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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3.2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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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1882-1931]

■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63년

■ 공적개요

ㅇ 만주 왕청현에 설립한 사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
ㅇ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의 승전 지휘
ㅇ 고려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무장활동 전개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 왕청현에 설립한 사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고려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무장활동을 전개한 김규식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부위(오늘날 중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전쟁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양성학교인 사관양성소를 통해 배출된 졸업생 대다수가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고 선생 또한 북로군성서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앞장섰다. 이후 선생은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에 추대되어 군대의 지휘를 책임지게 되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에 이듬해 3월 대부분의 독립군이 이만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알렉쎄호스크)로 이동하였고 러시아령지역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선생은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 참모부원으로 선발되어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의용군의 활동은 물거품이 되었다.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22년 목릉현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였고 이후 동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고려혁명군의 총사령, 대한군정서 총사령으로 선출되어 군대의 지휘 책임을 맡았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은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선생은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신민부 민정파의 정당조직인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위원이 되어 한인의 자치를 통해 독립운동 역량을 확보해 나갔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도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던 선생의 독립투쟁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31년 3월경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 하동농장에서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운동을 협의하던 중 자신들의 기반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백운봉, 최호 등의 습격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 민족운동가 3인의 김규식(金奎植, 金圭植)과 활동공간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투쟁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지역에서 민족운동이 벌어졌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정치적 조건이 크게 달랐다. 때문에 민족운동가가 어떤 지역에서 활동했는가를 보면 그의 항일투쟁론과 활동공간을 거칠게나마 파악할 수 있다.

김규식이란 이름의 민족운동가는 모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우리가 흔히 김규식 또는 김규식 박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는 1881년 1월 29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10일에 사망한 인물로 주로 상해와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 국무위원 부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김규식이 있다. 그가 바로 2011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이다. 그는 1882년 1월 15일에 태어나 1931년 3월 23일에 사망한 인물로 의병운동에도 참여했고, 북로군정서에서 대대장까지 역임하며 청산리전투에 직접 참전한 사람이다. 양주의 김규식은 동만주와 북만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의 김규식이 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의 臨河 川前 269번지에서 태어난 김규식으로 1880년 8월 27일 출생하여 해방을 며칠 앞둔 1945년 8월 10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남만주 지역의 민족주의운동 단체인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흔히 서간도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볼 수 있겠다.

위 세 사람은 일본 측 정보자료에서도 金奎植과 金圭植의 한자를 구분하지 않고 언급하고 있어 우리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활동공간이 중국의 관내지역과 동.북만주, 남만주지역으로 명확히 구분되고 활동방식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동만주와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김규식에 관해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연구성과를 최대한 반영하여 정리하였다.

2. 의병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망명하다

양주의 김규식이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은 실력양성론이나 외교론 등이 아니라 총을 들고 싸우는 무장투쟁을 기본 수단으로 독립전쟁론을 구체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듯이 만주라는 공간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부터 민족운동가들이 주목했던 곳이다. 즉, 독립군 기지건설의 최적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김규식이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만주로 망명하기 이전에는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副尉 곧, 오늘날 한국군의 계급으로 말하자면 중위로 근무한 사람이었다. 김규식에 관한 자료가 처음 나오는 것은 1908년 의병운동에 관한 자료에서다. 이로 보아 그는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하자 의병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 활동지역은 강원도 철원 일대였다.1)

그런데 다른 일본측 사료에는 1908년 4월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철원 지방을 횡행하던 전 육군참령 김규식(金圭植)이 인천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온다.2) 활동지역이 같은 것으로 보아 양주의 김규식에 관한 설명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한때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의병운동 도중 부상을 당하여 은신하였다는 설명도 있다.3)

3. 北路軍政署에서 활동하다

그런 김규식이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이후 1919년까지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만주에서 김규식의 행적을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로군정서에서의 활동이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독립전쟁을 적극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용정과 국자가를 중심으로 동만지역의 한인사회에는 여러 무장단체가 출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919년 8월 正義團에서 명칭을 변경한 軍政會이다. 군정회는 汪靑縣 春明鄕 西大坡溝에 본영을 두고 있었는데, 10월에 軍政部로 개칭했다가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1919년 12월 大韓軍政署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 곧 南滿地方에서 활동하던 西路軍政署와 구분하기 위해 大韓北路軍政署라고도 불렀다.

