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나라사랑광장 이달의 독립운동가
2011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문석봉>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3.28 13:36
  • 댓글 0

문석봉 [1851-1896]

■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93년

■ 공적개요

ㅇ 항일 투쟁을 위해 관병을 훈련시키다 체포되어 옥고
ㅇ 명성황후 시해 후 유성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체포됨
ㅇ 탈옥하여 재거의를 도모하던 중 서거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유성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체포되었으며 탈옥하여 재거의를 도모하던 중 서거한 문석봉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1년 경북 현풍군(현, 경북 달성군 현풍면 상동리)에서 부친 하규와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선생은 25세에 중국의 금릉에 건너가 3년간 한의학을 수학하고, 32세 때인 1882년 조운리(漕運吏)가 되었다. 첫 관리생활을 시작한 후 세곡을 조운선으로 운반하던 중 전라도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기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893년 5월 선생은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복궁5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12월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1월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나 의병을 일으켜 ‘토왜’하려 한다는 고발로 인해 공주부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양호소모사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무자비함과 조선정부의 나약함을 본 후 일본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공주부 관병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것이다. 사실상, 의병투쟁의 계획 준비단계였다.

1895년 6월, 석방된 선생은 8월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고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송근수, 신응조 등 지역유림의 대표자들과 함께 창의하여, 9월 18일 ‘공주의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지역의 유학자들은 물론 일반 서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선생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각지 통문을 발송하여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하여 10월 28일,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에 패산하였다.

선생은 패산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으나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봉기를 시도하는 등 선생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뜨거웠다. 선생은 이듬해 봄 영장 최은동 등과 함께 탈출하였으나 이미 선생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1896년 4월 선생은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시기 유인석의 제천의병과도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 선생은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하였으며, 결국 11월 19일 밤에 46세의 일기로 병사하고 말아 거의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 머리말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궁중에서 시해되는 국제적 범죄행위가 일어났다.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활화산같이 끓어올랐다. 각지에서 일본을 쳐부수자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의 조짐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의병 봉기의 횃불을 올리면 이를 신호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태세였다. 이러한 때에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文錫鳳)이 대전 일대의 유학자들과 평민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참여로 유성에서 의병을 봉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유성의병이 바로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을미의병의 첫 봉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이 유성의병에 대하여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을미의병의 전단계로, 또는 봉기 장소가 유성이 아닌 충북의 보은이라고 잘못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문석봉의 구체적인 항일투쟁의 사실이 실증되었으며, 봉기 장소도 보은이 아닌 유성이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유성의병장 문석봉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누구였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들이 어떤 이유로 의병을 일으켰고, 구체적인 전투과정은 어떠했는지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2. 유성의병장 문석봉은 누구인가?

문석봉(1851-1896)은 1851년 경북 현풍군(현, 경북 달성군 현풍면 상동리)에서 부친 하규(夏奎)와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이고 본명은 봉각(鳳珏)이다. 본관은 남평으로 시조 다성(多省)의 32세손이다. 문석봉의 11대조가 대구로 처음 이사와 살게 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의 관계(官界)진출은 미미하였다. 다만 문석봉의 9대조인 영남(榮南)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략장군훈련봉사의 직을 받았고, 6대조인 재징(在徵)이 대구감영에서 성 쌓는 일로 공을 세워 성축감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 문석봉의 부친에 이르기까지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문석봉대에 와서야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역임하는 등 관직을 제수 받는 정도였다. 이처럼 고려 문신의 후예인 그의 집안은 낙향하여 조선조에 관료의 길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관계진출에 소극적이었으며 그것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결과로도 나타났다. 따라서 비록 그가 영남의 한미한 선비가문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의 신분은 거의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석봉은 어려서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었다. 12세 때인 1861년 죽궁을 쏘아 소뿔을 맞히면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어사 김화영이 술사 이성구를 보내주어 그에게 육도삼략을 비롯한 병서를 수학하게 하였다. 1870년에는 이성구와 함께 고견암이라는 암자에 기거하면서 3년간 무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암자에서 나온 직후인 1873년부터 2년간은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탐독하였으며, 25세 때인 1875년에는 중국의 금릉으로 건너가 왕희주한테 침술을 비롯한 한의학을 3년간 수학하였다.

문석봉은 32세 때인 1882년 조운리(漕運吏)가 되면서 관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전라도 지역의 세곡을 조운선으로 서울에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관리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가 세곡을 싣고 목포-무안 사이를 지날 때 전라도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곡식을 풀어 기민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그는 나라를 속인 것은 죄이나 이 백성들은 어찌 나라사람이 아니겠는가. 쌀을 중히 여겨 백성을 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라 하고 집안일을 친구인 김수영에게 맡기고 방장산속으로 들어갔다.

