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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의 독립운동가 <홍언>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3.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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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 [1880-1951]

■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95년

■ 공적개요

ㅇ 미주 한인합성신보,신한민보 주필,사단에서 활동
ㅇ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교민사회 지도
ㅇ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미주 민족운동의 파수꾼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미주 한인합성신보, 신한민보의 주필 및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교민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홍언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생이 사망한 뒤, 미주사회에서는 선생을 고결한 참된 애국자이며, 평생을 언론기관을 위해 힘썼으며,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한 작가ㆍ시인ㆍ평론가로 평가하고,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한 인물로 기억하였다.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시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가로 수십 년 봉사하였다. 또한 선생은 『신한민보』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을 발표하는 등 언론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단우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 문필로 그만큼 공헌한 인물은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화교들과 교류하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데 기여하였다. 여러 차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와 페루 등 중남미를 순방하여 화교들에게 한국독립운동 지원금을 모금하였던 것이다. 중국화교들과의 친분은 재정지원 이외에도 한중연대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여 만보산사건 당시 그러한 선생의 노력이 크게 부각되었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미주 한인단체인 국민회 역사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완성되지는 못하였지만, 선생이 『신한민보』에 1944년부터 1년간 「국민회약사」를 50여회 연재하였으며, 1949년에도 다시 연재를 시도한 것으로도 짐작되는 일이었다. 이미 1910년대부터 선생은 국민회 역사의 정리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다양한 활동은 미주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의 파수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1951년 별세 후 선생은 로스앤젤레스의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언은 누구인가

홍언(1880-1951)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1900년대부터 1950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가깝게 미주한인사회에서 홍언은 언론인과 문학가, 역사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또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홍언이 사망한 뒤, 『신한민보』 1951년 4월 19일자에는 「고 동해수부 홍언 선생 영전에」라는 추도사가 델라노 한 농부라는 필명으로 실렸는데,선생은 고결한 선배였고 참된 애국자였다 그 평생을 우리의 언론기관을 위하여 힘서 왔고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하던 작가요 시인이요 평론가였다 자기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하면서 오직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사회와 나라 뿐이었다 선생의 일평생 생활은 대단히 의로웠고 또 바쁘셨다.

라고 그의 일생을 평가하였다. 그가 고결한 선비요 애국자로 평생 『신한민보』에서 봉사하였으며, 한국문화를 알리는 문인이었음이 당시 미주한인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다.

홍언은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자와 기고가로 수십 년 봉사하였다. 『신한민보』를 보면 50년 가깝게 동해수부라는 필명으로 논설을 비롯하여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 보이는데, 바로 그것이 홍언의 글이었다. 또 그는 대한인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단우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 문필로 그만큼 공헌한 인물은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교들과 교류하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데 기여하였다. 여러 차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와 페루 등 중남미를 순방하여 화교의 독립운동 지원금을 모금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95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그러한 점에서 홍언은 미주한인사회 반세기 민족운동의 증인이고 파수꾼이었으며, 그의 생애와 활동은 미주한인사회 움직임을 이해하는 첩경이기도 하였다.

하와이에 가기까지

홍언의 본명은 종표(宗杓)였다. 그가 1913년 흥사단에 가입하며 남긴 이력서가 남아 있어, 명확하지는 않지만 초기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력서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출생 : 1880년 2월 27일
출생지 : 서울 남부
거주지 : 1880-1984 서울 남부, 1894-1902 광주 및 춘천, 1902-1904 중국 각지, 1904-1911 미령 하와이, 1911-현재 미주 샌프란시스코
직업 : 1886-1896 가정 수학, 1902-동년 12월 양지사무소, 1903-1904 사숙에서 교수, 1904-1907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1907-1908 자강회보 편집, 1908- 1909 합성신보 편집, 1909-1910 신한국보 편집, 1911-1912 신한민보 편집, 1912-1913 인쇄역
단체 : 1907 하와이 자강회, 1908 합성협회, 1909 국민회, 1909[1910] 대한인국민회, 1909 하와이 한인기독교청년회
종교 : 1907 예수교 학습인, 1908 수세

이력서에 의하면 그는 1880년 2월 27일에 서울 남부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회갑이 1941년 3월 23일이어서, 당일 로스앤젤레스 흥사단 집회실에서 회갑연을 여러 단체가 참여하여 가졌다고 『신한민보』가 보도하였다. 이날은 음력으로 신사(辛巳)년 2월 27일이었다. 본인이 1880년생으로 기록하였지만, 1881년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11년 미주 본토로 이주한 이후에 언(焉)으로 개명한 그는, 동해수부와 추선이라는 필명을 주로 사용하였다. 1940년대에는 해옹이라는 필명도 종종 사용한 바 있다.

