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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② 자랑스런 여자배속장교, 여성들을 군대로 이끌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1.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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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법 남침을 강행하는 북한괴뢰집단 ⓒ 한국학중앙연구회 캡쳐

여자배속장교, 여자의용군을 창설하기까지

여자배속장교들은 임관한 후, 다수는 각 여학교 교련교사로 보직되어 학도호국단 교련교육을 담당했다. 교육대장 김현숙 예비역 중위등 일부 여성장교들은 중앙학도훈련소 여자훈련소에 잔류하여 학도호국단의 간부 여학생과 여자청년단 간부 및 대한부인회 간부들의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이후 여자훈련소가 해체되자 김현숙 교육대장 외 2명은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고, 김정례 예비역 소위 등 3명은 대한부인회 여자청년단에 들어가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괴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김현숙 예비역 중위 등 3명은 복귀했다. 김현숙은 많은 학도의용군이 자원하여 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고 국방부장관에게 학도의용군의 성격과 같은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하여 승인 받았다.

7월 하순경, 전선이 밀리자 다급한 국방부는 방송으로 배속장교 소집 지시를 하달했다. 그때 방송을 듣던 박을희 예비역 소위, 대구여중 교련교사로 근무하던 하복조 예비역 소위, 그리고 하복조 집에 거주하던 김영숙, 류순숙, 안명례 예비역 소위 등 5명의 배속장교는 복귀하여 김현숙과 합류했다. 이로서 김현숙, 이범희, 김순화, 박을희, 하복조, 안명례, 김영수, 류순숙, 박성희 여자배속장교 출신 9명은 김현숙을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여자의용군 모집을 재가 받은 김현숙 예비역 중위는 배속장교 5명을 통해 대구, 부산 지역에서 여자의용군을 모집했다. 1950년 9월 1일, 부산에서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창설되자 김현숙이 교육대장으로 취임했다. 복귀한 여자배속장교들 역시 중대장 및 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여자의용군에 참여했던 여자배속장교들은 다음과 같다.

▲ 당시 훈련중인 여자의용군 ⓒ 해병닷컴 캡쳐

전란중, 여자의용군에 지원한 용감한 여성들

한편 김현숙은 여자의용군 모집에관한 담화문을 직접 발표 했다.

“금일 23일 오전 10실 육군본부 대한 여자의용군 편성책임관 육군소령 김현숙 여사는 부산지구 계엄사령부에서 국내·외 출입기자단과 접견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대한 여자의용군은 창설한지 오래이나 그동안 경비 기타 여러 가지 사항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으로 그 모집을 하지 못하였으나 남하괴뢰 격멸 초비상 시국 하에 있어서 국민으로서 여자만이 안일하게 국난을 방관하는 태도로 있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앞으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니 일반의 협조를 바란다. 그리고 여자의용대 군 모집은 항간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강제가 아니고 언제까지라도 지원제이며 이들 지원자는 약 2주일 동안 훈련을 시켜서 일반 행전기관에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여자의용군은 계몽반, 전투반급 간호반을 양성할 것이며 통신반도 개설할 에정이다. 이렇게 해서 여자는 총후에 있어서 남자 대신 역할을 다함으로써 국가에 봉공하자는 것이 여자의용군의 중요 취지다. 그런데 요즘, 모병을 실시하고 있는 중대한 위란기 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비겁한 남자들은 이를 회피하고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며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경향이 많은 모양인데, 이러한 남자들의 비겁한 태도에 많은 우리 여성들은 통한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 시국을 재인식하여 국가총력으로 최후의 평화를 획득할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라며 강력히 권고했다. 담화문 발표 효과는 컸다. 실제 모집인원은 500명이였지만, 지원자는 2천명이 넘어 4:1 경쟁률을 보였다. 심지어 혈서를 써서 지원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선발방법은 구두, 필기, 신체를 평가했고, 신체평가가 가장 엄격했다.

선발된 여자의용군 1기생은 대부분이 학교 교사이거나 중학교 졸업자와 대학교 재학중인 학생들이었다. 이 시대에 이 정도의 여성들은 중상류층 이상의 경제 및 사회적 여건을 갖추여성들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용군에 지원한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자의용군 1기는, 500명이 선발되었다. 9월 1일,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설치된 여자의용군교육대에 집결했다. 여자의용군교육대의 초대 교육대장은 여자의용군 창설을 주도한 김현숙 소령이 취임했다. 여자의용군교육대는 대대급이였고, 당시 대대는 대대본부와 권총중대, M1소총부대, 칼빈소총중대 및 의무대로 편성되었고, 장교 18명과 사병 33명으로 구성되었다.

▲ 복원된 여자의용군 군복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1기 합격자들은 2~3일 준비기간 동안 군복을 지급받고 머리를 단발머리로 자른 후, 각 중대로 편성되었다. 여자의용군 제1기생들을 교육시킬 교수부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출신 위주로 편성되었다. 교수부장으로는 손희선 중령이 임명되었다. 손희선 중령은 과거,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헌병학교 대대장으로 있으면서 교장대행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여자의용군을 교육시킬 교수부 역시 손희선 중령이 직접 선출했다.

여자의용군이 받을 훈련은 제식, 총검술, 각개전투, 분대전투, 화기학, 실탄사격, 독도법, 구급법, 군법, 정신교육 등 보병 위주로 편성되었다. 여성으로서 필요한 군대위생 문제는 같은 여성인, 여성장교가 담당했다.여성들에게 훈련의 강도는 높게 느껴졌지만, 한국여성 특유의 인내심과 대부분 교사, 학도호국단 교육을 받은 재학 중인 여학생들였기 때문에 제반교육에 대한 이해력이 빨랐다.

한참 교육중인 1950년 9월 12일, 이승만 대통려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 공보처장 김활란 박사, 주한 미 대사와 같이 여자의용군 교육대를 방문하여, 교육생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높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부산시내를 행진함으로써 국토방위에는 남,여가 따로 없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열렬한 격려와 환영을 이들에게 보냈다.

9월 26일, 여자의용군 제1기생은 500명중 491명이 수료를 함으로서 육군 최초의 여자의용군이 탄생했다.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29일 정부가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도 서울로 이전함으로서 여자의용군교육대도 서울로 따라 올라오게 되어 서울 일신초등학교로 이동했다. 사실 다른 곳들은 북한괴뢰군과 국군,유엔군간의 치열한 전투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자의용군 1기를 배출한 여자의용군교육대는 1950년 10월 12일부로 육군본부 직할 여자의용군훈련소로 승격되고 훈련소장에는 김현숙 소령이 취임했다.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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