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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북괴 대남 도발사 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오창욱 인턴 기자
  • 승인 2013.07.1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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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곳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에 서 있는 미류나무가 시야를 가리자 미군측이 이 나무의 가지를 치는 작업을 시작하자 북한군 30명이 달려들어 미군 경비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한국군 5명과 미군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이사진은 판문점의 난동현장모습이다. ⓒ 연합뉴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이후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인 남과 북의 영역을 가르는 휴전선이 생겼다.

휴전선이 생긴 후 휴전회담이 열렸던 판문점은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의 공동경비구역으로서, 당시 경비구역 안에서의 관계자들은 왕래가 자유로웠다.

그러나 현재는 군사분계선이 구분되어 상대 병사와 말을 걸 수도 없고, 분계선을 넘는 행위도 금지 됐다.

이런 군사분계선이 생긴 계기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였다.

당시 사건의 화근은 판문점에 있는 25년생 15m 높이의 미루나무로부터 문제가 발생했으며, 남·북이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에서 시아를 가려 양측이 관측을 하는데 지장을 줬다.

제 5관측소에서 제 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맡았던 국제 연합군 측의 미국군은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 3초소 부근에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관측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했다.

결국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피스(Arthur Bonifas) 대위를 비롯해 소대장 마크 배럿(Mark Barret) 중위 등 2명과 부사관·병사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부사관·병사 4명 등 11명은 판문점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연합군측 제 3초소 부근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작업을 하는 남한 노무자 5명을 감독했다.

판문점 군사분계선 공동경비구역의 서쪽을 흐르는 사천에 위치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본래 명칭이 ‘널문다리’라고 불렸으나, 1953년 7월 휴전협정 후 포로 교환을 비롯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왕래 등 많은 사건들이 이 다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고 개칭됐다.

전지작업을 지켜보던 북한군은 인민군 박철 소위 및 장교 1명과 15명의 부사관과 병사를 이끌고 나타나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루나무의 위치가 잠정적 관할선에 따라 국제연합군 측에 속해 있어 작업을 예정대로 진행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중대장 직권을 내세워 계속해서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인근 초소에 있던 북한군 부사관과 병사 20여명은 지원 요청 지시를 받고 트럭을 이용해 작업장소로 왔다.

▲ 1976.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자료사진)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캡쳐

박철 소위는 작업중지 재요청을 했으나,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거부하자 북한군 부사관 및 병사들은 박철 소위의 공격명령 지시를 받아 트럭에 실어 온 곡괭이, 몽둥이와 노무자들이 작업을 위해 쓰던 도끼를 탈취해 기습 공격을 시행했다.

북한군은 국제연합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을 집중 공격을 가했으며,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런 중위는 이마에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피살당했다.

미군 부사관·병사 및 남한 국군 장교와 부사관·병사 들은 중경상을 입었으며, 국제연합군측 트럭 3대는 크게 파손됐다.

당시 사건 소식을 접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즉시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사건의 화근인 미루나무를 베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북한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을 제거하라는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 : 미국 전설에 등장하는 거구의 나무꾼 폴 버니언에서 따온 작전명)을 지시했다.

스틸웰 사령관은 폴 버니언 작전을 지시받고 F-4, F-111, B-52 폭격기, 미드웨이 호 등을 동원하는 대규모 무력 시위 계획을 세우고,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을 발령했다.

작전이 시행 되자 국제연합군은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했으며,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를 한반도로 긴급 파견시켰다.

또 괌에서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카데나 미공군기지에서 F-4 24대를 한반도 상공에서 선회하도록 지시했으며,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해군 제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순양 시키는 등 중무장한 호위함 5척을 동해로 북상시켜 한국 해역인근에 배치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특전사 1여단 김종헌 소령을 지휘관으로 임명시키고 64인의 특전사를 카투사로 위장시켜 보복작전 지령을 내렸다.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폴 버니언 작전에 투입됐으며,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했다.

북한군은 무력대응 시에는 과감히 사살하여 보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미군과 남한군의 단호한 대응과 기세에 겁을 먹어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났다.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안의 문제의 미류나무를 완전히 제거한 지역의 전경. 1976.8.21 ⓒ 연합뉴스

다행히 더 큰 무력사태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북한의 만행으로 인해 남·북의 대립이 고조되고 양측의 불신이 높아져 갔다.

폴 버니언 작전 종결 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김일성은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그러나 북한 측은 미국이 북조선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으나, 결국 24시간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한 것이다.

사건 이후 북한은 1년 반 동안 준전시상태를 유지했고, 대한민국도 북한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규탄하는 등 사건이 미친 영향은 쉽게 가라앉지 못했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모두 철거됐으며, 콘크리트로 그 경계를 표시했다.

이 사건에서 대한민국은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냈다. 이런 단호한 대응이 있었기에 사건에 대한 방책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무시한 채 종북·좌익 세력들은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철폐 등 반미 감정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는 지난 역사를 되돌려 봤을 때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박 대통령의 중국 순방 후 언론인과의 오찬자리에서 언급된 대북정책이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앞으로 보다나은 북한과의 신뢰를 위해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말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함과 동시에 북한이 대한민국 정부를 공격하는데 항상 거론되는 ‘최고 존엄’에 대해 “존엄은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한테도 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렇듯 저자세로 일관하고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내주던 과거 북한과의 관계에서 탈피해 대한민국은 더욱 단호한 대북정책과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더 이상의 북한에 만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남한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일관된 원칙적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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