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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의 독립운동가 <조병준>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3.2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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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1862-1931]

■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63년

■ 공적개요

ㅇ 서간도에서 대한독립단 총참모로 항일무장투쟁 전개
ㅇ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 지방 행정조직인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으로 활동
ㅇ 내몽고 포두에 배달농장, 배달소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기반 구축

서간도 대한독립단 총참모, 내몽고항일운동개척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병투쟁을 비롯하여 서간도 대한독립단 지도자로, 임시정부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으로, 내몽고 독립운동 개척자로서 폭넓게 독립운동을 이끈 조병준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殖産)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에 89개 지단을 설치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썼으며,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기관인 광복군 참리부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통의부 통의부장에 피선되었으나 곧 사임하였으며, 일제의 만주침략을 예견하고 동지 및 가족 80여 명을 인솔하여 내몽고 수원성 포두현 중탄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도산 안창호가 미주 동포에게서 마련하여 지원한 이주자금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농지 약 60만 평을 임차하여 배달농장을 세우고,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을 설립하였으며,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함과 아울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곳에 의민부를 설립하여 배달농장의 수입금으로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1.10.2. 포두현 중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

선생은 폭넓게 독립운동을 지휘한 독립운동계의 영수라 할 수 있으며, 증곡재라는 학당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이 서훈된 인물만도 수십 명에 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가계와 학문

국동 조병준(1862~1931)은 평안도 창성의병장, 남만주 대한독립단 총참모, 민국독립단 도총재, 평북독판부 독판, 광복군참리부 참리부장, 내몽고지역 의민부 총재 등을 역임한 인물로 남만주와 내몽고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조병준(趙秉準)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1862년(任戌) 10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채마동 배양리에서 아버지 조승규(趙承奎)와 어머니 경주 김씨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후에 의주군 월화면 주음동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풍양으로 고려 개국공신 조맹(趙孟)의 후예가 된다. 그의 집안은 8대조인 조시태, 7대조인 조군옥, 6대조인 통정대부 조충선, 5대조인 중추원 동지부사 겸 한성좌윤 조성유가 대대로 한양에서 세거하였다.그러다가 5대조인 조성유가 경종 때 신임사화의 변을 당하여 평안북도 구성군에 유배되었다. 그 후 죄가 풀려 신원되었으나 그곳에 그대로 눌러 살게 되었다. 4대조인 조득, 조부인 조정, 부친인 조승규는 대를 이어 저명한 선비로 알려졌다.

조병준은 1864년 3세 때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7세 때는 능히 오언시를 창작하는 총명함을 보였다. 향리의 노인들이 조병준의 재능을 시험하기 위해 '蜂(벌)' 으로 출제하니 즉석에서 답하였다.

蜂群莫能敵 벌떼는 대적 못 하겠다
飛群億萬數 나는 수가 억만이 넘기에
終日營營飛 종일 살기 위해 영영 날다가
暮入大筒中 저녁에는 큰 벌통에 들어가누나

노인들은 놀라 그의 시재(詩才)를 칭찬하고 오리알 10개를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10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3세인 1874년 의주군 월화면 진음동에 사는 평산 신씨 신병옥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장성하여서는 학식과 제술이 출중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성품은 강하되 너그럽고 위엄있되 친절 자상하였다고 전한다. 학문 외에도 천문지리와 음양수학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음양학에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조병준은 스스로 음양학이 무익하다 생각하고 오로지 경의학(經義學) 공부에 전력하였다.평안도 의주에서 학문으로 고매한 권익형과 교유하면서 경의학의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였다. 점차 명성이 인근에 높아져 동학 가운데 비현면의 최석하, 용천군의 장정식 등이 함께 공부하기를 청하여 2~3년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철산군의 부호 오학민의 초빙으로 전임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니 원근 각처에서 조병준에게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1892년 태천에 거주하는 운암 박문일 선생께 예를 갖추어 찾아보고 문하생이 되기를 청하니 선생이 기꺼이 맞이하면서 기품이 청수하며 학문이 넓고 뜻이 돈독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 운암은 일찍이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한 후 벼슬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학문과 덕행으로 아우인 성암 박문오와 함께 이름이 관서 일대에 날렸던 인물이다. 운암의 제자로는 조병준을 비롯하여 박은식, 백삼규, 노덕제 등으로 관서와 관북일대의 지사들은 대개 운암과 성암의 제자들이었다. 관서의 선비들은 운암과 성암이 서거한 후에는 의암 유인석을 사사하였다.

