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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③ 전투 현장에 뛰어든 자랑스런 여자의용군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1.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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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현장에 뛰어든 여군 ⓒ 경향신문 캡쳐

정훈대대에 배치 된 여자의용군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밀리던 전세는 뒤바뀌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말이 되면서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초산 북쪽 압록강까지 진출하고, 미 제7사단이 혜산진에,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일대에 도달한 상황에서 국군 제1군단도 청진일원까지 진격하통일을 바라보게 되었다.

북한 지역을 하나하나 점령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과 북한주민들이 국군이 순조로운 협조를 유도하기 위해, 대북선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국방부는 정훈국장 이선근 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년 11월 24일, 정훈 제1대대와 제2대대를 창설했다.

정훈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북한 수복지국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토대로 정훈공작 임무를 시작했다.

1.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과 민족정책의 정당성을 인식시키고
2. 6. 25전란의 진상과 공산분자들의 죄악상을 폭로하며
3. 민주주의적 이념과 생활방식의 체득과
4. 국군에 대한 신뢰감과 대군협조를 강화하고
5. 공산주의 잔재의 급속한 청산 등을 각종 교화, 계몽, 선전 등을 통하여 달성함으로써 조속한 전쟁종결과 통일조국부흥의 초석을 튼튼히 한다.

정훈 1대대와 2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1대대는 이명흠 소령을 대대장으로 대대본부와 3개 중대로 편성되어 장교 62명, 사병 28명, 문관 180명 등 총 270명이다. 1대대는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2대대는 김병율 소령을 대대장으로 대대본부 3개 중대로 편성되어 장교 45명, 사병 30명, 문관 120명 등 총 195명이었다. 2대대는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3개도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정훈부대는 다른 부대와는 성격이 달랐다. 임무 자체가 정치, 경제, 문화, 사상전을 통해 군사행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실제 활동면에서 대민, 대군, 대적 등 모든 면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의 활약도 필요했다.

결국 1950년 11월 30일부터 정훈 제1대대는 본 여군에 배속장교 출신 소위 서복녀와 여자의용군 1기생 34명을 배속했다.

여군들, 대민교육과 계몽에 나서다

정훈 제2대대 역시 장교 40명 중, 여군장교 16명과 사병 30명 전원이 여자의용군 제1기생으로 배속했다. 이어 제2대대는 사리원(現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진중신문 발행 및 선무공작을 실시했다.

▲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 된 1.4 후퇴를 드라마로 재현한 모습 ⓒ 드라마 <서울1945> 장면 캡쳐

그러나 정훈 제1대대와 제2대대가 북한 수복지구내로 출동한 시점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는 상황이었다. 정훈대대 요원들은 북한지역이 다시 수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남한지역에서 우리 국민과 국군을 대상으로 정훈활동을 실시했다.

제1대대는 대전에 본부를 두고 충남, 전남, 전북, 경남, 경북에서 정훈활동을 시작했다. 제2대대는 안동에 본부를 두고 일부병력은 강원도, 경상북도 일부에서 정훈활동을 시작했고, 제1, 3군단 예하 장병들의 대내 정훈교육을 실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때 여자의용군 제2기생이 수료했다. 1951년 1월경부터 여자의용군 2기생들도 정훈 2대대에 배치되어 임무수행 중에 있던 여자의용군 1기생과 합류했다.

한편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과 주요지역을 재탈환했다. 이어 정훈부대는 재탈환지역들에 투입되어 정훈활동을 벌였다. 특히 여자의용군 제1기 김명자 소위는 L-29 경비행기를 타고 적 지역 상공에서 적의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임무를 자신해서 수행했다. 북한군이 총격을 가하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다 받쳐 임무를 완수했다.정훈대대는 남원으로 이동하여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고,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그리고 각 작전지구내의 주요 거점에서 대적 및 대민 선무활동에 계속 나섰다.

▲ 국군과 유엔군에게 항복한 북한군 병사들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그 결과 정훈대대에 속해있던 여군들은 북한군 약 1200명을 귀순시키는데 성공했다. 전방지역에 배치된 군부대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장병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높였다. 민간인들에게는 멸공정신을 주입시키고 문맹을 퇴치하는 등 주민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활약했던 여군의 한 사람인 김명자 소위는 여자의용군 1기생으로서 정훈 제2대대에 편성되어 활동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년 11월 18일부로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19세의 젊은 소위로 정훈 제2대대로 배치명령을 받아 출발했하였다. 정훈 제22대대 위치는 당시 후퇴 중으로 아군 제2군단사령부가 주둔하던 최전방 강원도 영월이였다. G.M.C를 타고 눈에 덮인 대관령 고개를 넘어 임지에 도착했다. 제6중대 보도장교로 보직을 받았다. 임무는 진중신문 발간, 적의 투항 권유 전단작성과 전단 살포등이었다. 본인은 최전방으로 나가서 적 상공에서 잔단을 뿌리는 임무를 자원하여 김봉혜 소위하고 둘이서 출발하였다. L-9경비행기를 탈 때는 나 혼자만 타게 되었다.”

이와 별도로 1951년 12월 30일부터 1952년 2월 26일까지 홍소운 대위(여자배속장교 출신, 정훈장교 제2기로 임관 후 여자의용군 창설에 직접 참여했음)가 조장이 되어 남자통역장교 5명과 함께 여자장교로 오현애 중위, 이가영 중위 그리고 나머지 사병2명이 포로 신문관이 되어 백야전 전투사령부에 특파되었다.

공비토벌작전이 끝나자 이어 육군은 1952년 9월 25일부로 정훈대대를 해체하고 여자의용군도 육군본부 여군중대로 복귀했다.

한편 전쟁기간중 희생된 여군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51년 2월 4일 경남 창원에서 대적 귀순 공작활동을 하던 곽용순 하사가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했다. 1952년 5월 1일에는 제8사단 대적방송요원으로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이등중사 조홍순도 적의 포탄으로 인해 둔부와 옆구리에 파편상을 입었다. 일부 정훈대대 여군들은 실종되는 일도 있었다.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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