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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생사 넘은 신출귀몰 유격전 불암산서 최후까지 항전<7> 김동원(金東元) 사관생도와 불암산호랑이 유격대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16.02.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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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생도 등 20명 후퇴 않고 유격활동 감행…주민 구출 등 활약하다 산화

서울시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불암산은 시민의 휴식과 건강증진을 위한 산행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곳이 사관생도들의 호국 염원이 서려 있는 성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암산 정상에서 남양주 별내동 방향으로 조금만 발길을 옮겨보면 사관생도 신분으로 6·25전쟁 초기전투에 참가해 유격전을 수행했던 가슴 찡한 사연들을 접할 수 있다.
 장교로 임관할 사관생도가 병사로 전투에 참전한 사례는 흔치 않다. 미국의 남북전쟁 시 남군과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 등에서 극히 일부 사례가 있을 뿐이다. 일본군은 미군의 본토 상륙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사관생도와 후보생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다.
▲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제3동굴에서 내려다본 남양주시 별내동 일대의 최근 모습.
▲ 불암산 정상 부근에 있는 제3동굴과 육군사관학교에서 설치한 안내표지판.
▲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작전상황도. 필자 제공
육군사관생도와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군사관학교에는 생도 제1기(10기)와 생도 제2기(종합1·2기)가 교육을 받고 있었다. 생도 제1기는 수업연한 2년의 초급대학 졸업 자격 수여를 목표로 전국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해 모집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13대1의 경쟁을 거쳐 1949년 7월 15일 338명이 입교했다. 그러나 그들이 입교한 후 수업연한은 1년으로 단축됐다. 생도 2기는 4년제 정규 과정을 목표로 28대1의 경쟁을 거쳐 1950년 6월 1일 334명이 정식 입교했다.
 6·25전쟁 발발 당일 제1기생 262명은 임관을 20일 남겨두고 있었다. 제2기생은 입교 25일째로 소총 자격사격이 예정돼 있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되자 육사와 보병학교 교도대대가 문산 축선에 투입됐다. 뒤이어 오후 1시쯤 사관생도를 포천 축선에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 하달됐다.
 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제1기생 262명과 제2기생 277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학교본부와 생도대 장교로 대대본부를 편성했다. 그들은 오후 8시쯤 징발된 차량을 이용해 포천시 내촌면의 303고지(부평리)에 배치됐다. 생도대대의 우측에는 전투경찰대대가 배치됐다. 생도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물리쳤지만 전황 악화에 따라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포천에서 철수해온 제9연대의 잔여병력과 함께 불암산 일대에 배치됐다. 27일 밤이 깊어지면서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학교장은 생도들이 적진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지휘체계가 마비돼 학교장의 철수명령은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생도는 28일 아침 망우리고개-용마산을 거쳐 광나루 방향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그 시기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을 쉽사리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는 사관생도들이 있었다. 제1기생 김동원 생도는 후방으로 철수하기보다는 불암산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감행하기로 하고 동료의 의사를 물었다.
불암산호랑이 유격대 편성
 강원기·김봉교·박금천·박인기·이장관·조영달·전희택·홍명집·한효준 등 제1기생 10명과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은 제2기생 3명, 제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 병사 5명으로 총 20명의 대원이 모였다. 전 대원의 투표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조영달 생도를 제1조장, 박인기 생도를 제2조장, 김만석 중사를 제3조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암호명은 ‘불암산호랑이’로 했다.
 그들은 윤용문 불암사 주지 스님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김동원 생도는 불교 신자로 평소 주지 스님과 친분이 있었다. 김동원 생도가 불암산을 근거로 하는 유격활동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주지 스님과 인근 주민의 적극적인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불암사 위쪽 석천암의 김한구 스님도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김한구 스님의 안내로 석천암 인근에 산재한 3개의 자연동굴을 은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준비를 갖춘 유격대는 홍명집 생도를 정보책으로 임명했다. 그는 믿을 만한 주민과 접촉해 북한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공격할 목표를 선정했다.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활약
 불암산유격대의 첫 번째 공격은 7월 11일 새벽 남양주 퇴계원에 있는 북한군 보급소 기습이었다. 이 작전에서 유격대는 보급품을 불태우고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봉교·박인기 생도와 제2기생 1명 등 3명이 희생되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했다.
 두 번째 공격은 7월 31일 새벽 서울시 도봉구 창동역 부근에 있는 북한군 수송부대와 보안소 기습이었다. 대원들은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보급차량과 사무실 등을 습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 도중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8월 15일 밤에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의 대상은 생도들의 모교였던 육사였다. 당시 북한군은 육사를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의용군으로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담한 공격작전을 시행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 등 6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유격대의 마지막 전투는 북으로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9월 21일 밤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에서 적의 수송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그때 많은 주민을 구출했으나 유격대원 모두가 쓰러지고 말았다.

강원기 생도의 구출과 증언
 쓰러진 유격대원 중에서 강원기 생도가 다음날 구사일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돼 군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 생도 역시 부상 후유증으로 1951년 7월 10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강원기 생도의 생존 시 증언으로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석천암 김한구 주지 스님의 손자 김만홍 씨도 당시 유격대에 식사와 물을 제공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최근 육군사관학교는 불암산유격대와 사관생도들의 6·25전쟁 전투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군사사학과 나종남 교수는 ‘6·25전쟁 초기 육사 생도 참전 전투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불암산유격대에 대한 정부 차원의 선양사업과 무공훈장 수여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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