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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의 독립운동가 <나태섭>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3.28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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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섭 [1901-1989]

■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77년

■ 공적개요

ㅇ 군사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군 준비
ㅇ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간부로 광복군 모집활동 전개
ㅇ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광복군의 군사활동 지원

한국광복군 창설의 숨은 주역 나태섭(羅泰燮)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군을 준비하고, 광복군 제2지대 간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광복군의 군사 활동을 지원한 나태섭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01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중동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 후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뜻을 품게 된 선생은 이듬해 졸업 후 안악군 봉삼학교 교사로 재직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을 다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과 더불어 동지 포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3년 활동이 탄로나 원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 독립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독립운동 간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4년 8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재학 중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독립군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 보병과 졸업 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된 선생은 같은 해 7월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대일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활동, 친일분자 및 일본인 정보원 처단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전시체제에 대한 대비와 보다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로 군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선생은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군사활동에 관한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최전선인 서안에 파견되어 초모활동을 전개하는 등 광복군 창설의 실질적 준비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및 서안총사령부 부관으로 활동한 선생은 1944년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각종 군사학서적을 편찬하고, 군사법규를 기초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군사위원회 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제정된 예속적인 내용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취소하고 1945년 4월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마련하기까지 광복군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1945년 9월 화중한교선무단에서 활동하면서 화중지역 한인들의 생명보호와 안전한 귀국, 구호활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5월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환국하여,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으로 복무하다 1956년 예편하고, 1989년 5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나태섭은 1901년 12월 16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문산면(文山面) 원성리(遠星里) 576번지에서 부친 나관혁, 모친 김관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관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에는 왕중량(王仲良)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여 본명보다도 왕중량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서울의 중동학교(현 중동중고교)를 입학할 때까지의 성장과정이나 교육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선생은 1920년 3월에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자 일시 고향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학업을 마친 선생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보고 느낀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되찾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이 고향인 안악군의 봉삼학교(奉三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한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선생은 교육을 통해 힘을 기르고 단결하여야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교육구국의 길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봉삼학교는 천주교에서 설립 운영한 학교였다. 1898년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龍門面) 매화리(梅花里) 천주교 본당의 우도(paul oudot, 1865-1913)신부가 천주교 교리와 문맹퇴치를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1899년부터는 45명의 남학생에게 천주교의 교리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여자부도 개설하여 기도문과 한글, 각종 가사 등을 교육하였다. 1907년에 정식 초등 교육기관으로 인가되었으며, 1909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운영되고 있던 학교였다.

선생은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봉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가르쳤다고 판단된다. 이 기간에 선생은 같은 동네 출신인 최익형(崔益馨)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할 동지를 포섭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최익형은 일제가 조작, 확대한안악사건에 연루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인물이었다. 선생은 상해에서 조직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적십자사의 사장인 안정근(安定根)의 지시를 받고 고향 선배인 최익형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고향 마을인 매화동과 안악, 신천, 재령, 사리원 등지에서 자금을 모으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 기간에 또한 선생은 고시복(高時福), 김상직, 권영선, 최한병 등의 동지를 규합할 수 있었다. 선생이 임시정부로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최익형이 일경에게 붙잡히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일경의 검거를 피해 타지에서 장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집안의 재산 일부를 정리하여 1923년 경 원산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자금의 계속적인 모금과 봉삼학교에서의 교육을 고시복 등에게 부탁하고 선생은 원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원산으로 피신한 선생은 계속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 하였다. 그리고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선생의 이런 활동이 일제의 정보망에 탐지되어, 선생은 원산에서의 활동도 어쩔 수없이 정리하고 1927년 5월경 중국 상해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국민당청년단장으로 특무활동을 수행하다

고향인 안악과 재령, 원산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계속하던 선생은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1927년 5월경 국내를 떠나 같은 해 7월 경 망명지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1934년을 전후한 기간까지 활동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상해에 도착한 이후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의 독립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기록이나 자료가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연고없이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의 활동을 기록하여 제출한 공적서에는 상해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이에 대한 추론을 가능케 한다.

