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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를 포섭한 공산주의 혁명가, 성시백의 일생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5.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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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북한에서는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남한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암약했던 지하공작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서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성시백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시백은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영웅 1호로서 평양의 애국열사능에 시신 없이 그의 아내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는 점은 북한이 얼마나 그의 지하공작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시백의 기록은 우선 송남헌의 『해방3년사』에서 김구에게 김일성의 서신을 전달한 인물로 나타난다.[송남헌, 『해방3년사』(까치, 제2권, 1985), 543.)] 그리고 90년대 중반 유영구의 논문,「해방공간과 성시백사건」에서 그의 활약상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유영구, 「해방공간과 성시백사건」『남북을 오고간 사람들』(도서출판 글, 1993).]

성시백의 진면목을 북측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에서 성시백은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대서특집으로 지면을 장식하게 된다. 그 신문은 "세계 지하혁명투쟁사에는 이름 있는 혁명가 등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있지만 그 위훈담들은 공작내용과 활동범위로 보나 투쟁방식으로 보나 성시백 동지의 지하공작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칭송하면서 ”적들이 성시백을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단언한다.[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대출판부, 1997), 231에서 재인용; 김종항, 안우생,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남북련석회의와 백범 김구선생을 회고하여」,『인민들 속에서』 39,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6), 7.]

II.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서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도 참가했으며 3.1운동이후 조선에 급속하게 전파된 공산주의 사상에 접하면서 1925-26년에는 공산주의청년회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조선공산당이 해산되자 그는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1930년대초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의 임무는 주로 미 해방지구, 즉 장카이섹의 국민당 통치지구에 들어가서 지하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해방전부터 정향명이라는 가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의 민중은 조선민족과 연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성시백은 활동무대를 상해에서 서안으로 옮긴다. 서안에서는 장카이섹이 그의 부하 장학량에게 감금되는 서안사건(1936)이후 국공(國共)합작을 실천하는 문제로 주은래가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 성시백은 주은래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 뒤 성시백은 중경, 남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국공합작과 관련된 지하공작을 전개했다.

성시백은 중경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격의 없는 관계를 형성했다. 당시 성시백은 중국공산당원 자격으로 중경에서 지하공작을 하면서 한국독립운동단체에 대한 공작을 맡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을 만난 것이다. 임정 계통의 김구, 엄항섭, 장건상, 조완구, 등과 광복군 계통의 송호성, 김홍일, 이범석 등과 친했다. 특히 김홍일과는 호형호제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성시백은 중경에서 반목만을 일삼던 임정요인들에게 김구를 중심으로 구국(救國)전선을 형성하도록 지원하여, 김구의 정치적 구원자가 되었다고 한다. 김구는 김일성 군대의 항일투쟁과 연합하여 독립투쟁을 하자는 성시백의 권유를 어렵지 않게 수락했다.

해방이 되자 중국공산당과의 정리하는 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성시백은 1946년 2월에 평양에 도착하여 그가 ‘抗日의 영웅’이라고 신봉하는 김일성 장군을 만나서 충성을 맹세했다. 성시백은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대남관계 부서인 5호실(연락실)이 신설되면서 부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조직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를 받는 곳으로 중책을 맡게 된 배경에는 주은래와의 인연이 큰 힘이 되었다. 주은래는 김일성과 1930년대 이후부터 의형제를 맺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성시백이 가져온 주은래의 신임장에는 “중국공산당의 지하공작에서 상당한 공을 세운 공산주의자”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성시백을 믿게 되었다.

남로당이 결성된 뒤 1946년 12월부터 성시백은 서울에 아주 눌러 앉아 활동하게 된다. 그는 우선 첫 활동의 초점을 남로당에 들어가지 않은 좌익인사들의 규합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민족세력 일부와의 연대활동에 공작의 초점을 맞추었다. 성시백은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서울 거주도 김일성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성시백이 이런 공작에 적임자로 부각된 것은 중국에서 지하공작 경험이 많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는 점, 서울에서 초기 공산주의 청년운동 가담한 점, 그리고 중국에서 임정 요인들고 인간관계를 많이 가졌던 점 등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김일성은 성시백에게 “남로당 측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시백은 남한의 중간파와 우익에 속한 정치세력들을 북한 김일성의 동조세력으로서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이승만의 단정세력에 저항하려는 책략을 세웠다.