1894년 운암 선생께서 서거하시므로 조병준은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창성 의병을 일으키다

1895년 10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국수보복(國讐 報復)의 대의를 품고 유인석의 의거에 호응하여 유학자인 장원섭, 신우현 등과 함께 평북 창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를 모집하여 의병단을 조직하고 일제에 항전하였다. 조병준은 일제의 헌병에게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하였다.

1898년 평생의 동지이자 처남인 신우현이 의주군 월화면 증곡에 새로 학당을 건축하여 '증곡재(曾谷齋)'라 칭하고 조병준을 초청하였다. 조병준은 증곡재에서 박문일 선생의 초상을 모시고 경의학을 가르치면서 문하생 수천 명을 배출하였다. 증곡재에는 서북 각도의 청년 학도 7~8백 명이 모여 유학을 연구하면서 국사(國事)를 토론하기도 했다.

이 때 조병준은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정을 통탄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도이(島夷)인 왜적과 4백 년 동안 원수인데 지난 을미년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왜적과는 불공대천지 원수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선비들로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멸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그러므로 삼남지방의 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혈전을 마다하지 않은데 우리 지방의 선비들은 묵묵 부동하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조병준은 눈물을 흘리며 제자들에게 때를 보아 거의할 것과 해외에 나가 군대를 양성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러한 권유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는 실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병준은 스스로 솔선하여 서간도로 망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조병준의 문하생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백여 명에 달하며 건국공로훈장을 수상한 자만도 유여대, 양전백, 김승학, 백기준, 김승엽, 최지관, 홍주, 이세현, 김경하, 김시향, 김익곤, 김창곤, 정이형, 신언갑, 백의범, 한인권, 김승만, 고득수, 박이열, 배준호, 장학구, 최일엽, 김시황, 최영호, 홍식 등 수십 명에 달한다.

이후 조병준은 자신의 학문이 아직 미진하다고 생각하고 당대 유학의 제1인자라 알려진 충남 태안의 거유 간재 전우 선생께 서신과 예물을 먼저 보내며 배움을 청하는 뜻을 밝혔다. 이듬해인 1902년 태안군으로 간재 선생을 찾아보니 기꺼이 맞이하여 타고난 자질이 트였고 지식이 매우 정밀하고 바르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 간재는 일찍이 아산의 임헌회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조정에서는 간재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강학에만 힘써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오진영, 최병심, 송기면 등 기라성 같은 학자 외에도 3천여 명이 넘는 제자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귀로에 서울에서 거유 의암 유인석 선생을 찾아보았다. 이때 국사를 논의하던 의암 선생께서 이완용에게 소개함에 '의주의 조모' 라 인사하니 이완용은 서북인이라 멸시하여 '의주? 의주? 의주라?'짐짓 반복하기에 조병준은 크게 화를 내며 '공은 일국의 대신으로서 선조대왕이 몽진한 곳도 모르냐?' 라고 하면서 옆에 있던 목침을 들어 집어던졌다. 의암 선생의 만류로 겨우 화해되었으나 조병준의 기개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증곡재로 돌아와 유생들을 가르치던 중 간재 선생의 부음을 받고 심상(心喪) 3년을 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다

당시 나라는 이른바 5조약, 7조약 체결로 일제의 위협과 협박이 극도에 달하더니 드디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조병준은 결사보국할 일념으로 산포수 대장 최원길 등과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며 항전하였다. 의병진은 처음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으나 점차 일제의 병력이 증강됨으로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조병준은 의병진을 정비하여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조병준은 봉천성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두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식산(殖産)과 교육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 단체를 중심으로 재만 동포 자제의 교육과 생계 보장의 계책을 세우고 각 시가지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습하고 농촌에는 서재(書齋)를 두어 구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또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농가의 형편에 따라 수 두(斗)에서 일 석(石)까지 곡물을 헌납받아 비축하고 유사시에는 군량미로 쓸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압박으로 조국과 부모처자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의 수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조병준은 이들을 규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사상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도록 하였다.