홍언이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선대의 고향은 경상도 영덕(盈德)이 아니었나 한다. 그의 장형이 1913년 현재 영덕에 거주하였으며, 국내에 남아 있던 부인도 영덕에 거주하였다는 사실은 그 가문이 영덕에 토대를 두고, 서울로 이주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사용한 필명이 바다와 무관하지 않은 것도 그렇다. 그가 한학에 밝고 부형들이 벼슬에 나아간 사실이 없는 것으로, 서울 거주의 영덕 지역의 잔반 출신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력서에 따르면 10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1894년부터 1902년까지 거의 10년을 광주와 춘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혹 처가 쪽과 관련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는 10대 후반까지 10년을 가정에서 전통유학을 수학하고, 20세 전후 광주와 춘천에서 농사를 짓거나 여러 분야의 학문을 독학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가 미주에서 많은 글을 쓸 수 있던 박람강기한 소양이 이 어간에 준비되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1902년부터 두어 해 중국에 가 있던 것으로 이력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902년 한 해 양지사무소에 관여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국내에서 양지(量地)와 관련되어 설립된 각종 교육기관과 강습소에서 관련 교육을 받고 짧은 기간 이 일에 종사하였을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그는 1902년 말에 중국으로 건너가 1년여 사숙에서 교수하지 않았을까. 그가 후에 미국에서 화교들과 가깝게 지내고 중국어도 하였던 사실로 짧은 기간이라도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교유한 경험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중국어 역시 짧은 중국 체류기간에 습득하였다기보다 국내에서 어느 정도 익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많이 이주해 있던 간도 지역에서 2년을 생활하였으리라 짐작하기도 한다.

하와이에서 노동과 편집에 종사

▲ 1909년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건원절 기념,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1904년 홍언이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왔을 때, 도착시기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넷째 형인 홍경표가 7월 30일에 도착한 것으로 나타나므로, 그 역시 형과 같이 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가 어떠한 이유와 과정을 거쳐 하와이로 건너오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오랜 친구인 백일규가 추모시에서 서양문명을 수입코자 미국에 온 것으로 도미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서양문명을 배우고자 한 점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결혼한 그가 부인은 국내에 놔두고 혼자 하와이에 온 것으로, 혹 처음에는 하와이에 오래 거주할 생각이 없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가 부인과의 사이에서 소생이 없었고, 이후 부인을 미주로 이주시키지 않은 점은 여러 가지 추측을 가능케 한다.

1904년 7월 하와이에 도착한 뒤, 이력서에 의하면 홍언은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강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고 한다. 실제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의 기관지로 『대한자강회 포와부지회월보』가 간행된 것이 1907년 9월 20일이었고, 엘리엘리의 홍종표와 고석주가 편집을 맡고 있었다. 이 월보의『회보』에 따르면,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는 1907년 3월 31일 발기되었는데, 주도적 인물이 홍언의 형인 홍경표였다. 홍언 즉 홍종표는 1907년 12월에 창간된 『자신보』의 편집에도 관여하였으며, 이어 하와이의 한인단체들이 합동하여 결성된 한인합성협회에서 1907년 10월 22일자로 창간한 주간지 『합성신보』의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또 이 신문이 미주와 하와이 한인단체가 통합되자 『신한국보』로 개제되어, 1909년 2월 12일자로 발행된 창간호에 홍종표가 발행 겸 편집인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1904년 7월 하와이에 도착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만 3년 정도 일하던 그는 1907년 중반 이후 잡지와 신문의 편집을 전담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가 이력서에 기재한 대로 하와이에서 자강회에 참여하였다가, 합성협회로 통합되자 합성협회에 관여하고, 이어 국민회와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5월에는 국민회 호놀룰루지방회의 학무원으로 선임되고 있었다.