문석봉은 41세 때(1891년) 고향의 수문동에서 친척인 문용현과 함께 영파재(映波齋)를 지어 빈민자제 50여인에게 한학을 교육하였다. 이는 그가 무인으로 일어났으나 문인의 소양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때 현풍군수 윤병은 비적의 방어를 위하여 그에게 군내 순찰의 임무를 맡겼다. 문석봉은 이를 인연으로 尹秉이 과천군수로 옮겨가자 그의 책실로 수행한 뒤 포군장이 되었다. 1893년 5월 비로소 그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석봉은 곧 경복궁5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12월에는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모친상을 당하여 과천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894년 11월 문석봉은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되어 공주부에서 근무케 되었다. 이때는 동학농민군이 득세하던 시기였으며 충청지역 중에서는 그가 현감으로 재직하였던 공주부지역이 특히 심하였다. 문석봉의 소모진은 11월 18일 조직되었으며, 11월 29일 간부를 임명한 듯하다. 그는 12월 2일 과천을 출발하여 12월 7일 공주감영에 도착하였다. 문석봉은 소모사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진잠을 비롯하여 연산, 은진, 진산, 여산은 물론 청산, 보은 등지에까지 수차례 출정하여 동학군 진압에 출중한 공을 수립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1895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연산지역 염학동 동학군 진압작전은 대표적인 전투였다.

이와 같이 문석봉의 동학군 진압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연산을 비롯한 인근 6읍의 주민들이 진잠지역에 양호소모사문공석봉명찰선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리기까지 하였다. 공주부에서는 문석봉을 신영 영장에 임명하여 공주부에 근무케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잠 연산 은진의 유생들은 순영과 통리아문에 문석봉 부대를 인의의 부대라고 칭송하면서 아직 동학의 잔당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영에 부대를 철수케 되면 동학군이 반드시 무리를 지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이는 국가는 물론 백성들이 우려하는 바니 유진케 하여 그 해를 제거케 해야 함을 청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박제순은 오히려 문석봉의 신영 근무를 재촉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결국 1895년 2월초에 신영 영장으로 근무케 되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안가 문석봉이 공주부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공주의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킨 것은 의병을 일으켜 토왜(討倭)하려 한다는 고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21일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그가 본격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문석봉의 의병투쟁은 을미사변 직후 재개된다. 국수보복의 기치를 내걸고 1895년 9월 18일 공주의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 명성황후 국장

3. 유성의병은 왜 일어났나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킨 주요한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인 낭인배도 동원되었다.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부대를 이끌고 광화문에서 막고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총탄에 피살되고 말았다.

왕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일본군은 왕의 처소인 건청궁을 포위하고 명성황후를 찾아 내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피살되었으며 3-4명의 궁녀들도 피살되었다. 고종은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으며 왕태자는 일격을 맞고 기절하였다.

이러한 일본에 의한 천인공노할 사태에 관료들도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킬 뜻을 밝히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문석봉은 을미사변 직후에 서울에 올라가 민영환 등 중신들을 만나 거의의 뜻을 밝히고 대전으로 내려와 9월 18일 유성 장터에서 의병을 봉기한 것이다.

문석봉은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에 친구인 엄진섭에게 자식들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에서 그는 시해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고 있다. 그는 을미사변을 국치로 인식하였으며 신하로써 그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문석봉은 자신이 임진의병장의 후예라는 자각이 강했다. 따라서 이러한 척왜론은 그가 의병봉기를 실천한 또 다른 이유였다. 그가 1895년 2월 체포된 죄명이 토왜죄(討倭罪)였다. 그는 이때 경무사 이윤용과 가진 공초에서 태조 이래 5백년간 내려 온 조종사직을 어찌 쉽게 두 손을 들어 오랑캐에게 바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오랑캐 일본을 물리쳐 국망을 막아야 함을 피력하였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관리로 근무하면서 정부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이 일본의 조종에 의해 이루어짐을 목도하였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위압적이고 무자비한 진압, 거기에 비해 조선정부의 나약함을 보고 그의 척왜론은 강화되었으며 급기야 국모가 시해되는 사태를 당하여 그는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4. 유성의병의 전개

