠 남베트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휴전선 일대 제6군단 29사단(1959년 20사단으로 개편)에서 태권도 시범에 참관한 것이 계기였다.

태권도 연무시범을 지켜본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은 “백병전에 좋은 무기가 되겠다” 며 찬사했다. 1959년 3월, 각 군 유단자 15명이 태권도 시범단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1962년 12월, 남태희 소령 등 4명이 1년 동안 호치민 투득 체육학교에서 100명을 대상으로 태권도 교육을 실시했다.

1964년 9월, 태권도교관단이 이동외과병원과 함께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 베트남에 도착한 태권도교관단은 4개 조로 나뉘어 보병학교, 육사, 해사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남베트남 태권도 협회를 발족하는 등 남베트남 내에서 태권도 분야로 많은 활약을 펼쳤다.

▲ 베트남으로 파병하는 비둘기부대를 환송하고 있다. ⓒ 누리꾼 블로그 캡쳐

베트남 2차 파병

한편 베트남 전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이에 미군은 후방지원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게 되자,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Winthrop G. Brown) 주한미군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남베트남에서 후방을 담당할 비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또한 1965년 1월 2일 남베트남 정부도 한국군 2차 파병 요청했고 이에 1965년 1월 26일 국회에서 제2차 파병동의안 가결되었다.

이에 국방부는 강원도 현리에 있는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비둘기부대’ 로 명명했다. 비둘기부대는 건설지원단으로도 불리며 경비대대와 수송자동차, 공병 등으로 편성되었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다. 2월 13일, 비둘기부대 중 선발대가 출발하여 24일, 베트남 사이공 도착했다. 후발대는 3월 10일 인천항을 떠나 3월 16일에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로써 모든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한 것이다. 베트남 도착과 동시에 익숙하지 못한 적정과 지형에서 한국군 자체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며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했으나 베트콩의 기습을 받는 등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러한 난항에도 불구하고 비둘기부대는 현지에서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 학교, 진료소 공사를 맡았고 이러한 활약으로 남베트남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1차, 2차 파병을 전투부대가 아닌 비전투부대로 파병했던 이유는 남베트남 국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만약 1차 파병부터 곧 바로 전투부대를 파병했을 경우, 남베트남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전투 수행에 효율적이지 못할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1,2차 베트남파병이 이루어짐으로써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비전투병 파병이 이루어짐으로써 외국에 군사적으로 도움을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불과 6.25 전쟁이 끝난지 11년 만에 이루어짐으로써 그만큼 한국의 위상은 높아졌다. 또한 이러한 낯선 땅에서 장병들의 희생이 시작됨으로써 대한민국은 빈곤에서 탈출하여 조국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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