홍언이 편집사무를 맡은 것은 그가 하와이 이민자들 가운데에서는 학문과 문장이 높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10여년 한학을 수학하고 사숙에서 교수하는 등 유학을 공부한 그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민사회에서 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즉 1907년 기독교 감리회의 학습을 받고 그 다음해에 세례를 받았으며, 1909년 하와이 한인기독청년회에 입회하였다. 하와이에 노동이민으로 발을 딛고 미주생활을 시작한 홍언은 3년 정도 엘리엘리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교민사회의 언론활동을 담당하면서 호놀룰루로 옮겼으며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1911년 8월 홍언은 『대동위인 안중근뎐』을 국문으로 저술하여 신한국보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장군으로서의 안중근을 부각시켰다. 이 전기는 하와이에서 적은 자료를 가지고 엮은 짧은 전기이지만, 홍언이 역사가로의 출발을 알리는 저술이기도 하였다.

『신한민보』와의 인연

1911년 11월 홍언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취임하여, 수십 년에 걸치는 신한민보사와의 관계를 시작하였다. 홍종표라는 본명을 홍언으로 개명한 그는 동해수부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1912년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상항지방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신한민보』 1912년 1월 15일자부터 폴란드의 사적을 소설화한 「미인심」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소년서회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한민보사 주필을 맡은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12년 3월 사무원 강영소와 함께 북미지방총회에 사표를 냈고, 6월에 퇴사하였다. 이 일로 그는 몸과 마음이 피폐하여,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만나 존경하게 된 안창호에게 편지로 어려움을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주필로 15호의 신문을 발간하는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신한민보』는 재정난으로 그해 12월 9일자를 간행하고 정간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소년서회도 문을 닫고 매각하였다. 그는 『신한민보』가 복간된 이후, 가끔 주필 부재 시에 신문 편집을 대리하였다.

신문사 주필을 그만 둔 홍언은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1913년 9월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교회활동에 적극 나서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의장으로, 또 북미지방총회의 학무원과 상황지방회 대의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도 계속 신문에 글을 발표하며, 새로운 일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안창호가 추진하던 흥사단의 창립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1913년 4월에 그는 안창호에게 3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모두 흥사단의 창립준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1913년 5월 13일에 창립된 흥사단의 창립위원장으로, 경기도를 대표한 제7단우로 참여하였다.

▲ 홍언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4년 7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주필을 맡던 이대위가 건강으로 주필직을 사임하자 백일규가 주필로 초빙되었다가, 1915년 1월 백일규가 캘리포니아대학교로 편입하며 주필직을 사임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대위와 홍언이 다시 신문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홍언은 이대위와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두 사람의 성격적인 차이도 있었으나, 이대위가 흥사단우들과 마찰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두 사람은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와 신자였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회장과 총무로도 여러 해 활동하며, 『신한민보』를 2년여 함께 편집하는 처지였으나 관계가 밀접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홍언은 1915년 초부터 신한민보사의 편집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년마다 연장되어 1919년 1월까지 재임하였다. 동시에 그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직도 겸하고 있었다. 1915년부터 계속된 신문사 편집인 일과, 국민회 임원 활동은 그의 심신을 피곤하게 하였다. 1917년과 1918년에 일시 병을 앓아, 1919년 1월에 신문 편집의 일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1918년 현재 그가 신한민보사에서 받은 봉급은 연봉 720원이었으므로, 월급은 60원이었다. 『신한민보』 제1,000호 기념호인 1928년 11월 18일자의 「본보 편집인의 선배들」에 따르면, 홍언은 이대위와 함께 1915년 1월부터 12월까지, 이어 단독으로 1916년 1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신한민보사의 편집인으로 일하여 만 4년을 편집인으로 일한 것이었다. 신문사의 주필을 1915년부터 편집인으로 지칭하다가, 1918년에 이르러 다시 주필로 지칭하였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1919년 국내에서 3ㆍ1운동이 발발한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등 독립을 향한 한국민의 민족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고, 미주에서도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북미지방총회는 동포들에게 독립의 소식을 속히 알리고자 『신한민보』를 1주에 3회씩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홍언은 신한민보사를 그만 두고 4월 초 휴식을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고 있었다.