선생은 1927년 7월 상해에 도착한 이후 약 6년 여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의 독립운동 단체나 혹은 상해 한국독립당의 드러나지 않는 당원으로 활동하던 중에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게 되었다. 한인특별반 입학은 선생의 생애와 활동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전개하였지만, 한인특별반에 입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게 되면서 김구 계열의 인물로 분류되었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 혹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계기가 되어 설립되었다. 김구가 주도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홍구공원 의거 직후 중국 국민당정부는 비밀리에 김구를 가흥(嘉興)으로 피신시킨 뒤, 김구를 지원하도록 조치하였다. 김구는 가흥에서 피신하고 있던 중에 중국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장개석과의 면담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1933년 봄 남경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장개석과 회담하게 되었다. 이 회담의 결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되었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인특별반 교육생의 사명은 국내 및 남만주 지방의 일본군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침략원흉을 제거하며,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지휘 및 중국군과의 연합을 통한 한국독립의 쟁취었다. 교육생들이 받은 교육 내용은 학과(學科)와 술과(術科)로 나뉘어져 있었다. 학과 교육은 지형학,축성학,전술학,병기학,통신학,중병기학,정치학,각국 혁명사 등이었으며, 술과 교육은 체육,체조,무술,검술,야간연습,야영연습,보병조전(步兵操典),사격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술과 교육은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함께 각종 포와 기관총 등의 조작법을 가르쳤으며 특히 군마 40필을 지원하여 마술훈련도 병행하였다.

선생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제1기생으로 1934년 2월에 입학하여 이범석,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한헌(韓憲) 등의 교관에게서 각종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34년 8월 선생은 한인특별반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한인특별반 운영을 총괄하는 김구와 교육과 훈련을 주관하는 지청천과의 사이에 발생한 불화가 원인이 되어 김구가 한인특별반 입교생 중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인물 25명을 1934년 8월에 한인특별반에서 남경으로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선생은 김구의 주선에 따라 탈퇴한 한인특별반 학생 13명과 함께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여 중국의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한 군관학교에 재학 중 1934년 12월 조직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 결성식에 참여하여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김구의 지도력을 절대 옹호하고 철저한 복종을 규율화함으로써 김구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하는 사조직 성격이 강한 특무활동기구로서 군사적 조직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단체였다. 선생은 특무대독립군의 결성식에 참여하여 본인은 특무대에 가맹하여 김구선생님의 지도와 명령에는 절대복종하며 본 대의 규칙을 엄수할 것을 자에 서약함이라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하였고, 특무대의 참모인 안공근에 의해 제1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선생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중도 철수한 직후 남경의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김구가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항일특무조직인 한국특무대독립군에도 참여하여 제1대장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관학교에 재학하면서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한국특무대독립군의 본부가 위치한 남경성 내 목장영(木匠營) 고안리(高安里) 1호를 방문하였다. 선생은 고안리 1호 특무대독립군 본부에서 안공근에게 세계정세 및 혁명운동 등에 대한 정신교육을 받고, 본부에 비치되어 있는 동아일보, 대판매일신문, 상해매일신문, 《신동아》잡지 등의 간행물, 《도왜실기》, 3.1운동 시 일제의 한인 학살 사진 등을 읽거나 보면서 항일의지를 고취하였다.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보병과(步兵科)를 졸업한 선생은 같은 해 11월 10일자로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제29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새롭게 당선된 의원들에 대해서 심사가 진행되었는데, 선생에 대해서는 나이 37세, 직업 학업, 학식 군교필업, 경력 모지군교를 졸업하고 군사연구를 더욱 하는 중이며 청년계의 신망이 유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나태섭이라는 본명이 아니라 왕중량(王仲良)이라는 이름으로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민병길, 안공근, 안경근, 이동녕, 김구와 함께 신도의원, 즉 새로 임시의정원에 도착한 의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선생은 1939년 10월 3일 개회된 제31회 임시의정원 의회까지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이 기간에 선생은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기 때문에 임시의정원 의회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또한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이 기간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특별 임무, 즉 중국군과 전투 진행지역에서의 일본군의 각종 배치현황 등 정보 수집이나 임시정부의 항일특무공작원의 모집과 같은 별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기 이전 한국국민당의 산하단체로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에 창당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중국 관내에서 또 다시 민족연합전선운동이 추진되었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어 민족연합전선운동을 통한 민족의 유일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는 193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인 한국독립당(상해),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 5개 단체가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활동이 전개되면서 민족유일당의 결성이 구체화되면서 임시정부의 존폐문제가 대두되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한 의열단에서는 임시정부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한국독립당(상해)에서는 이에 대한 당의 견해를 정리하기 위하여 두 차례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1935년 2월 25일에 개최된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폐지론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회의에 불참할 것을 통보하였다. 관내지역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는 한국독립당(상해)이 불참할 경우 민족유일당의 결성에 한계가 있을 것임을 의식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는 지속적으로 한국독립당의 참여를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1935년 5월 25일 임시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 폐지에 대한 입장과 향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회의 참여 여부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 임시회의에서 기존의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회의에 참여하기로 결의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35년 7월 한국독립당(상해), 의열단, 조선혁명당 등이 참여한 민족대당으로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임시정부 폐지론에 끝까지 반대하며 민족혁명당에 불참한 한국독립당(상해)의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이 임시정부의 송병조, 차리석 등과 함께 결성한 정당이 한국국민당이었다. 김구는 한국국민당을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조직 기반을 재정비하였고,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폐지 주장 등에 맞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산하에 청년단체로서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였다. 한국국민당이 독립운동 방략으로 채택한 혁명적 수단에 의한 일제의 박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1936년 7월 11일, 남경 남기가(藍旗街) 8호에서 결성되었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청년들의 혁명역량을 제고ㆍ강화하여 한국국민당의 외곽단체로서 충실한 역할수행과 함께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할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강령과 창립선언서에서 밝히고 있다. 선생은 이와 같은 한국국민당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임되어 한국국민당의 특무활동을 수행하였다. 즉 선생은 한국국민당청년단의 단장으로서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대일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활동, 친일분자 및 일본인 정보원들에 대한 처단 등 임시정부의 옛 경무국에서 진행하던 일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일제의 정보 보고문서에도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각 단원들의 활동에 대해서 《한청》,《전고》,《청년호성》등의 기관지 발행, 중국국민당정부와의 지원과 협조로 대일군사정보수집, 일제의 관공서 파괴, 친일 주구배 처단 등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은 또한 임시정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하유(李荷有), 조시제(趙時濟) 등의 동지와 함께 광서성으로 파견되어 대일군사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과 정찰, 초모공작을 위한 기초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수행하면서 고향인 안악으로 사람을 보내 고향 후배인 고시복 등을 중국으로의 망명을 추진토록 하였다. 1937년 말경에는 중국 관내 각지를 이동 중인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중경(重慶)으로 옮기는 일을 중국 정부와 협의하라는 임시정부의 명에 따라 중국군과의 협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중국군의 차량을 지원받는 등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의 중경 정착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위원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다지다

