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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임 ⓒ 인터넷 캡쳐 | ||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직접적으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보고 상대방의 생각을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그 짐작하는 잣대는 바로 자기자신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 저런 言行은, 자기 같으면 이런 생각을 할 때 하게 되므로, 상대방도 아마 이런 생각에서 저런 언행을 하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을 한다.
다행히도 인간은 서로가 조금씩은 다르게 태어났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웬만한 경우에는 상대방의 언행으로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가 있다. 다만 상대방이 인간의 본질과 크게 벗어나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예외가 생기는데, 이 경우 상대방의 언행을 통상적인 인간양심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는 것이다.
여간첩 김수임은 바로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해방 후 우리사회에 들끓던 異質 인간들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여 경계하지 못한 탓에, 한때 만나 情을 나누었던 간첩 李康國에 대한 戀情에 사로잡혀, 北에 가있는 이강국의 지속적인 요구를 사랑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부탁 정도로 생각하고 협조하다가, 결국 그들이 놓은 덫에 걸려 파멸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임은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타고난 영특함으로 고등교육을 받고 상류 사교계로 진출하였다. 그녀의 수준에 맞는 신랑감은 혼담이 오가다가도 그녀의 출신배경을 알게 된 후에는 물러서곤 하여 그녀는 당시의 결혼 적령기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1943년 봄 조선호텔의 모선교사의 귀국파티에서 경성제대 출신 정치학 박사에 이왕가의 후손인 이강국이라는 호남을 만나게 된다.
김수임은 그날 이후 이강국을 마음 속에 사모하게 되었으나 감히 마음을 나타낼 엄두도 못내고 있던 차에 이강국으로부터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전화가 왔으니 이 어찌 운명적인 만남이 아니라 할 수 있으랴. 그것이 한없는 악연의 始發이라 할 지라도...
둘은 서로간에 진한 사랑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강국은 얼마안가 8.15 해방 후 좌익운동에 투신하여 혁명과업의 무거운 사명을 수행하고자 월북하였고 김수임은 함께 따라가고 싶었으나 아직은 서로가 행복한 사랑을 즐길만한 그날이 오지 않았으니 때가 아니라는 이강국의 말에 따라 남한에 남게 되었다.
김수임의 미모와 재능은 어느 남자에게도 貪心을 불러일으킬 만 하였으므로 그녀는 평소 上司로서 자기에게 호의를 베푸는 미군헌병사령부의 실력자 패드대령에게 부탁하여 군용지프를 빌려 체포령이 내려있는 이강국을 개성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그후 패드 대령의 현지처로 자리잡았다. 단순히 요즘 말하는 현지처의 정도가 아니라, 단지 패드대령이 미국의 본처와 이혼을 안할 뿐이지 그의 아이까지 낳고, 또한 되도록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퇴역하기 전까지는 이 곳에 살려고 하는 등, 말하자면 첩과 같은 위치였다. 그녀의 미군 남편과의 삶도 행복했다고는 할 수 있었으나 그녀가 거기 만족하지 않고 간첩행위를 한 것은 패드대령이 결국 완전한 자기의 남편은 아닌 만큼, 이강국이 후에 '통일조국'의 그날이 오면 함께 영광을 나누자고 한 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저 사랑했던 사람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강국은 이후에도 남파간첩을 통해 김수임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의 안부를 전하고, '아직도 그대를 사랑하고 잊지 않고 있으며', 훗날을 기약하며 그날이 올 때까지 어렵더라도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청하였다. 그의 요구에 따라 김수임은 남편의 차를 계속 남파간첩의 월북과 물자수송 등에 이용하였다.
미군이 운전하는 미군 실력자의 차는 국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의심 없이 뚫고 나갈 수 있었다.
개성에 사는 계모가 위독하기 때문에 韓醫를 帶同하고 급히 가야 한다며 차를 빌리고, 월북간첩을 한의사와 조수로 위장시키고 김수임 자신은 유창한 영어로 검문을 무사히 통과시키기도 하였으니, 그녀의 행동은 이미 마지못해 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말았다.
김수임은 그들의 활동자금까지 구해주는 등 몇 번의 요구를 들어주다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그 때는 이미 크나큰 간첩죄를 저지른 후였고, 또한 북에서는 만약 더 협조를 않는다면 이미 행한 간첩행위를 폭로할 테니 계속 협조하라며 간첩 ＹＯ호로서 '임명'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의심을 받지 않는 미군남편의 차를 이용한데서 더 나아가, 역시 의심을 받지 못하며 사찰대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집(미군 남편의 집)을 간첩들의 접선 아지트로 쓰게 하고 잠자리의 남편으로부터 군사기밀까지 얻어내는 단계에까지 그녀는 와 있었다.