유성의병은 현풍 출신인 문석봉이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공주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가능하게 되었다. 문석봉은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로 임명된 이후 공을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정부의 시책을 추종만 하지는 않았다. 양호소모사로 공주부에 부임하여 첫 작전이었던 박만종의 체포문제에서 관찰사와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도 그 일단이다. 이후 그는 개화정권의 수족 노릇을 개탄하고 반개화 반침략의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문석봉의 이러한 행동전환은 1895년 2월경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일본을 구축할 계획을 세우고 공주부 관병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문석봉은 김재수의 고발로 그해 2월 토왜죄로 체포되었다. 서울 경무청에 구금된 그는 경무사 이윤용으로부터 2회에 걸친 공초를 받고 실형을 받았다. 토왜죄로 실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항일의병을 추진하였음을 공인한 것이 된다 하겠다. 따라서 그의 의병활동이 을미사변 직후에 구체화되기는 하였으나, 이미 1895년 2월에 계획,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895년 6월 석방된 문석봉은 8월에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으며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인 9월초 서울에 올라가 을미사변 직후의 분위기를 파악하였으며, 여러 인사들을 만나 봉기의 뜻을 밝히고 동조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창의에 참여한 세력은 황현이 지적하고 있듯이 유생층이 중심이 되었던 듯하다. 특히 이 지역 유림의 대표자인 송근수와 신응조가 참여하였음이 주목된다. 일본의 동경에서 발간된 《동경조일신문》에서도 이들의 의병 참여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송근수(1818-1902)는 송시열의 8대손으로 헌종 14년(184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우의정을 거쳐 고종 19년(1882) 좌의정에까지 이른 정치가였다. 또 한편으로는 1884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회덕에 낙향하여 재상산림이란 칭호를 얻었으며 단발령이 공포됨에 각식(却食)을 한 척사계렬 유학자였다. 1905년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이 그의 친조카임을 볼 때 이들의 척사사상에 기반을 둔 반일우국정신을 살필 수 있겠다. 신응조(1803-1899)는 대원군의 이종사촌으로 형조 판서를 역임하고 1882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진잠으로 이사하여 저술에 종사한 척사계열의 인물이었다. 문석봉은 상경하여 당대 민씨척족 세력의 실권자였던 민영환을 만나 거의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때 민영환은 문석봉의 뜻을 듣고 환도 한자루를 풀어주며 격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을미사변 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방조한 우범선을 살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영근과도 서울에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 편지를 보내어 거의를 격려하고 있다. 과천의 집에서 편지를 받은 문석봉은 9월 18일(양 11월 4일) 충청도 유성으로 내려가 의기를 들었다. 죽음을 결심하고 국모시해 1개월 후에 결연히 국수보복을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다.

문석봉은 9월 18일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유성의병의 지휘부를 다음과 같이 조직하였다.

선봉 : 김문주
중군 : 오형덕
군향 : 송도순

김문주는 공주출신의 유학으로 문석봉과는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으며 지난 2월 1차 의병 때도 같이 거의를 공모하여 체포되었던 동지였다. 오형덕은 옥천출신의 유학으로 역시 문석봉이 양호소모사로 재직 시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여기에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여한 것이다. 송도순(1858-1918)은 송준길의 10대손으로 고종 11년(1874)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1893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봄 사헌부 대사헌과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낙향한 인물이다. 이들 외에 문석봉 의병에 참여한 인사로 진사 김종률과 영장 최은동, 김성의 등이 확인된다. 김성의(1861-1925)는 병자호란때 척화파인 송애 김경여의 후손으로 문석봉의 제의로 의병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병관이 찬한 김성의묘갈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문석봉과 김성의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다.

오호라. 이는 故從仕郞宮內府主事 松雲金公의 墓이다. 公이 甲子(1924년)년 중국으로 가 乙丑년(1925년)7월 17일 봉천에서 병사하였다. (중략) 이에 앞서 을미년 국모가 시해당하는 坤寧의 變이 일어나 凶逆이 內外에 있어 한사람도 감히 討賊復讐를 말하는 이가 없더니 文錫鳳이 召募의 命을 몰래 띠고 와서 公의 형제들이 志節이 있음을 알고 와서 擧義를 謀議하였다. 드디어 鄕丁을 糾合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서했으나, 整備가 되기 전에 賊臣이 임금의 令을 빙자하여 義兵을 匪賊이라 하여 체포하고 해산시켰으니 원통하다.1)이에 의하면 문석봉이 거의하기 전 김성의를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의는 그와 함께 의병을 모아 의병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부대가 해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성의는 피신하여 대전 상괴리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1924년 중국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갔으나 봉천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죽은 지 15년만인 1940년에 고향으로 모셔졌다. 김성의의 둘째인 김직원과 그의 당질인 김정철은 대전 인동시장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통문에서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통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通諭할 일은, 聖母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실로 천고에 없는 대변입니다. 일찍이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아 이 적들과 어찌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욕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나라 누구인들 신하가 아니며 누가 복수를 원하지 않으리오. 같이 일어나 대의로서 흉당을 멸망시키고 社稷을 건지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乙未 九月 日2)