그 해(1919) 음력 3월 15일 단군 어천절을 기하여 만주 각지에 분산되어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유림영수와 보약사 대표, 의병 수령, 향약계 대표, 농무계 대표, 포수단 대표 등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포 서구 대화사에 모여 각 단체를 해산하고 항일투쟁의 통합 단일 기관인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 대한독립단 경고문

- 대한독립단은 의병 계열의 민족운동자들이 만주 이주 초기에 조직하였던 자치단체 성격의 보약사, 향약계, 농무계 등을 통합 확대하여 조직한 독립군단이었기 때문에 창단 초기부터 방대한 조직이 가능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서간도 지역의 대다수 독립운동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병준은 대한독립단의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힘을 모아 항일투쟁의 방안으로 만주 각 현에 독립단 지단을 조직하였다. 특히 관전현 지단에는 윤창수, 강용오, 김평식, 조종서 등으로 사무를 분담하게 하고 실천 방략으로 우선 국내에 있는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하여 김승학을 상해에 파견하여 무기를 구입해 왔다. 구입한 무기로 청년들을 무장시키고 이들을 국내로 잠입시켜 일제의 경찰기관을 습격하는 한편 부유한 자들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도록 조처하였다.

한편 관전현 지단으로 하여금 매일 국내로부터 들어오는 수십 명의 청년들을 독립단 본부로 이송하여 독립군에 편입시키고 일제의 밀정기관인 일민단, 보민단, 강립단 등을 모두 숙청 박멸하기에 힘썼다.

대한독립단은 창단된 지 1년 만에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압록강 일대에서 일제에 동조하여 헌병보조원 또는 면서기 등으로 근무하던 친일의 무리들이 일제의 관복을 벗어버리고 탈주하여 대한독립단의 독립군으로 가입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국경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고 중국 정부에 대하여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서간도의 독립군단들을 해체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만 독립군단의 해체를 요구할 뿐이었다.

대한독립단에서는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총단장 조맹선은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던 백계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그 군대 안에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도 했다.

1919년 말경에 이르러 당시 독립단 총재부 안에서는 서로 엇갈린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었다. 하나는 복벽주의파로 조선 왕조의 부흥을 꾀하였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파로 민주 정권의 실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서로의 의견이 대립된 것이다. 전자는 주로 완고한 노장층이었고 후자는 새로운 사상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인 소장층이었다.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던 두 파는 결국 연호 문제로 분열되고 말았다.

복벽파는 단기 또는 융희를 고집하고 민주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연호인 민국 연호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민국독립단은 조병준을 비롯하여 신우현, 유응하, 김승학, 변창근 등의 비교적 소장파였고 기원독립단은 박장호, 백삼규, 전덕원, 이웅해, 김평식 등의 유생과 의병장 출신들이었다. 민국과 기원의 양파는 이념 대립으로 간혹 마찰이 있기는 하였으나 항일운동에 있어서는 서로 협조와 협력을 아끼지 아니 하였다.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추대된 조병준은 상해 임시정부와 유기적인 연락을 가지며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9년 10월 10일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연통제를 실시함에 따라 조병준은 그 해(1919) 12월 5일자로 임시정부 연통제 기관인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었다. 독판에 취임한 조병준은 신우현, 김승학, 홍식, 백의범 등을 통해 독립단 국내지단 설치와 임시정부 연통제 실시를 위하여 노력한 결과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에 모두 89개소의 지단조직과 연통제 조직을 설치하였다.