4개년 동안을 간단없이 신한민보의 붓대를 잡고 우리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전 신한민보 주필 홍언씨는 그 뇌력이 실히 피곤함을 인하야 얼마동안 쉬기로 작정하고 작일 하버드 선편으로 로스앤젤레스에 향하였는데 홍 선생은 원래 하와이 있을 때부터 오늘까지 10여 성상에 국민회의 사업을 위하여 열심 성력을 다하던 터인데 오늘에 얼마 동안 휴가는 10년 동안에 처음이라 하며 어느 때에든지 중앙총회에 일이 있어 부르게 되면 곧 오겠노라고 하더라. (『신한민보』 1919년 4월 8일자 「전 신한민보 주필의 남방행」)

신문기사의 언급대로 홍언은 1907년 하와이에서부터 1918년까지 직접ㆍ간접으로 신문편집과 국민회를 위하여 10여년 봉사해 왔다. 심신의 피곤함에도 그는 제대로 휴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1919년에 이르러 일시 휴양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총회가 부르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말대로, 열흘이 지나지 않아 그는 중앙총회의 부름을 받아 돌아오고 말았다.

미국화교와 동포에게 독립운동 지원금 모금

중앙총회에서 1919년 4월 6일 중국인에게 독립자금 모집을 위하여 유세원으로 홍언을 비롯한 4인을 선정하자, 4월 18일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모금방안을 협의하였던 것이다. 6월 홍언은 강영각과 함께 스탁톤에서 중국인에게 환대를 받으며 모금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는 7월 이살음, 김여식과 함께 신한민보사의 명예기자로 선임되었다. 아울러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대한인국민회의 역사를 정리하여 보내라는 지시가 있자, 그가 역사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야만 하였다. 이미 그는 국민회 역사에 관하여 1914년 2월 1일 제5회 창립기념일에 연설하고, 그 내용을 『신한민보』에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가 국민회 역사를 정리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민회 역사 편찬 작업을 하면서 그는 다시 신한민보사의 편집인으로 일하였던 것 같다. 1920년 3월 신문사의 출판변경으로 편집인을 그만두고 퇴사하였기 때문이다.

홍언은 신한민보사의 편집인을 사임한 뒤, 화교위원으로 3월부터 다시 중국인에게 독립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여행에 떠났다. 그러나 5월 중앙총회에서는 그를 소환하였는데, 그것은 임시정부의 지시로 공채표를 발행하게 되어 취해진 조치였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은 이후에도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홍언은 1920년 6월 루이지니아주 뉴올리언스에서 마약조사당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모금을 위하여 뉴올리언스에 가있던 그에게 샌프란시스코 거주의 중국인이 우편물을 보냈는데, 그 안에 마약 1파운드가 들어있는 것을 조사당국에서 확인하여 그를 기소한 일이었다. 홍언 자신은 이를 전혀 몰랐고,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법학박사인 강영승이 현지에 도착하여 도움을 주어 결국 무죄 석방되었다.

홍언의 미주 화교를 대상으로 한 모금활동은 1921년과 1922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구미위원부에서도 그를 1921년 1월 21일자로 캐나다 서방을 담당하는 화교위원으로 위임하였다. 이미 그는 1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선편으로 시애틀로 발정하여 캐나다를 거쳐, 미국 각처에서 모금하고 파나마 등 중앙아메리카를 순방하고, 8월에는 남미의 페루에 도착하여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신한민보』는 1921년 9월 29일자의 「홍언위원의 대활동」이라는 기사에서, 페루 리마에서 발간되던 중국신문에 소개된 그의 활약상을 전재하였다. 각계 중국인들이 한국혁명을 지원하는 찬성발기회를 개최하고 페루의 중국국민당에서는 100원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남미순행은 1922년까지 계속되어, 그가 워싱턴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온 것은 1922년 9월이었다.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1921년 1월부터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중남미 국가를 1년 반 이상을 순방하였던 것이다. 잉카제국의 유적지도 이때 돌아보았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홍언은 곧바로 국민회의 순행위원으로 1개월 여 캘리포니아 남북의 동포들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 역시 국민회의 지지와 자금모금이 주된 목적이었다. 바로 그는 미국화교 뿐만 아니라 동포들에게도 인망이 있어, 자금모집에 나서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미주 흥사단 단소 사진