▲ 의산유고

문석봉은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그는 공주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문석봉은 9월 18일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우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하여 회덕현을 급습하였다. 회덕현의 무기고를 공격한 일자를 알 수는 없으나 10월 20일(양,12월 6일)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명의 의병이 유성 장대리에 다시 진군하였다. 이곳에서 의병을 모은 부대는 다음 날(10월 21일)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을 만난 듯하다. 그러나 이세경은 의병의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진잠에 입성한 지 일주일 후인 10월 28일 문석봉 의병은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인 이단석의 시문기(時聞記)에 의하면 의병이 10월 28일 공암을 지나 공주부로 향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전중군 백락완과 이인 찰방 구완희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가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현재,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다. 그러나 의병은 매복해 있던 관군에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산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문석봉은 우선 고령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이어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고 있으니 잠시 숨어 후일을 도모하시오라고 이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현감 조모의 고변으로 순검 서윤묵정인원이효진 등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으니 11월 24일의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들 3명의 순검에게 갑종상으로 6원씩을 상금으로 주었다.

대구부 감옥에 갇힌 문석봉은 11월 25일 경무관 장규원으로부터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간의 경과와 심정을 비장하게 토해 놓았다. 3일 후인 11월 28일에는 관찰사 이중하의 공초를 받았다. 문석봉은 관찰사의 불의를 통열히 논박하였으며 거의한 큰 뜻을 의연히 역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석봉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열렬하였다.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봉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1896년 봄 영장 최은동, 중군장 오형덕과 함께 파옥, 탈출하여 과천에 올라왔으나 이미 문석봉의 집은 일본병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문석봉은 4월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인석의 제천의병과도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 문석봉은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하였으며, 결국 11월 19일 밤에 46세의 일기로 병사하고 말아 거의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5. 유성의병의 역사적 의의

1) 유성의병은 을미사변 후 전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효시이다. 2) 유성의병은 주욕신사의 충의정신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근왕의병이다. 3) 유성의병은 1895년 9월 18일(음) 문석봉에 의해 유성장터에서 봉기한 사실이 실증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보은에서 일으켰다고 잘못 알려져 있던 것이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4) 유성의병은 회덕의 송근수와 송도순, 진잠의 신응조, 김성의 등 대전지역 유학자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동참, 유성장터에서 합류한 일반 서민들이 참여하는 등 향촌사회의 지지기반 위에서 전개된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의병장 문석봉은 경북 현풍 출신이었지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자신이 진잠현감으로 근무했던 대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것은 대전이라는 향촌사회가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이념적 바탕이 강했으며, 따라서 지역인들의 지원과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유성의병의 사실을 알리는 학술활동이 여러 차례 있어 왔다. 각 방송사에서도 광복50주년 특집으로 유성의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한 바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차례 언론과 방송매체를 통하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찾기 어렵다. 다행히 2004년 유성구청에서 유성시장의 한켠에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이란 기념비가 세워져 유성장터가 민족교육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유성의병의 의기가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송병관 찬, 궁내부주사송운김공묘갈명(경진년), 극재집. 김성의의 묘는 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에 위치하고 있다.
2)의산유고 권2 통문, 창의시통열읍문

[제공 : 국가보훈처]

안보단체 블루유니온에서 운영하는
블루투데이 후원도 소중한 애국입니다

기사에 언급된 취재원과 독자는 블루투데이에 반론, 정정, 사후보도를 청구 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요구처 : press@bluetoday.net

블루투데이 기획팀  blue@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블루투데이 기획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블링컨 美 국무장관 “미국 제재에 따라, 러시아는 이란·북한 등 악질적인 공급자 의존하게 돼”
블링컨 美 국무장관 “미국 제재에 따라, 러시아는 이란·북한 등 악질적인 공급자 의존하게 돼”
尹 대통령 “통일은 갑자기 올 수도···북한 주민의 실상 정확하게 알려야”
尹 대통령 “통일은 갑자기 올 수도···북한 주민의 실상 정확하게 알려야”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