사랑에 눈이 어두워 조국을 배신한 행위는 역사상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다. 우리의 유명한 옛 이야기 <왕자호동과 낙랑공주>에서도 낙랑공주는 사랑하는 호동왕자의 요구에 따라 自鳴鼓를 찢음으로써 父王으로부터 처형을 당하였고 외국의 경우에도, 명배우 율부린너의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러시아의 작가 고글리 원작 중앙아시아 코사크族의 이야기 <隊長부리바>에서 주인공의 아들은 적국의 여인을 사랑하여 배신함으로써 역시 아버지인 주인공으로부터 처형을 당하였다. 이들 이야기의 '父親들'이 조금도 매정하거나 자식을 사랑 않는 자로 묘사되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김수임이 설령 유력자의 딸이었다 해도 그녀의 罪過는 용서될 수 없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類推할 수 있다.
김수임의 사건은 세월이 흘러 몇 세기가 지난 후 그녀를 둘러싼 여러 세속적 정황들이 자연 마모되고 세탁되어진 후에는 낙랑공주나 대장부리바의 아들과 같은 悲戀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녀를 둘러싼 여러 속물적 배경이 선명히 남아있는 상황에서는 그녀에 대한 일방적인 同情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녀가 이강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해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인 미국 패드대령의 아내가 되어 부귀영화를 즐기고 있었으므로 사랑을 위해 인내하는 비련의 주인공은 되기 힘들다. 패드대령이 본국에 본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완전한 남편으로 삼고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면 더욱 그렇다. 이강국은 패드대령과의 헤어짐을 예비한 그녀의 미래남편이었던가. 이강국 또한 본부인이 있는 남자였으니 김수임이 이강국에게서 기대했던 바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랑의 관계는 미묘한 것이므로 제삼자가 섣불리 억측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다만 그녀가 오로지 인간적인 정으로 이강국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었다해도, 그녀는 자신의 교육수준과 사회적인 위치 등을 고려할 때, 私事로운 정을 떠나 자기에게 다른 일반 민중들보다 더한 혜택을 준 조국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여야 했고 大局的인 見地에서 미리 결단을 내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녀를 그토록 잔인하게 이용한 이강국마저, 뒤에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결국 김일성에 의하여 제거 당하게 되는, 그러한 좌익혁명운동의 實狀을 일찍이 깨달았어야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본연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상대방에 대한 호의를, 저네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좌익의 수법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필자 자신도 그러한 일을 겪은 바 있으니, 예전에 모 대기업의 과장급 직원으로 근무할 때, 통근용으로 자동차를 구입하여 이제 막 운전연습을 끝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필자를 선배라 하며 따르던 한 직원이, 납품을 하기 위해 물건을 가져나가야 하는데 차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물건이 별로 무거운 것도 아니고 지금 내 일을 해야 할 것이 있으니 곤란하다고 했으나, 웬만해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필자의 성품을 아는 그 후배직원은 집요하게 내게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를 내 차에 태워 정문 밖으로 나가게 하고는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후배직원은 당시 사무기술 노조 결성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회사당국으로부터 要注意 인물로 지목되었던 참이었고, 그들 '사무기술 노조 추진위원회'는 자신들의 행위가 '철없는 어린애'들의 행위가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간부급 사원을 포섭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과장급 직원과 함께 차에 동승하여 오간다는 사실을 경비원들에게 일부러 알려주어 자신들의 동조자에 과장급 직원이 있는 것처럼 과시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 일 때문에 훗날 필자가 그들에게 동조한 간부직원으로 간주되어 상상외의 불이익을 받았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듯 좌익기질의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양심의 허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好意를 이용하여 지속적인 미끼를 던져 저네들에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여 목적을 이루는 그러한 수법을, 근래에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유 대한민국의 檢察이 사용하고 있음이 입증된 것은 대단히 示唆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러한 수법을 당연시하는 同種基質의 者들이, 그보다 훨씬 앞서, 가장 인간적인 분야라 할 수 있는 문학계를 장악하여 국민정서를 유린한 것이 비하면,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다.
<한국논단 19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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