▲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북로군정서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가 있던 李東輝의 무장투쟁론을 지지하고 있었다.4) 즉, 이동휘는 民族의 自力으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우리의 주장과 행동을 내세워야 하며,5) 소련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日本의 敵國과 聯合하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고, 독립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 그는 이렇게 해야 국제사회로부터 교전단체로 승인받을 수 있으며, 독립 이후 국가 건설을 우리 민족이 주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북로군정서에서 김규식은 처음 중대장으로 근무하였다.7) 또 李範奭 李章寧 등과 함께 士官鍊成所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 건립된 군사간부 양성학교로 김좌진이 소장이었다. 생도들은 주로 대종교의 청년 신도와 왕청현 德源里에 있던 明東學校 학생들이었다. 사관연성소는 학생들에게 군사학과 총검술을 가르쳤고 전투훈련도 실시하였다. 군사학의 교재로 사용된 교재는 『步兵操典』, 『築城敎範』, 『軍隊內務書』, 『野外要務令』 등이었는데, 책의 제목만을 놓고 볼 때 일본군의 교재였을 가능성이 높다.8) 실제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된 일본군 관련 교재와 양성된 사람들이 만주지역의 여러 독립군에서 활약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적의 현대적 전법을 익혀 적을 격파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연성소는 1920년 9월 졸업식을 거행하여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일본군이 만주지역 독립군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독립군들이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기 위한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졸업생의 대다수는 敎成隊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이동하던 중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나 접전을 벌였다. 김규식은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 북로군정서 태극기와 장총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백두산 일대에 집결하지 못하고 北滿地方으로 이동하여 밀산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이 곳에서 徐一을 총재로 하는 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월경하기로 결정하였다. 20만 명 가량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어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세비키의 도움으로 무기도 공급받고 조직도 정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이때 군대 지휘를 책임지는 총사령에 추대되었다. 김좌진과 이범석 등 대한독립군단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립군은 1921년 3월 이만을 거쳐 自由市(알렉쎄호스크)에 도착하였다. 독립군은 이 곳에서 노령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독립전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통합하여 1400여 명의 병력을 가진 大韓義勇軍(사할린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김규식은 여기에서 洪範道 李靑天 등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선발되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타국 땅에서 처음 만난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던 것이다.

4. 만주로 돌아와 軍政에서 民政 우위의 활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다

그러나 이념을 떠나 독립을 위해 함께 활동하려 했던 독립군들의 움직임은 6월에 있었던 自由市慘變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사망한 사람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의 와중에서 일어난 참변으로 만주에서 건너간 독립군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9) 김규식이 이후 활동에서 反共이란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이때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시참변을 경험한 김규식이 언제 만주로 돌아왔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자료상 확인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는 1922년 말이다. 그가 穆稜縣 馬橋河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활동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였고, 다시 寧安縣 寧古塔으로 이동하여 移住韓人을 상대로 의무금 징수활동 등을 벌이며 재기를 모색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주민들의 반발을 받았고, 중국 지방관헌이 체포하려 들자 다시 흩어졌다.10)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김규식은 동만지역으로 활동거점을 옮겼던 것 같다. 그가 1923년 5월 延吉縣 明月溝에서 高麗革命軍이란 무장단체를 조직할 때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서 총사령, 곧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였다.11)

그런데 고려혁명군의 활동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국민개병의 민병제라는 조직방침을 채택하는 한편에서, 屯耕制를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둔경제란 특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평소에는 생활에 필요한 생활경제를 스스로의 노동에 의해 확보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기회가 오면 군사활동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무장투쟁 일변도의 활동방식을 지양하고 자력으로 식량을 확보하면서 일본과의 장기항전에 대비하려는 모습인 것이다.