1947년 12월초와 1948년 1월말 두 차례의 ‘남북노동당 연석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중간파,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남로당의 박헌영, 이승엽 등은 합작의 불필요성을 역설했고, 그 결과 남로당은 독자적으로 분단 반대의 실력투쟁을 전개하고, 남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합작은 주로 북로당이 담당하기로 했다. 북로당은 1947년 후반기부터 중간파와 특히 임정 요인들을 주목하여 대남연락부장 임해 등을 파견하였다.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성사시킬 가장 중요한 임무가 성시백에게 떠맡겨졌다. 1947년 12월 김일성은 성시백을 만나 남북합작과 민족주의자와의 통일전선에서 임정 요인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시백이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한의 거물 정치인의 측근들을 자신의 선에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성시백은 김구, 김규식 등의 우익지도자들의 측근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는데, 김규식 비서실의 권태양, 송남헌, 김구의 비서인 안우생이 대표적인 인물이고, 엄항섭도 성시백과 비밀리에 자주 만났다.

당시 남조선에 있던 나[安偶生]은 중경 시절부터 교우관계를 갖고 있던 구면 친지인 성시백 선생을 재회하였다. 그는 나의 아우[安之生]을 대동하고 찾아와 남창동에 있는 우리집에 보름 가량 묵으면서 어지럽게 변천되는 시국관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 사이에 의기상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공통된 우국지심(憂國之心)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민족의 출구에 대한 일치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체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며 단정․단선음모를 저지․파탄시키기 위하여 북의 공산주의자들과도 제휴․합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작용하기로 했다.

김규식 밑에서 민족자주연맹의 간부였던 박건웅(원래 중국공산당출신이나 중경에서 민족진영으로 전향함)이나 임정의 김찬(金贊)도 성시백 선의 핵심인물이었다. 조소앙의 비서 김홍곤(한국전쟁 직전까지 조소앙의 비서였으나 전쟁중에는 인민위원회에서 일했다), 강병찬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또 이범석 장군 밑에서 일하던 정국은도 성시백 선이었다. 성시백은 이들 민족세력의 측근들을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남북협상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김일성은 남한의 정치인들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그 호소문을 전달할 특사로 김일성은 성시백을 지목했다. 성시백은 김일성의 특사로서 김일성의 초청장을 들고 가서 직접 김구, 김규식을 만나 설득하여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를 실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성시백은 상해시절에 김구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상해 임정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프랑스 총영사의 명령에 다라서 강제로 쫓겨날 위기에 빠졌을 때, 그 당시 『상해일보』 기자로 있던 성시백이 신문 기사를 통해서 프랑스 총영사로 하여금 김구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도록 유도한 적이 있었다. 만약 즉시 조계지 밖으로 나갔다면 일본 특무대 헌병들이 즉각 체포하여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김일성은 1992년 12월, 회상하기를, “나는 앞으로 회고록을 쓸 때, 해방후 남북련석회의 대목에 성시백의 활동 내용을 적어 넣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으니, 그의 발언에서 성시백의 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가름할 수 있다.

III.

성시백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에는 국회 공작에 힘을 쏟았다. 그 당시 국회는 각양각파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은 그런 분파와 그들의 대립과 알력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안에 있는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소장파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반미, 반이승만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해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여기에서 ‘외군철퇴안’과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가에 대해서 북로당의 성시백과 남로당의 박헌영이 전술상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성시백은 “조직냄새를 일체 피우지 말고 개별적 사람들이 미군 철수와 남북협상을 호소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이고 이에 일반 국회의원들이 따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성시백은 이 문제를 가지고 1949년 4월 말에 급히 평양을 방문했으며, 중앙당에서는 성시백의 견해를 받아드려 국회프락치 조직이 긴급동의안 제출투쟁에 전면으로 나서기 보다는 국회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의견을 밝히고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국회의원들을 포섭한 뒤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정리했다. 그 때 박헌영은 동의했다. 그러나 5월초 박헌영측이 국회에서의 긴급 동의안 제출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결국 이 사건으로 국회프락치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렇지만 국회프락치사건이 남한사회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배후에는 성시백이 움직이었다. 그는 마침내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조선(정권)을 흔들어놓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갈수록 변질되어 우리의 국회가 아닌 남의 국회로 멀어져갔다.”[대한년감(1975)] 그런데 친북좌파들은 마치 국회프락치사건이 조작된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의 희생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박원순은 국회프락치사건을 고문에 의해 날조, 조작된 것으로 간주하며,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과 국회내의 반대세력인 한민당 세력의 합작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 당했다고 주장한다. 더 자세한 것은 박원순, “국회프락치사건, 사실인가,” [『역사비평』, (1989, 가을호), 227-236를 보라] 이런 주장은 노무현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과거사청산 작업의 무드에 편승하여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도진순 교수도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에서 “국회프락치사건에서 당시 정부는 매우 희박한 근거밖에 확보하지 못하였다. 증거도 불투명한 인적 증거였고, 국회의원들이 준수하였다는 남로당 7원칙도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하였다.”[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340.]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북한의 『로동신문』은 1997년 5월 26일자에 국회공작에 기여한 성시백의 활동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 5월 30일로 확정되자, 4월초부터 성시백은 국회에 진보적 인사들을 진출시켜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려는 공작을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성시백은 상당한 자금을 마련하여 20명이상의 후보를 지원했다. 성시백은 당시 민주국민당 소속의 김승원(충남 보령)에게 선거자금으로 185만원을 지급했고, 협상파로 입후보한 박건웅, 장건상, 김성숙, 김봉준, 김찬, 유석현, 윤기섭, 조소앙, 원세훈 등을 주요 대상자로 선정하여 지원했다. 그러나 선거 직전 5월 15일 성시백이 체포되는 바람에 이 지원작업은 중단된다.

