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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작전명 ‘김포공항 탈환’<10> 강문헌 소령과 김포지구전투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16.02.1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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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김포반도 경계 취약성 간파, 김포사 급편

북한군 6사단 상대로 6월 28일까지 지연전 벌여

제1사단 12연대 2대대 등 가용부대 총동원… 작전 실패

탈환전투 주도한 강문헌 대위 희생 기려 소령 계급 추서
▲ M8 장갑차의 모습 필자 제공
▲ 제공김포비행장의 당시 모습(1950. 7. 26. 항공촬영). 전쟁사 자료 인용
▲ 전쟁과평화연구소 주관으로 김포반도의 애기봉을 찾은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 이들은 이곳에서 6·25전쟁 당시 김포반도전투 현장을 탐방하고 체험했다. 필자 제공
6·25 전쟁 초기, 위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도 발생했다. 그중 김포반도가 가장 시급했다. 당시 국군 수뇌부는 김포반도의 위협을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다. 김포반도 북단에는 6·25 전쟁 이전까지 단 한 명의 경계병력도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김포반도 북쪽 옹진반도에 제17연대를, 개성 일대에 제1사단을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옹진반도와 개성은 6월 25일 오전 중 북한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 도보수색대대장 강문헌 대위
김포반도 출동
 옹진과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 북쪽 대안을 점령해 김포반도로 도하를 서둘렀다.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김포반도에 상륙한다면 서울에서 서측방으로 35㎞에 불과한 수직 단거리 접근로를 따라 단숨에 영등포 또는 안양에 도달할 수 있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오전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수색대대에서 M8 장갑차 1개 소대(4대)를 차출해 김포반도 최북단 강녕포에 파견했다. 장갑소대는 당일 오후 7시쯤 현지에 도착했지만 적이 강을 건널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육군본부는 6월 26일 오전 김포반도의 취약성을 간파,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를 창설하고 김포읍에 있던 정보학교의 책임자 계인주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김포사에는 전투병력이 없었다. 육군본부는 장갑수색대대 제1중대의 나머지 1개 소대를 김포반도로 파견했다. 뒤이어 강문헌 대위에게 도보수색대대 2개 중대와 경무대 경비를 위해 예비로 확보했던 장갑수색대대 제2중대, 기병수색대대 제7중대를 통합 지휘해 김포반도로 출동하게 했다.
 강문헌 대위는 1922년 9월 29일 평안남도에서 출생했다. 조국의 분단과 함께 자유를 찾아 월남한 그는 1947년 10월 23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장교후보생 제5기로 입교해 1947년 12월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각급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중위를 거쳐 대위로 진급했다. 이어 육군 직할부대인 기갑연대 도보수색대대장에 보직됐다. 당시 기갑연대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으며, 유흥수 대령이 연대장으로 예하에 3개 대대가 편성돼 있었다. 제1대대는 기갑수색대대로 M8장갑차 27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대대는 기병 수색대대로 기마 300필이 편성돼 있었다. 강문헌 대위가 지휘하는 도보수색대대는 순수한 보병수색대대였다.
 ●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
 강문헌 대위가 징발된 차량에 탑승해 김포반도로 향하고 있을 때 북한군 제6사단은 공격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5일 오전 옹진과 개성을 점령한 후 여세를 몰아 당일 중으로 한강 북단의 도하지점을 점령해 김포반도로 건너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한강의 넓은 강폭과 강한 조류, 그리고 간조 시 드러나는 갯벌을 극복하지 못해 도하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한강이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한 최대의 수훈자인 셈이다. 그들은 26일 밤에야 겨우 도보부대의 도하를 완료할 수 있었다. 포병부대와 4대의 전차 등 중장비는 28일에야 도하가 완료됐다. 그때까지 육군본부는 김포반도 방어를 위해 가용한 모든 부대를 동원했다. 개성에서 철수한 제1사단 12연대 2대대를 비롯해 보국대대,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제22연대 3대대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통합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8일 오후 5시쯤 김포읍(현 김포시)을 점령한 후 진격을 계속했다. 29일 오전에는 김포비행장을 점령했다. 김포사는 전투력을 재편성해 부천 일대로 철수한 후 북한군의 영등포 진출을 저지하기로 했다. 이어 제18연대, 제22연대, 제13연대 등이 행주에서 한강을 건너 철수하자 김포공항을 탈환하기로 했다.
 제18연대 2대대가 김포공항을 목표로 역습을 시작했다. 때마침 시작된 유엔군 항공기의 공중폭격에 힘입어 역습을 시작했으나 공항을 장악하고 있던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강문헌 대위의 김포공항탈환전투
 강문헌 대위가 통합 지휘하는 기갑연대 예하 부대들은 그때까지 타 부대보다 손실이 적었다. 강문헌 대위는 자신이 김포공항탈환전투를 주도하기로 했다. 도보수색대대가 장갑중대의 엄호를 받아 비행장 탈환에 나섰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제3사단 22연대 3대대, 제1사단 12연대 2대대 등도 비행장 탈환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력은 각각 1개 소대 또는 1개 중대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강문헌 대위의 부대를 엄호 및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김도경 대위가 지휘하는 장갑2중대가 선두에 섰다. 그 뒤를 따라 대대장 강문헌 대위가 도보수색대대의 선두에 서서 비행장을 향해 진격했다. 비행장 주변에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고려해 은폐·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공격부대는 적의 사격에 노출된 채 돌격을 강행해야 했다. 북한군은 비행장 동북쪽 도로의 배수로에 매복해 있었다. 강문헌 대위가 공격을 시작하자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대대장은 대동한 정보장교 박영수 소위, 작전장교 김수동 소위 등과 함께 적에게 응사하며 전진을 계속했다.
 북한군의 사격이 계속되면서 대대장 강문헌 대위와 정보장교 박영수 소위가 쓰러졌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장갑중대 제2소대장 김정운 소위의 장갑차가 달려나갔다. 그때 적의 대전차포가 장갑차를 명중시키면서 김정운 소위가 장갑차와 함께 산화했다.
 뒤따르던 장갑중대 제1소대장 곽응철 소위의 장갑차가 부착된 기관총으로 매복해 있던 1개 분대 규모의 적과 군관 1명을 사살했다. 체코식 기관총을 비롯한 다수의 무기도 노획했다. 이어 대대장을 대신해 제8중대장 김일록 중위가 분기탱천하여 공격에 나섰으나 그가 전사하면서 김포비행장탈환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강문헌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소령 계급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15-6-451)하고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제1권 669·685쪽)와 전투사 38도선 초기전투(서부 전선편, 280~282쪽)에 그의 활약과 전사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대장 강문헌 대위, 그와 함께 전사한 박영수·김정운 소위 등에게는 무공훈장조차도 수여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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