▲ 대한독립단 군자금 영수증

1920년 2월 항일전선의 통일을 절감한 대한의용군사협회, 한족회, 민국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대한광복군으로 개편하였다. 대한광복군은 남북 만주 교민들의 통치기관인 광복군참리부와 남북 만주 군사기관인 광복군사령부로 나누어 설치되었다. 조병준은 민정기관인 광복군참리부 참리부장에 임명되어 협찬 김승만, 내무사장 신우현, 법무사장 신언갑 등과 함께 교민들의 생업과 교육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내몽고 항일운동의 개척자

1923년 조병준은 남만주 통의부 통의부장에 피선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이 때 조병준은 일제가 머지않아 만주 침략의 계획을 실현할 것을 예견하고 우선 동지 신우현, 김승학, 백기준 등 10여 가호 80여 명을 인솔하고 내몽고 수원성 포두현 중탄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의 내몽고 이주는 안창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1923년 11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내몽고 포두진은 황하의 상류방면으로 (중략) 평안도 출신의 신우현 외 네 명의 조선 사람이 이르러 삼천여 명의 자금으로 부근의 토지를 사고 살림을 벌리는 동시에 수백 명의 조선사람 단체를 이주케 할 계획이라는데 그들은 본시 조선독립단의 수령 안창호 씨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인에게 자금을 얻어다가 포두진에 근거지를 삼는 중으로...

이 기사에 따르면 조병준 일행은 적어도 1923년 11월 이전에 포두에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이주자금은 안창호가 미주교포들에게서 마련하여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의 이주 배경에 임시정부 안창호가 있었다.

안창호와 조병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내몽고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병준이 안창호가 주도하는 연통제 조직인 평북독판부의 독판으로 활동하였고, 임시정부가 남만주에 민정기구로 설치한 광복군참리부의 수장인 참리부장을 역임했다는 것, 그리고 조병준의 제자인 김승학이 거금을 출자하여 정간되었던 《독립신문》을 맡아 운영한 점 등을 통해 안창호와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안창호는 연해주나 북만주 등지에 농장건설을 물색한 사실이 있었고, 흥사단이라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 농장건설의 의지와 자금을 갖고 있던 안창호가 내몽고의 포두지역을 주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도 내몽고지역에는 일찍부터 한인들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0년 5월 22일자 《독립신문》에 '당시 몽고지방에 거주하는 호수가 67이요 인구가 340명'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 의하면, 1925년 심산은 중국 전 외무총장 서겸(徐謙)의 주선으로 풍옥상 장군을 통해 수원성 포두에 있는 3만 정보의 개간 가능한 땅을 허락받았다. 끝내 개간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무위로 그치고 말았으나 내몽고 지역은 일찍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곳이다.

1923년 무렵의 일제 조사 자료에 의하면 포두는 지리적 자연적 환경이 좋은 지역이었다. 황하의 상류에 위치하는 인구 3만 명 정도의 도시로 땅은 비옥하고 물가는 북경의 절반 정도였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교통도 편리하여 1922년 경수철도가 개통되면서 대동, 장가구를 거쳐 북경과 직접 연결되었다.

조병준 일행이 포두지역에 정착하면서 백기준, 신언갑, 신용철 등 일부 인사들은 포두 시내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나머지 인원은 조병준 인솔하에 포두에서 서쪽으로 120km 떨어진 색등호로두(色登葫蘆頭, 혹은 烏拉特前旗 先鋒鄕 西패頭)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이곳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농지 3백여 향, 약 60만 평을 15년 기한으로 임차하고 이를 개간하여 생활 터전을 삼았다. 개간한 땅에는 배달농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배달농장 외에도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을 설립하고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대종교를 신봉하게 함으로써 배달민족의 얼을 심어 주었다.

▲ 배달농장

포두 시내에도 거점을 마련하였다. 조병준의 아들 조종서와 제자 백기준, 신언갑, 신용철 등은 모두 시내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교통이 편리한 시내를 중심으로 대외연락과 통신 등의 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용철은 병원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이들이 건립한 한인촌의 규모나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한인촌을 다녀간 황학수의 회고록에서 당시 포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 차처는 한인 수백 명이 자작 일촌하야 황지를 개척하고 규모있게 생활하는데, 황토로 삼위의 제단을 건축하고 춘추로 동중 남녀가 회집하여 제사를 드리는데 제1위는 단군황조이시고, 제2위는 고구려 태조 주몽이시며, 제3위는 이조충신 임경업 장군이시더라.

황학수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1934년 경 이었다. 이때는 조병준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조종서가 중심이 되어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포두지역의 한인촌은 그 규모가 작지 않았던 것 같고 민족의식이나 질서도 정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인촌을 건설한 조병준 일행은 이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임시정부 직할의 의민부이다.