1924년 전후 홍언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2년 정도 흥사단 본부가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한 그는 흥사단 업무에 진력하였던 것 같다. 중국의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 미국에 보낸 편지들이 그와 송종익을 수취인으로 한 것으로 미루어도 짐작되는 일이다. 마침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안창호가 1년 여 미국에 돌아와 그는 안창호와 재회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는 1925년 11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1926년 2월부터 4월까지 『신한민보』에 「간디주의」라는 번역을 8회 연재하였는데, 비폭력주의자 간디를 소개한 것이었다. 1926년 6월 전후 그는 돌연 멕시코를 1년 여행하였다. 상업차 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만년필이나 인삼을 팔고자 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1년 동안 멕시코 전역을 돌았던 것이다. 1918년 국민회 중앙총회장이던 안창호가 멕시코를 여행하며 그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를 통하여서도 멕시코 동포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또 1920년대 초 중남미 여행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로스앤젤레스로 거쳐 1927년 10월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한 그가 바로 『신한민보』에 20회 연재한 「꿈결에 반긴 재묵동포」는 멕시코의 동포상황과 견문을 소개한 여행기였다.

다양한 문예활동

1924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3명의 발기로 이문회(以文會)가 조직되었는데, 신문화ㆍ신문예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오천석이나 한치관ㆍ한치진 형제와 같은 유학생도 참여하였고, 강영승ㆍ김현구ㆍ백일규ㆍ신두식ㆍ홍언 등이 함께하였다. 이문회의 목적은 미국 재류의 문예를 즐기는 인사들이 모여 문예상의 감식과 한인사회의 교화에 공헌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튼 홍언은 재미한인사회 문예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홍언은 1910년대부터 40년 동안 『신한민보』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소설과 희곡, 시가와 수필, 비평 등 많은 장르의 글을 발표하였다. 미주에서 그만큼 다양한 형식의 문예활동을 전개한 인물은 없었다. 「미인심」ㆍ「철혈원앙」ㆍ「옥란향」 등의 소설, 「동포」 등의 희곡을 비롯하여, 수백 편의 시가며 「시인론」ㆍ「애국지사의 노래」 등의 비평이 쉽게 찾아지는 그의 작품들이다. 또 사화며 전기, 기행문 등과 「동국염향록」ㆍ「조선기생시화」 등의 시화도 남기고 있었다. 특히 가사를 통하여 고국의 산하를 추억하고 그리기도 하며, 기행의 감회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이민지 문학의 대표적인 예로 논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홍언은 한시와 한문으로 쓴 논설과 문예작품을 미주에서 발행되던 중국신문에 발표하여, 중국인들에게도 그의 문학적 소양을 널리 알린 바 있었다.

▲ 대한협회보와 홍언 훈사

미주한인의 단결을 주장

1920년대 후반에도 홍언은 국민회 총회 또는 상항지방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한민보』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총회장 백일규를 도와 국민회를 이끌던 그는 종종 백일규와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백일규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경제학사를 받고 『한국경제사』를 간행한 학구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총회장을 맡고 『신한민보』를 책임지면서 친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청년들의 글이 신문에 적지 않게 실렸다. 백일규는 1940년대에 좌파세력을 지지하여 국민회를 떠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관여하며 그 기관지 『독립』의 간행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홍언은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소장층의 주장을 비판하였으며, 오늘 우리 민족의 시비와 분쟁은 일이 없어서 시간이 많아 그런 것이니 누구든지 먼저 주의를 확정하고 아울러 성공의 방략을 세워 사업의 길로 나아가 성공의 실상을 보이고자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주의의 확정-주의의 실현-주의의 통일(대동단결)을 민족사업의 순서라고 확언한 그는 나아가 미주한인단체를 새롭게 구성하는데 적극 찬성하였다. 1931년 4월 재미한인통일촉진의견서 가 발표되었는데, 그는 그 연구위원으로 이 일에 적극 참여하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줄곧 민족주의자임을 내세우면서 미주한인의 단결을 주장하고 있었다.