고려혁명군의 활동방식은 노령에서 만주로 돌아온 직후 조선인 거주자들을 상대로 벌인 의무금 징수활동 과정에서 겪은 경험 곧, 반발 내지는 주저하는 모습이 김규식과 동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배경의 하나였다. 또한 조선인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산리전투 당시와 달리 장기적인 운동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조치이기도 할 것이다. 독립군을 둘러싼 내외적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 감에 따라 만주지역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운동가들이 대응한 조직적인 결과가 3부 곧, 1923년 參議府, 1924년 正義府, 그리고 1925년 김규식이 활동한 新民府의 결성인 것이다.

김규식의 입장에서 보면 3부의 결성으로 고려혁명군 활동 때부터 조선인만의 자치에 기초한 활동방향이 더욱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려혁명군이 자치단체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조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新民府 단계에 가서야 조직적 실체를 드러낸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주류가 무장적 독립운동단체에서 자치적 독립운동단체로 넘어가고 있던 과도기에 남만지역의 大韓統義府처럼 동만지역에 나타난 현상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혁명군의 활동이 오래 간 것 같지는 않다. 과거 북로군정서 시절에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결성한 大韓軍政署가 1924년 3월 영안현 영고탑에서 재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조직에서 참모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5월에는 고려혁명군의 지도부 사람들도 모두 흡수되면서 대한군정서의 조직이 개편될 때 김규식은 군대의 지휘 책임을 맡은 총사령에 선출되었다.12)

5. 新民府의 민정파에서 활동하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은 목릉현에서 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회의에서는 국가의 완전한 건설과 민중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권폭력의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와 동일한 지위에 있는 세계의 민중과 협동의 동작을 취한다고 선언하였다.13) 민중과 반침략주의를 선언한 신민부는 金赫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위원제에 입각하여 민주적인 논의과정을 거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檢査院(검사원장:玄天默)을 두어 집행부를 견제하고, 원로들로 參議院(참의원장:李範允)을 구성하여 상징성과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또한 행정계통과 별도로 군대, 곧 屯田制에 기초를 둔 保安隊(대장:朴斗熙)도 두었다.14) 신민부는 기관지로 『新民報』를 발행하였다.15) 삼부 가운데 유일한 활동이었다.

신민부와 마찬가지로 정의부와 참의부에서도 자치를 통해 군사역량을 강화하고 정치경제적인 실력을 축적해 두었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 간의 전쟁이나 중국의 군벌전쟁 등 대외정세가 민족운동에 유리하게 조성될 수 있다면 이를 활용한다는 전술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조성되기까지 군대는 屯田制에 입각하여 유지되어야 했다. 따라서 신민부를 비롯한 3부의 軍隊는 국방기능을 담당하는 조직, 곧 독립전쟁을 위해 국내에 침투하거나 만주의 친일파 등을 처단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관할 구역 내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사실상 경찰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신민부의 보안대는 실질적으로 그렇게 활동한 측면이 조금 약하였다. 그래서 무장활동 우선이냐, 자치가 우선이냐는 논쟁으로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리는 갈등이 신민부 내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의 경우 2세를 교육하여 장기적인 항일투쟁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延壽縣 太平村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16) 민정파에 가까운 활동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민정파의 정당조직인 고려국민당에서 군사부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17) 고려국민당은 1927년 2월 민정파의 리더인 金赫이 일제에 검거된 이후부터 1927년 5월 사이에 혁명(독립)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다.

그런데 신민부 내에 고려국민당이 결성되는 상황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해야 그의 행적을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경 만주지역 독립운동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하나 나타난다. 즉, 자치 기반을 튼튼히 쌓아가면서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화되는 한편에서, 독립운동만을 생각하고 활동하는 비밀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政黨을 표방하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즉, 참의부 활동구역에서는 韓人會, 정의부의 활동구역에서는 다물黨.韓族勞動黨.高麗革命黨, 신민부의 활동구역에서는 韓國歸一黨과 高麗國民黨이 각각 결성되었다.