선생은 1938년 7월 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겸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군사위원회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임시정부에서 전시체제에 대한 대비와 적극적인 군사활동의 필요에 따라 군무부 내에 설치된 임시정부의 군사계획과 정책을 추진하는 군사적 핵심기구였다. 군사위원회 위원으로는 유동열(柳東說),지청천,이복원(李復源),현익철(玄益哲),김학규(金學奎),안공근(安恭根) 등 6명이었다. 안공근을 제외한 5명이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운영하면서 일본군과의 실전 경험을 갖춘 군사인재들이었다. 이들 중 현익철이 1938년 5월에 발생한 남목청사건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선생은 현익철을 대신하여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남목청사건(楠木廳事件)이란 1938년 5월 7일에 중국 장사(長沙)의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서 개최된 민족주의진영 3당(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대표회의에 조선혁명당의 이운환(李雲煥)이 갑자기 들어와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 현익철, 지청천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장사사건(長沙事件)으로도 불린다. 남목청에서 민족주의진영 3당의 대표가 모여 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보다 효과적인 대일항전의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연합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민족대당으로 결성된 이후 계속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민족혁명당의 입장에 반대하는 한국국민당 등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진영 3당으로 한인 독립운동 진영이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국민당의 김구가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이 추진되었고, 중국 각지를 이동하는 와중에서도 1938년 5월 장사의 남목청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민족주의 진영 3당 통합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의가 개최된 것이었다. 이 회의장에 이운환이 갑자기 들어와 김구, 지청천, 현익철, 유동열 등 각 정당의 대표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여 지청천만 경상이었을 뿐,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입고 상아의원으로 후송되었으며 현익철은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이 남목청사건으로 사망한 현익철을 대신하여 선생은 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된 것이다.