한중합작의 주장으로 화교에게 이름 높아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홍언은 화교를 대상으로 한중합작을 주장하는 논설을 화교신문에 발표하면서, 그의 문명을 널리 알렸다. 뒤에 이 사실을 소개한 『신한민보』의 기사를 보면,

1931년 만주사변 당시부터 [홍언]씨는 상항에서 발행하는 중국인의 5종 일간신문을 통하야 토문과 시로 한중합작을 제창하며 망한의 사적을 원용하야 중국민을 경성하며 열렬한 정신으로 애국열과 항일심을 고취하며 또 고려통신사의 명의로 한국혁명운동의 사정과 인물을 소개함을 하루같이 꾸준히 하여왔다 그리하여 상항 중국인 타운에서는 척동 유부까지라도 고려인 홍언 을 모르는 이가 없으며 상항에서 발행하는 중국신문이 해외 화교계에 크게 세력이 있으니 만치 홍언씨의 문명도 캐나다 호주 쿠바 멕시코 등지의 화교계에 널리 퍼져 비범한 문장과 열렬한 한 정신을 탄모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교사회에서 씨를 원일견지하야 초청하는 곳이 많으며 또 한 곳에서 도 여러 번식 요청하였으나 아직 가보지 않았는데 금년에는 우선 가주 몇 곳을 다녀보기로 하였다더라 (『신한민보』 1935년 9월 5일자 「홍언씨 출촌」)

고 하여,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화교신문에 애국심과 대일항전을 주장하는 글로 화교계의 저명인사였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중국인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각지에서 그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한중연대를 내용으로 한 글을 지속적으로 중국신문에 발표하였던 그는, 미주에서 문장보국 으로 한중합작을 이루어낸 공로자이기도 하였다.

1935년 9월에 시작된 그의 여행은 화교들의 초청에 응한 것이었는데, 캘리포니아 여러 지역과 오리건을 1, 2개월 정도 순방하기도 하였지만, 몇 개월 뉴멕시코와 애리조나를 거쳐 텍사스까지 다녀왔다. 1937년 초까지 계속된 그의 여정에서 얻어진 감회는 『신한민보』의 지면에 시나 시조로 발표되곤 하였다.

1930년대 중반 미주한인사회는 여전히 분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였으며, 국민회도 재정곤란을 맞고 있었다. 아울러 초기 이민자들이 노쇠하여 생활력이 없는 경우가 증가하였고, 2세 청년들이 단결되지 못하여 독립운동에 무관심하고 한인사회에 일정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홍언은 이러한 현실을 자주 논의하였는데, 1936년 5월 국민회에서는 캘리포니아 각지의 대표들을 초치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노인구제ㆍ2세 교양ㆍ임시정부 후원을 목적으로국민회 발전책 간담회 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홍언은 이 간담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민족적 공의로 국민회에서 민중의 역량을 모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안창호와 홍언

▲ 도산 안창호 선생

1938년 3월 10일 국내에서 안창호가 순국하였다. 홍언은 1월에 국민회 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가 1개월 동안 애리조나를 여행하던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신한민보』에 안창호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만장을 지었다.

철인이 가시니 강산이 홀연히 의로워 거국이 같이 슬퍼하오며
정신이 계시매 일월이 영원히 비추어 민족의 앞길이 밝아지도다

홍언은 안창호의 순국을 슬퍼하며 보내온 각처, 각인의 조전ㆍ만장ㆍ애가ㆍ추도사 등을 모아 영애록를 편찬하였다. 그가 마음으로부터 존경한 안창호가 순국한 뒤, 그는 안창호 가족이 살던 집을 찾아 「도산의 꽃동산」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며 안창호를 기리곤 하였다.