1920년대 중반경에 이르러 이들 정당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첫째, 政黨制를 통해 민주주의사회를 실현시켜 보려는 세계적인 사조의 반영이었다. 둘째, 뚜렷한 이념과 강력한 통일조직을 갖춘 공산당이 정부를 통제하고 지도하는 현실이 소련에서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그것의 이론적 내용인 조직론이 만주지역에 전파되었다. 셋째, 민족주의운동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대중의 통일적인 의사를 결집하고 뚜렷한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안정되고 강력한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18) 즉, 혁명(독립)과 자치의 임무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신민부 활동구역에서 조직된 한국귀일당과 고려국민당의 경우는 좀 더 색다른 배경이 하나 더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귀일당은 신민부 내 軍政派를 이끌고 있었던 김좌진이 조직한 정당인 반면, 고려국민당은 이들에 반대하여 신민부 내 民政派가 결성한 정당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의부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없었다. 두 정당의 출현은 지금의 단계에서 무장투쟁을 우선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치행정을 우선해야 하느냐라는 대립의 산물이었다. 정의부가 이미 이 문제를 극복하고 있었는데 비해, 신민부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주도권다툼의 성격까지 겹치면서 1928년 10월경 군정파에서 賓州事件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두 세력은 완전히 갈라섰다.

고려국민당은 同賓縣 小亮子에 본부를 두고 주하현과 동빈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김규식이 창립 당시부터 이 조직의 결성에 참여하여 간부로 선출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1928년 당시 군사부위원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19) 고려국민당의 무장활동은 다른 민족주의운동 단체처럼 1927-28년 사이에 조성된 장개석의 북벌이나 軍閥 사이의 혼전 속에서 비밀스럽게 反張作林 세력과 호응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국민당은 봉천군벌이나 중국국민당이 인정해 주는 한인의 자치를 통해 안정되고 단합된 역량을 확보하려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활동과 삼부를 통합하여 새로운 자치기관을 결성하려는 활동이 동시에 일어났던 것도 이와 같은 인식과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6. 自治와 교육에 더욱 매진하다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실패한 직후 김규식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지만, 연수현에서 매진하고 있던 교육과 자치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즈음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1930년 7월경 葦河縣에서 결성된 韓國獨立黨에서 부위원장으로 취임한 것 뿐이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한족총연합회의 김좌진이 화요파 사회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 연합회가 와해되자 북만지역 민족주의운동 계열이 사태를 수습하고 한 두 갈래의 움직임 가운데 하나였다.20)

한국독립당의 黨綱과 중앙집행위원회의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강 : 三本主義 1.民本政治의 실현 2. 勞本經濟의 조직 3. 人本文化의 건설21) 조직 : 중앙집행위원장-홍진, 총무위원장-신숙, 조직위원장-남대관, 선전위원장-조경한, 군사위원장-지청천, 경리위원장-최호, 감찰위원장-이장녕22)

당강에서 말하는 本과 人은 사실상 북만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농민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독립당은 농민 위주의 정치, 경제, 문화를 추구하였다.23) 또한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과 간부진은 대부분 이청천이 이끌었던 生育社 출신이거나 신민부 시절의 민정파 출신이었다. 따라서 한국독립당은 군사보다는 자치방면에 활동의 무게를 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30년 8월에 결성된 韓國自治聯合會라는 聯合體的인 表面機關를 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한국독립당은 중앙집행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지도부를 완성하였는데, 김규식은 이때 4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부위원장 가운데 이장녕 만이 감찰위원장을 겸임하면서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실제 일을 처리하는 중앙집행위원이 아닌 것으로 보아 명예직에 가까운 비상임 부위원장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더구나 김규식은 한국독립당의 表面機關인 韓國自治聯合會의 간부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한국독립당의 표면적인 활동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규식은 1931년 3월경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 하동농장에 갔다.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 운동을 협의하고 연수현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교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직권을 남용하여 하동농장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던 백운봉과 최호 등은 김규식이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규식 등이 묶고 있던 한족자치연합회 주하지방 집행위원장인 이붕해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였다.24) 우리 나이로 52세였다.