성시백의 공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정부 수립이후 군대에 대한 공작 또한 두드러졌다. 군대 공작의 기본 목표는 “북침을 감행하지 못하게 군대를 약화시키는 일”에 모아졌다. 성시백은 내무성 정보국 공작원으로 1946년에 남파된 김철의 공작성과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김철은 학병 출신이었으나, 탈출하여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었던 인물이었다.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에 관계했기 때문에 이범석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활동한 인물들과 교류가 있었다. 김철은 서울에 내려와서 학병동맹에서 활동했다. 학병동맹 사람들은 광복군 계통의 사람들과 친했기 때문에, 자연히 1946년 1월 15일 창설된 국방경비대 시절부터 군 공작을 펼칠 수 있었다.

성시백은 당시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활동하던 때였으므로 송호성(광복군 출신으로 국방경비대 시절 참모장)과도 만나는 사이였다. 성시백과 김철은 당시 군수뇌급 간부들과 술자리도 함께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진해 해군통수부, 헌병사령부를 비롯해 사단급, 연대급에 이르기까지 성시백 선이 침투하고 있었다. 1949년 춘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8연대 소속 2개 대대가 월북한 사건도 성시백의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 소장이 물러나기까지 했다.

IV.

성시백은 어떻게 해서 체포되었나? 정확한 기록은 없고, 몇 가지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이후 수사당국은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 중에서 정치권에 나오지 않고, 고향이 이북에 있으면서 남쪽에 와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수사책임자로 오제도 검사가 선임되었고, 이후 성시백의 행적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었다. 1949년 7월경 수사당국은 성시백이 북로당 인물이라는 점에 윤곽을 잡았다. 그리고 1천만원이라는 막대한 수사비를 동원하여 성시백을 추적하였다. 1950년 3월 김삼룡, 이주하가 체포되었다. 4월경 서울시 남로당 부위원장이었다가 전향한 홍민표 등이 추적한 끝에 성시백이 아직 서울에 잠복해 있다는 확증을 잡았다. 마침내 5월 15일 효제동에서 성시백은 체포되었다. 전향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했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6월 9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50년 6월 27일 오전 5시, 성시백은 처형되었다.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되기 24시간 전이었다.


김일성은 성시백의 사망의 비보를 전하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시신이라도 찾으라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때, 김일성은 한탄하면서, “그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았고 혁명에 커다란 공헌을 한 우리 당의 이름 없는 꽃이었다”고 말했다. 1992년 12월, 김일성은 다시 회고하기를, “성시백 동무는 나를 위해, 자기 당과 자기 수령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싸운 충신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없었다.”


* * * * *


해방공간에서 수행한 성시백의 업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부문은 그가 김구, 김규식 등 임정요인들을 포섭하여 북으로 향하게 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게 한 점에 있다. 김일성도 이점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남북협상의 시작은 김구의 평양행으로부터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좌파 국사학자들은 김구의 평양행을 일편단심의 애국충정이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남북협상통일의 물꼬를 트는 효시(嚆矢)로 높이 평가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지하공작원으로 암약한 공산주의자 성시백이 개입된 대남공작(對南工作) 과정이나 결과적으로 북한의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된 결과를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북로당 총책 김일성의 직접 지령을 받았던 권한을 가진 성시백은 김구에게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였고, 마침내 김구를 설득,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성시백과 같은 공산주의 혁명정신에 투철하면서도 지하공작에 능수능란한 인물은 남북한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의 무드가 조성되는 21세기 소위 탈냉전시대(?)에 불필요한 인물이기에 과거 역사속으로 영원히 살아져 버렸다고 간주할 것인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이 과거에 대남공작 과정에서 양성한 남파된 성시백과 같은 수많은 공작원들은 보따리를 싸고 북으로 귀환하거나 아니면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감동하여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완전히 전향했나? 이제 김정일은 대남공작 부서를 완전히 폐지했다고 말할 수 있나? (konas)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 제공 : 코나스 www.kona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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