홍언이 안창호와 처음 만난 것은 1911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오면서였고, 그는 안창호의 인격과 주장에 감복하여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창립을 주관하였다. 흥사단 본부가 로스앤젤레스에 있어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그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만나곤 하였다. 안창호의 첫 딸이 태어나자, 그는 수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1919년 중국으로 떠나기 전, 안창호는 그에게 국민회 지도자들과의 협조를 부탁하였다. 1924년 12월부터 1년여 안창호가 미국에 돌아와 머문 동안, 마침 홍언도 로스앤젤레스에 있어, 안창호가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때에는 매일 만났을 것이다. 안창호는 미국 전역을 순방하며 독립운동을 역설하며 한인사회를 지도하였다. 1926년 3월 중국으로 다시 떠난 안창호와 이별한 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물론 그는 중국에 있던 안창호와 편지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안창호는 잘 알려진 대로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에서 일제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8년 순국하였다. 안창호 사후에도 그는 안창호 가족과 긴밀하게 지내며 관심을 쏟았다.

20년 만에 다시 맡은 『신한민보』의 주필

1938년 9월 홍언은 다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그는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서기를 맡아 국민회 회무를 보며, 『신한민보』의 편집도 지원하고, 안창호의 서류를 정리하였다. 1년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가 중국신문사를 역방하며 그들의 관심과 해후의 감회를 적을 만큼 화교들 사이에서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1940년 1월 홍언은 여전히 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서기를 맡으며 신한민보사의 주필에 선임되었다. 1920년 편집인을 사임한 이후 20년 만에 다시 『신한민보』 발간의 책임을 맡은 셈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종종 신문사 주필의 부재 중 신문편집을 담임하였고, 1939년 1월부터 주필 최진하를 도와 이창희와 신문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가 60세의 나이에 연봉 600원의 정식 주필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1940년대 홍언은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의 활동을 널리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김구의 『백범일지』 상권의 필사본과 『도왜실기』가 미국에도 전하여져, 그는 김구의 사적을 잘 알았다. 특히 그는 김구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하였음을 가리켜, 공을 드러내지 않은 옛 중국의 장군에 빗대어 대수장군(大樹將軍)으로 소개하였다. 시로 김구에 대한 지지와 존경을 표시한 홍언은 「한국혁명당 령수 김구 사략」을 중국신문에 기고하였고, 그것을 다시 『신한민보』에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었다.

1940년 9월 국민회가 주도하여 단체합동과 단일당 조직을 제안하였고, 하와이에서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가 해외한족대회를 소집하였으며, 대회 결과 1941년 6월 재미한인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항일전선 통일ㆍ임시정부 봉대ㆍ군사운동ㆍ대미 외교기관 설치ㆍ독립금 모금 등을 내세우고 활동하였는데, 점차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부와 갈등이 발생하였다. 한시대ㆍ김호ㆍ전경무 등 국민회 세력은 이승만의 독선적인 횡포에 반발하여 임시정부에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를 요구하지만,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이에 반발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임시정부와 김구를 비판하면서, 국민회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구를 지지해 온 홍언은 1943년 6월 연로하여 중책을 맡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신한민보사의 총편집인으로 이정근을 선임하였다. 대신 홍언을 명예기자로 선임하여 국민회의 기록존안과 통신사무를 맡겼으며, 『신한민보』의 편집에 협조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20년 만에 다시 맡았던 주필직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말았으나, 1945년 9월 이정근이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전기학 실습을 위하여 워싱턴으로 떠나자 그가 다시 주필을 맡게 된다.

▲ 신한민보

해방과 은퇴, 그리고 사망

1945년 8월 그토록 기다리던 고국의 해방이 찾아왔다. 미주에서는 고국방문단을 조직하여 수십 년 만에 고국을 찾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신한민보사의 주필을 다시 맡은 홍언은 그도 고국방문단에 포함될 줄 알았으나, 민족운동의 공로보다 여비와 숙박비를 마련할 수 있는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방문단이 구성되었다. 평생을 민족운동에 헌신한 그는 그러한 현실을 비관할 수밖에 없었다.