김규식이 만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40대로서 그의 체력, 열정, 그리고 연륜이 어우러진 때였다. 그의 삶은 독립운동의 큰 흐름과 일치하였다. 1920년대 초반기 軍政 優位에 기초한 무장독립전쟁, 1920년대 중반경부터 民政에 치중한 자치활동과 민족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활동에 뛰어든 행적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만큼 시대가 독립운동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여 적절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했던 40대의 삶을 만주의 하늘 아래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각주]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 46쪽.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1112쪽.
3)『獨立有功者功勳錄-獨立軍과 滿洲.露領地域의 獨立運動』 4, 517쪽.
4)이와 관련하여 안창호의 입장 차이,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辛珠柏, 「1920년 전후 재만한인 민족주의자의 민족 현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獨立戰爭論과 관련하여」, 『韓國史硏究』 111, 2000.12 참조
5)『獨立新聞』 1919. 10. 28(3)
6)姜德相.梶村秀樹 編, 『現代史資料』 26, みすず書房, 1967, 296쪽.
7)「대한군정서 임원명부」, 『海外의 韓國 獨立運動史料 20 : 中國篇 5, 北間島지역 獨立軍團名簿』, 國家報勳處, 1997, 29쪽.
8)한옹, 「민국초기 왕청현 조선인 교육개황」, 『연변문사자료』 5, 1988, 170쪽.
9)자유시참변에 관한 간략한 상황은 반병률, 『성재 이동휘의 일대기』, 범우사, 1998, 328 - 329쪽 참조.
10)朝鮮總督府警務局, 『吉林省東部地方の狀況』, 387쪽. 411 415쪽.
11)고려혁명군에 대해서는 蔡根植,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105 - 106쪽 참조.
12)愼鏞廈, 「大韓(北路)軍政署獨立軍의 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260 - 261쪽.
13)「대정14년5월8일 독립 불령선인단 신민부의 창립 및 조직에 관한 건」,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編, 『獨立運動史資料集』 10, 高麗書林, 525쪽.
14)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 - 45)』, 아세아문화사, 1999, 91쪽.
15)검사원 : 姜奎尙 盧湖山 黃國敏 姜寅秀 孫一民 金基南 羅仲昭 池章會 姜明鏡 楊允三 참의원 : 洪鍾林 金裏潤 金松岩 梁在憲 崔文一 黃公三 尹薰 李章寧 安浩然 安龍洙 許瀅 金奎鎭 南極 車東山 李白香. 참의원의 김규진이 김규식일 가능성이 높다.
16)『獨立有功者功勳錄-獨立軍과 滿洲.露領地域의 獨立運動』 4, 518쪽.
17)大倧敎總本司, 『大倧敎重光60年史』, 1981, 398쪽.
18)자세한 내용은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 - 45)』, 108 - 110쪽 참조.
19)1928년경 나머지 간부를 들면, 책임비서에 金虎, 次席에 金墩, 사법부장에 李一世, 정치부위원에 宋尙夏, 연락부위원에 獨孤岳, 선전부위원에 崔學文, 경리부위원에 文宇天, 조직부위원에 李敎彦이었다.
20)나머지 하나가 1930년 4월 한족농무연합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21)申肅, 『나의 一生』, 日新社, 1963, 94쪽.
22)蔡根植, 『무장독립운동비사』, 157쪽.
23) 박훤,『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一潮閣, 1991, 234쪽.
24)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中國東北지역 韓國獨立運動史』, 集文堂, 1997, 511 - 512쪽. 지청천과 신숙 등도 부상을 당하였다.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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