선생은 1936년 6월 중국 중앙육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7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선발되기 이전까지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기간에 선생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있었지만 임시의정원 의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여 임시의정원 회의록에는 계속하여 유고의원 내지는 결석의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1938년 7월 군사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후 1939년 10월 3일 개회된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안공근, 안경근과 함께 황해도 출신 의원으로 처음 참석하였으나, 회의록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선생이 어떤 내용의 발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선생은 이에 앞서 1939년 10월 1일자로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주임에는 조성환이 임명되었고, 선생은 황학수ㆍ이웅(이준식)과 함께 선발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수립될 때부터 군대의 편성을 최고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하여 군사간부의 양성과 만주지역 무장독립군단과의 연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 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임시정부가 추구한 군사활동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던 것이며, 군사특파원의 선임도 이런 차원에서 구성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원을 중국의 모(某) 방면으로 파견하기로 결의한 것은 1939년 7월 30일이었다. 1932년 5월 초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직후 상해를 떠나 중국의 각지를 떠돌다 기강에 도착한 직후였다. 중국의 모 방면이란 화북지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화북지역에는 중일전쟁 이후 한국인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화북지역에 진출해 있던 한국국민당의 지하 공작원으로부터 화북지방에 주둔한 일본군 중에는 한국인 사병이 적지 않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를 토대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특파원을 화북지역으로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구체화하려고 한 것이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통해 설치된 군사특파원은 1938년 7월에 구성된 군사위원회의 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주임 조성환은 1939년 당시 군사부장으로써 군사위원회의 책임자였고, 선생과 함께 군사특파원으로 선출된 이웅(이준식)과 황학수 역시 군사위원회의 위원들이었다. 임시정부의 각종 군사정책을 책임지는 군사부장이 군사특파원의 책임자가 되고, 군사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인재들이 군사특파원의 구성원으로 선임된 것이다.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군사활동 추진 의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임시정부는 기강에 도착한 직후 중일전쟁의 확대에 대비하여 전시체제로 돌입하기 위한 방안을 다방면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국내와 만주, 노령, 미주 등지에 거주하는 모든 한민족을 총동원하여 조국광복을 완성한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추진을 군사특파원의 파견으로 그 첫걸음을 실현한 것이다. 선생은 1939년 10월 중순 조성환을 단장으로 하여 황학수, 이웅(이준식), 청년 공작원 노복선(盧福善), 서파(徐波) 등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서안(西安)을 향해 출발하였다. 임시정부 군사정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조직체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군사특파원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군사특파단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선생 등 군사특파단 일행은 10월 중순에 중경을 출발하여 10월 하순 서안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선생이 특무활동을 위해 도착한 서안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20여 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어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서안에 도착한 선생 등 일행은 먼저 서안성(西安城) 안의 통제방(通濟坊)에 판사처, 즉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국인 장교들에게 한국광복군으로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고, 중국군을 제대한 인원들을 군사특파단에 참여시켰다. 임시정부 외무장 조소앙의 차남인 조인제(趙仁濟)와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의 차남 노태준(盧泰俊), 안중근의사의 조카 안춘생(安椿生) 등이 군사특파단에 참여한 것이다. 이 밖에도 현지에서 군사특파단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석화(李錫華)와 김자동(金紫東)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선생이 참여하여 활동한 군사특파단의 주요임무는 먼서 서안에 군사거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화북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한국광복군으로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40년 6월에는 이준식을 주임으로 노태준, 안춘생, 김광(金光), 서파, 이영여(李英如) 등의 단원들이 선전 및 초모활동 등의 특무활동을 위해 산서성(山西省)의 임분현(臨汾縣)으로 진출하여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군사특파단에서의 활동은 1940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성립되고 같은 해 11월에 서안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서안판사처가 설치되면서 군사특파단은 해체된 것이다. 단장인 조성환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된 지청천의 후임으로 군무부장에 선임되었고, 나머지 단원들은 서안총사령부의 간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군사특파단의 파견과 활동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실질적인 준비 작업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한국광복군의 활동기반을 개척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 이전인 1939년 10월 하순에 서안으로 진출하여 군사 근거지를 구축하여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광복군 창설 직후 총사령부 서안판사처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기 이전인 1940년 8월 10일자로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황학수ㆍ조시원과 함께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었다. 또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서안판사처의 부관조(副官組)의 부관으로도 활동을 지속하였다.

