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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박격포 되찾아라” 3문 회수·30여정 소총 노획<17> 이태식(李態植) 대위와 미원지구전투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16.02.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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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배 넘는 병력에 포위돼 용전분투 … 차량·박격포 등 철수 못해

야간공격으로 작전 성공했으나 北 반격에 이태식 중위 전사
北 진격 저지해 국군이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하는 시간 확보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한강방어선에서 철수한 국군은 7월 5일 평택에서 부대개편을 단행했다. 건군 이래 최초로 제1군단사령부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모체로 창설됐다. 예하 부대로 수도사단, 제1·2사단이 편입됐다. 그때 제1사단 제13연대에 편입된 이태식 중위는 사단과 함께 지연전을 계속하면서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북쪽의 거리고개에 도달했다. 7월 13일이었다.
▲ 이태식 대위와 제1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의 진격을 저지했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북쪽 거리고개의 최근 모습. 현지에서는 ‘부흥재’라고도 한다. 필자 제공
▲ 이태식 대위의 자력기록표 표지 상단.
6·25 전쟁 직전 특수부대원의 양성과 활용
 이태식은 1926년 10월 11일 황해도 벽성군에서 출생했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성장한 이태식은 1948년 8월 9일 육군사관학교 장교후보생 제7기로 입교했다. 그해 12월 21일 육군소위로 임관한 그는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주둔하고 있던 제1연대에 부임했다.
 그는 평범한 후보생이었다. 그러나 소대장 직을 수행하면서부터는 뛰어난 자질을 발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태식 소위는 연대에 부임한 직후 은평구 수색동에 위치하고 있던 육군수색학교(1949년 ‘38부대’로 개칭)에 입교해 6개월간 특수부대원 교육을 이수했다.
 당시에는 장교 양성 교육을 3~4개월에 마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따라서 임관한 장교를 대상으로 한 6개월간의 재교육 기간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이 교육을 받으면서 대북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임무요원으로 변신했다. 이어 그는 의정부지구 38도선 경계에 투입된 제1연대로 돌아와 제4중대 부중대장으로 동두천 축선에서 북한군의 동태를 살피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후방지역에서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에서 발생한 ‘여순10·19사건’ 등 공산주의 세력과 연계된 무장폭동이 체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지리산 일대는 빨치산의 거점이 돼 있었다. 국군은 전문 특수요원을 투입해 후방지역을 안정시키려 했다. 중위로 진급한 이태식이 차출돼 제5사단 제15연대 제10중대장에 보임됐다. 1949년 10월 21일 자였다.
6·25전쟁의 발발과 제15연대의 제1사단 편입
 이태식 중위가 제15연대에서 지리산 일대의 무장공비 소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제15연대는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열차 편으로 이동해 문산 축선에 증원됐다. 그러나 북한군의 T-34 전차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제1사단과 함께 일산-행주를 거쳐 한강을 건넜다. 이어 수원-용인을 거쳐 평택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제1사단은 대대적인 재편성에 착수했다. 기존의 제13연대를 제1대대로 축소 편성했다. 이어 제15연대를 흡수해 제13연대 제2·3대대로 개편했다. 그때 이태식 중위는 제13연대 제10중대장을 맡게 됐다. 제11연대와 제12연대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거리고개전투와 이태식 중위의 용전분투
 부대를 정비한 제1사단은 조치원-음성-괴산을 거쳐 7월 12일 낮 12시 미원면사무소에 지휘소를 마련했다. 제13연대는 미원 북쪽 11㎞ 지점의 거리고개를 점령했다. 그리고 제3대대를 전방인 부흥리에, 제2대대와 제1대대를 후방인 거리고개 정상에 배치했다.
 7월 16일 오전 6시쯤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전방에 배치된 제3대대를 3개 방향에서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태식 중위를 비롯한 장병들의 용전분투가 계속됐지만 6배나 되는 병력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오전 9시쯤 포위된 제3대대는 활로를 찾아 분산 철수해야 했다. 그때 대대 보급차량 1대와 81㎜ 박격포 4문을 철수시키지 못했다.
 연대장은 “빼앗긴 박격포를 되찾아오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대장은 “목숨 바쳐 적을 격멸해야 한다”며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밤 9시쯤이었다. 이태식 중위가 앞장섰다. 방심한 적 250여 명은 모여서 저녁식사 중이었다. 그들 옆에는 아군 보급차량 1대가 있었다.
 기습공격에 놀란 북한군은 40여 구의 시체를 버려둔 채 분산 도주했다. 제3대대는 부흥리 일대를 수색해 박격포 3문을 회수하고, 30여 정의 소총을 추가로 노획한 후 철수를 서둘렀다.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태식 중위는 후위를 자청해 대대의 철수를 엄호했다. 북한군의 반격은 집요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전사했다. 후위를 담당하던 많은 병사들도 전사하거나 부상했다.
 이태식 중위는 전사했지만 제13연대와 제1사단 장병의 용전분투는 북한군의 진격을 21일까지 저지해 국군이 낙동강방어선까지 조직적으로 철수하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대위로 추서됐다.
 오늘날 많은 차량이 거리고개(19번 도로)를 통과한다. 이들이 60여 년 전 고(故) 이태식 대위와 제1사단 장병의 용전분투를 기억하기를 기대한다.
<사단법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
이태식 대위? 이능식 대위?
기록 오류로 혼동
월남 패망 당시 베트남 공사로 재직하다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5년 동안이나 억류됐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은 한강전투에서 활약한 유상재 소령(본보 3월 30일자 12면 참조)과 이태식 대위의 동기생이다. 그런데 그는 유상재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이태식(군번 11959)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이로 미뤄 볼 때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은 이태식(李態植)과 이능식(李能植) 등이 혼용되고 있다. 육사졸업생 명부와 장교연명부, 행자부 상훈대장, 전쟁사 등에는 이능식으로 돼 있고, 육군본부 병적대장과 자력기록표에는 이태식으로 돼있다.
 이처럼 이름 오류 때문에 혼동을 겪고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가 1~5% 정도 된다. 당시에는 잉크와 펜으로 이름을 기록했는데 후일 색깔이 바랜 글자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거나 당시 사용한 한자 약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류인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어릴 때 사용하는 이름과 성인이 돼 사용하는 이름이 따로 있고, 행정관서에 등록된 이름과 실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른 경우도 많았다. 성인이 돼 이름을 바꾸는 개명 사례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태식 대위의 경우도 그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알려지지 않은 6·25전쟁영웅’은 오늘 자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장병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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