의민부의 인사들은 조병준의 인척과 지연 및 학연관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대부분 평북 의주 출신이었고, 김승학, 백기준, 신언갑 등 대부분이 조병준의 제자들이었다. 부총재 신우현은 조병준의 처남이었다. 그는 일찍이 증곡재를 건립하고 조병준을 초빙하여 평안도 일대의 수많은 청년들을 지도한 이래 평생 함께 활동한 동지이기도 했다. 조종서와 조운명은 조병준의 아들과 딸이며, 오용덕과는 사돈관계가 된다.

의민부는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미 서간도에서부터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내몽고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도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던 안창호와 협의하고 그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내몽고에 생활터전을 마련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의민부가 임시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김승학의 「망명객행적록」에 따르면, 의민부는 임시정부의 직할 하에 두었으며 농장의 수입금을 임시정부 자금과 교통 연락비로 연 2회씩 제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민부가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자료가 있다. 먼저 조병준의 문집 원고가 김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김승학은 북경에서 비밀기관을 설치하고 임시정부와 남북 만주의 비밀연락을 맡았던 일이 있었다. 이때 남경으로 가는 김희남에게 독립운동 비밀문서와 함께 조병준의 문집 원고를 김구에게 보냈다. 비밀문서와 조병준의 문집은 김구에게 전달되었고 환국 후 조병준의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또 하나는 포두에 있던 인사가 남경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글을 기고한 것이다. 김구의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하던 《한청(韓靑)》제1권 제5기, (1936년 12월 15일 발행) 잡지에 몽암(夢巖)이란 필명으로 「투쟁과 진리」라는 글이 연재되었는데, 이 글은 불붙어 드러가는 수원 포두에서 보낸 것이었다.

조병준의 문집 원고가 인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된 것, 포두에 있는 인사의 글이 남경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 것 등을 보면, 내몽고 포두 지역과 임시정부 사이에 연락관계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민부는 중국 국민당과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1년 10월 2일 조병준은 포두현 중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였다. 유해는 제자들에 의해 고국으로 옮겨져 의주군 월화면 주음동에 안장하고 묘비를 건립하였다.

조병준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최진숙(최준), 신언갑, 조종서, 김운봉 등 4인이 의민부를 7년간 계속 이끌다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이 지역에 침입해 들어오자 해산하고 말았다.

조병준은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을 비롯하여 서간도 대한독립단의 지도자로, 임시정부 연통제 기관인 평북독판부 독판으로, 또한 남북 만주의 임시정부 민정기관이었던 광복군참리부의 수장인 참리부장으로, 의민부의 총재로서 참으로 폭넓게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독립운동의 영수로 그 공적이 실로 높다하겠다.

저서로는 「묵초(墨草)」6권, 「광복운동사」, 「친술소사(親述小史)」1권 등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중일전쟁 중 제자였던 김승학을 통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전달되었다. 김구 주석은 이 자료를 장사, 중경 등지로 전전하면서도 정성껏 보관해 오다가 해방으로 귀국한 후 유족에게 안전하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가족들이 고향에서 월남할 때 북한 당국에 의해 압수당하여 끝내 출판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병준의 유족으로 장남 조종서가 있는데 그는 의병단 시기부터 만주 관전현 대한독립단, 광복군참리부, 포두현 의민부 시기까지 선친인 조병준을 보좌하다가 선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는 해방 후 환국하였다가 월남하여 1954년 별세하였고, 차남 조명서는 광복군사령부 연락원으로 활동 중 1924년 반대파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었다.

장녀 조의명은 수원 백씨 백의범에게 출가하였다. 백의범은 광복군사령부 교통사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친일 부호 김종희의 밀고로 의주군 비현면 광상동 조시목의 집에서 일제 경찰이 습격을 받아 동지 고득수 등 4명과 함께 교전하다가 전부 전몰하였다.

차녀 조운명은 신의주에 거주하던 진주 김씨 김운봉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후에는 남편과 함께 만주로부터 포두현까지 부친을 따라와서 의민부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였다가 1968년 별세하였다. 후손들은 서울과 경기 일원에 거주하고 있다.

조병준에게는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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