선생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참모로, 또한 서안총사령부에서는 부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제2지대가 편제되면서 2지대의 간부로도 선임되었다. 한국광복군 창설 초기의 제2지대장은 공진원(公震遠, 一名 고운기 高雲起)였으며, 선생은 같은 고향 후배인 고시복(高時福, 일명 高一鳴 고일명), 지달수(池達洙), 유해준(兪海濬), 이욕해(李慾海) 등과 함께 제2지대 창설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2지대는 군무부로부터 한국광복군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초모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선생은 1941년 2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지대장 고운기, 지달수, 유해준과 함께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로 진출하여 모병 및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중국군 제12전구 사령장관 부작의(傅作義)의 예하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받으며 수원성 포두를 중심으로 하북성(河北省)의 북평(北平), 천진(天津), 당산(唐山)지역과 장가구(張家口)에 이르는 지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초모공작으로 인한 한인청년들의 모병 성과와 함께 활동 거점 확보의 구축 등 많은 성과를 이루었으나, 현지에서 초모한 한인 청년 중 한 명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유해준이 일본군에 붙잡혔고, 이 일로 선생 등 포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행은 서안으로 철수하였다.

1942년 12월 24일에 선생은 고시복, 이지일(李志一), 조지영(趙志英)과 함께 군무부의 부원으로 선임되어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어 1943년 3월 30일에는 군무부 총무과 과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에서 군사활동의 실제적인 일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44년 2월 8일에는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었다.

선생이 간사로 선임된 군사학편찬위원회는 1944년 2월 8일 국무회의에서 설치안이 통과되었다. 군사학편찬위원회조례는 총 10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군사학편찬위원회조례]

제1조 군사학편찬위원회는 군무부 직할 하에 치함
제2조 군사학편찬위원회는 각종 군사학 서적을 편술하며 군사법규를 기초함
제3조 군사학편찬위원회는 주임 1인, 부주임 1인, 위원 약간인, 간사 약간인을 치하되 사무의 번간(煩簡)을 수(隨)하여 증감함
제4조 주임위원은 군무부장이 겸임하고 부주임위원과 위원은 군무부장의 천보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명하고 간사는 주임위원이 임명함
제5조 주임위원은 회무를 지휘 감독함
제6조 부주임위원은 주임을 보좌하며 주임위원이 유고한 시는 기 직무를 대리함
제7조 위원은 주임을 보좌하며 군사서적과 군사법규를 분담하여 편술 혹 기초함
제8조 간사는 주임위원의 명을 승하여 문서ㆍ회계ㆍ서무ㆍ서역 등 사무를 분장함
제9조 처무규정은 영정함
제10조 본 조례는 공포일부터 시행함

(국사편찬위원회 편,《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헌법ㆍ공보), 2005, 309~310쪽)

이 조례에 의하면, 군사학편찬위원회의 주 임무는 제2조에 규정되어 있다. 임시정부의 직할대오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훈련 등과 관련된 각종 군사학 서적을 편찬하거나 저술하는 일, 또한 각종 군사법규를 기초하는 일이 주된 임무인 것이다.

선생은 군무부 총무과 과장으로서 또한 군사학편찬위원회의 간사를 겸직하면서 한국광복군의 독자적인 활동을 규제하고 있던 중국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의 개정 법안을 기초하는 데에 노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군사위원회가 거의 일방적으로 제정하여 통보한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은 한마디로 한국광복군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인정하되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켜 중국군의 지원군으로 만들려는 내용이었다. 9개준승이 통보된 직후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 졌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의 활동과 운영에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이 필수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어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인통접수(忍痛接受)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은 1944년 6월 1일에 생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생활위원회는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내무부 산하에 설치한 기구이었으며, 윤기섭이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생활위원회는 6월 27일자로 재투한인생활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고 보호 대상의 범위도 기존의 독립운동자와 그 가족에서 중경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 및 그 가족의 전시 생활을 통제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선생은 생활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중일전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중경에 모여 든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계 유지 및 전시 하에서의 식량의 통제, 보건, 아동 교육 등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자들, 그리고 그 가족의 생활을 보존하는 막중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또한 광복을 한 달여 앞둔 1945년 7월 1일부터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4처 전당대회에서 황학수, 이상만, 이복원, 민필호 등과 함께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고, 7월 16일에 열린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민필호와 함께 상무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광복을 앞두고 한국독립당의 각종 활동을 감찰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선생은 광복 이후에도 곧 환국하지 못하였다.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한인교포들의 안전한 귀국과 재산 보호 등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잔무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제반문제를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주화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주화대표단이 정식 설립되기 이전인 1945년 9월 이미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화중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교포들을 대상으로 선무활동을 수행하는 화중한교선무단(華中韓僑宣撫團)에서 활동하면서 화중지역 한인들의 생명보호와 안전한 귀국, 구호활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5월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환국하여,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으로 복무하였다. 1956년 예편하고 1989년 5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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