홍언은 『신한민보』 1949년 1월 27일자에 「신한민보의 붓을 놓으며」라는 퇴임사를 쓰고 주필직을 내놓았다. 미주한인으로서의 역할과 조국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당부한 그는, 1911년부터 1949년까지 주필 또는 편집인으로 10년 넘게 재임하였고 필요할 때마다 신문편집을 맡으며, 40년 가까운 세월을 『신한민보』의 집필자로 활동한 그의 공식적인 활동에 마무리를 지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간간히 추선 이나 해옹 이라는 필명과 홍언의 기명으로 신문에 글을 게재하였다. 특히 김구 암살사건 이후 「김구사략」을 연재하다가 중단하였으며, 「가주기행」이라는 제목의 기행시조를 연재한 바 있었다. 홍언이 은퇴한 뒤에는 백일규가 많은 시사평론을 발표하여, 그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는 여전히 오전 6시면 국민회관에 나와 신문의 편집에 간섭하며 지냈다. 동맥경화증과 진행성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1949년 말 뇌일혈로 쓰러진 뒤, 병고에서 1951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은 성대하였고, 묘비는 준비되다가 세워지지 못하였다. 다만 그 공동묘지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 대부분이 묻힌 곳으로, 후손이 없는 그의 영혼이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장보국을 실천한 지사적인 삶

홍언은 1904년 형 홍경표와 함께 하와이에 이민에 온 이후, 혼자 생활하였다. 홍경표도 1910년대 중반 이후 전혀 자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국내로 돌아갔거나 사망하였을 것 같다. 따라서 그는 국내에 부인이 있었지만 미국에서 단신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흥사단우인 하상옥의 딸 소정을 양녀를 삼았는데, 하소정은 줄리아드 음악학교와 뉴잉글랜드 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였다. 그는 하소정을 아끼며 자랑스러워하였고, 그녀도 홍언의 회갑연을 마련하는 등 양부로 잘 모셨다.

홍언은 직선적이고 성격이 급하였던 모양이다. 잔정은 많지만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가 총회장이던 이대위나 백일규와 많이 다툰 것도 성격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술도 좋아하였다. 혼자 오래 살고 연로해지면서 그러한 까다로운 성격은 연하의 후배들에게는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취미도 특별한 것이 없었고 동양의학에 관심이 있었고, 글과 글씨를 쓰고 낚시를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 들려 15년 전에 사망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이대위의 집을 방문하여 미망인을 위로하는 모습에서, 그의 따스한 속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평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사로움을 버린 지사적인 삶이었다. 해방되기 이전까지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의 역할과 그 영향력은 다른 단체나 신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둘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는 불행한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그의 문장보국의 자세는 기억하는 이들의 전범이 될 것이다.

역사가 홍언

홍언은 미주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문사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제일의 역사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1911년 『대동위인 안중근전』을 간행한 이래, 『신한민보』를 통하여 많은 사화와 전기, 그리고 그와 함께 동역하거나 한인사회에 공헌한 많은 인물들의 약사를 소개하였다. 이갑ㆍ윤봉길ㆍ안창호ㆍ마포삼열ㆍ김구 등에 관한 전기를 비롯하여, 이대위ㆍ강영소ㆍ문양목ㆍ조성학ㆍ임정구ㆍ김순권ㆍ천세헌 등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원규ㆍ이새미 등과 같이 미국사회에 공헌한 동포들도 소개하였다. 또 「조선기생시화」 등을 통하여 한국 고전시가를 알린 점도 부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홍언이 주목하고 정열을 불태운 것은 국민회의 역사였다. 1944년부터 『신한민보』에 연재한 「국민회약사」는 그가 혼신을 다하여 마지막 정열을 바친 작업이었다. 그는 1914년 이래 국민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수집하였으며, 국민회 창립기념일을 전후하여 글이나 강연으로 그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 『신한민보』 1944년 2월 3일자부터 1945년 3월 1일자까지 52회를 연재하고, 이어 1949년에 2회를 더하여 총 54회를 연재한 「국민회약사」는 1910년 국치에 대한 저항까지 서술하고, 멕시코 메리다지방회의 성립과 북미지방총회를 논의하다가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다.

홍언은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그와 더불어 미주한인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 역사가였다는 점은 그동안 간과되어 왔다. 그는 미주한인사회의 제일의 문인이면서 역사가였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 1910년 샌프란시스코, 가운데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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