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나라사랑광장 나라를 지킨 위인들
임진왜란 의병 영웅열전 <1> ‘천강홍의장군’ 곽재우사재<私財> 털어 의병 일으켜 일본군에 대승 거둬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5.14 17:28
  • 댓글 0

13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20년이 되는 날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영향을 남긴 대전란이었다. 7년여에 걸쳐 지속된 전란은 조선왕조의 정치체제와 사회·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동북아시아 삼국의 국제전으로 비화됐다. 그런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개전 20일도 채 안 돼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는 등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나, 이순신 장군을 위시한 조선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본지는 임란 발발 420주년을 맞아 의병영웅 10명을 선정, 그들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위장전술 펴 공격하거나 유격전 감행해 敵 섬멸 국가 위해 헌신…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표상

▲ 홍의장군 곽재우 기록화(전쟁기념관 소장).
▲ 곽재우 유품(경남 의령 충익사 소장).
▲ 홍의장군 곽재우 기록화(전쟁기념관 소장).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계수(季綬)이며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황해도 관찰사 월(越)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과거를 보아 2등으로 뽑혔으나 발표한 글이 왕의 뜻을 거슬러 무효가 됐다.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遯池)에 집을 짓고 평생 은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 가장 먼저 사재(私財)를 털어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됐고, 10월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해 조방장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돼 삼가(三嘉)의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됐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일본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이후로 곽재우는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를 비롯해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선산부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에 제수됐으나 여러 이유를 들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1616년 창암의 강사(江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의 묘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으며,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됐다. 

이처럼 일생토록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동기는 세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 고을의 수령들이 일본군을 맞아 싸우지 않고 일가(一家)를 이끌고 피신해 버리자 이에 대한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겠다는 충의단심(忠義丹心)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둘째로는 스스로 자기 향리를 보전해 백성들을 일본군의 살육으로부터 구제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관리의 후손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지식인의 양심이었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과 세간리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ㆍ창녕ㆍ영산ㆍ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해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전술을 펴 적을 공격하거나 유격전을 감행해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처음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렀고 곽재우는 이 병력을 휘하에 두고서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곽재우의 기병(起兵)은 우선 흩어진 민심을 돌리는 데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줬다. 또한 다른 지역의 의병 봉기에도 촉진제 작용을 했다.

곽재우는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점령한 뒤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하는 일본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뒀다. 정암진의 승첩은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이 평시와 다름없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며, 일본군이 서진(西進)하는 진로를 차단함으로써 호남지역의 방어를 용이하게 했다.

한편 현풍ㆍ창녕ㆍ영산 등에 있는 일본군을 쫓아냄으로써 창녕으로 통하는 길에는 일본군의 통행이 단절됐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오직 밀양ㆍ대구로부터 인동ㆍ선산을 거치는 중로(中路)만을 택해 다닐 수밖에 없게 됐다. 또 한편 곽재우가 이끌던 의병 부대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일본 선단(船團)에도 공격을 가해 수로를 통한 통행마저 차단하는 효과를 보았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으며, 현풍ㆍ창녕ㆍ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치고, 그해 10월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 봉기는 자발적인 의병활동의 시발점이며 유격전의 시초다. 꺼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되살리고자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몸을 헌신한 곽재우의 삶의 발자취와 의병활동은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용병술은 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곽재우가 지휘하는 의병은 당시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승리함으로써 경상우도 지역의 보존은 물론이고,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한 국면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리더십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발휘했던 문무겸비, 솔선수범, 통합, 창의의 리더십으로 대별되는 위국헌신의 리더십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우리 군의 리더의 역량 강화는 물론 개인 및 기업, 더 나아가 국가의 여러 분야의 CEO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ㆍ성균관대 겸임교수>

[ 출처 : 국방일보 ]

안보단체 블루유니온에서 운영하는
블루투데이 후원도 소중한 애국입니다

기사에 언급된 취재원과 독자는 블루투데이에 반론, 정정, 사후보도를 청구 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요구처 : press@bluetoday.net

블루투데이 기획팀  blue@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블루투데이 기획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스가 이후, 日 신임 총리는 누가 될까···고노 다로 여론 조사 1위
스가 이후, 日 신임 총리는 누가 될까···고노 다로 여론 조사 1위
스가 총리 “北 미사일, 일본과 역내 평화와 안보의 위협”
스가 총리 “北 미사일, 일본과 역내 평화와 안보의 위협”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