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현대사 여군 참전사
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환 활약 ④ 조국을 지키려 해병대에 지원한 용감한 여성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1.31 12:59
  • 댓글 0

▲ 해병대 1기 기념 사진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해병대의 탄생 배경

일본으로부터 해방후, 북한은 남한에 남로당을 조직했다. 남로당은 각종 폭동, 파업, 시위 그리고 선동을 자행했으며, 각계각층에 남로당원을 침투시켜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남로당으로 인해 급기야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났다. 동년 10월에는 제14연대에 침투했던 이들이 ‘여·순 반란’을 일으켰다.

국군은 여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부대를 동원했다. 이때 해군도 동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해안봉쇄작전, 상륙작전이 필요하게 되자, 1949년 4월 15일. 곧 해군에서 전환된 병력 380명과 함께 해병 제2기 440명을 해군에서 인계받아 최초 2개 대대 규모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해병대의 첫 임무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948년 12월 28일에는 제주도로 이동하여 한라산 공비들을 토벌하고, 4.3 사건으로 피폐해진 제주도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곧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인원증대에 필요성을 느낀 해병대사령부는 제주도에서 해병대원 모집을 시작했다. 이에 제주도의 많은 젊은 학도들과 청년들이 해병대에 지원했다. 일부 학생들은 혈서까지 제출했다.

▲ 6.25 당시 제주도에서 해병으로 자원 입대한 강춘자씨 - 서귀포 인터넷신문 캡쳐

해병대에 자원해서 지원하는 여성들

해병 4기생을 모집할 때 자원 입대한 사람들은 1,500명의 학생들과 일부 교사들로 구성되었다. 어린 여학생들과 미혼여교사 그리고 제주도로 피란 온 젊은 여성들까지 포함하여 126명의 여성들도 포함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은 “조국의 위기를 앉아서만 볼수 없다는 그 뜻은 갸륵하지만 여자가 그 힘든 훈련과 위험한 전투 현장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잘 달래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얼마후 똑같은 보고를 받고서는 “현장으로 출동하는 남자 해병대원들을 대신하여 여자들에게는 행정, 서무, 그리고 후방지원업무를 맏기는 것도 좋겠다” 라며 생각을 바꿔 입대를 허용했다.

여성들이 해병대에 지원한 동기는 이 시기 국토는 영남지역 일부와 제주도만 제외하고 북한에 점령당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제주도에 쳐들어와서 가만히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해병대에 지원해서 북한군 한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라는 각오로 지원한 여성해병대원들도 있었고,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안되던 시기라 “제주도에는 빨갱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지원한 여성들도 있었다.

한편, 주변의 권유로 자의반 타의반하는 마음으로 지원한 여성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군에 자원해서 국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같았다. 이와 관련한 당시 여자해병대원들이었던 여성들의 증언도 찾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제주도 4.3 사건이 일어났다. 중학교 입학한 후 가담학생 3명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해병대 모집에 지원했다. 당시 조승옥 교장선생님은 내가 외동딸이라는 이유로 말리셨고, 약혼한 상태라 부모님도 강력히 말리셨지만 자원해서 지원했다.” 라고 장부연씨(당시 재주한림 3학년 재학중 입대)가 증언했다.

당시 대정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사활동을 하다 입대한 이순선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모슬포에 있는 대정중학교를 졸업 후 보급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해병모집 공고문을 보고 4.3 사건 당시 빨갱이가 싫었었는데 나라를 위해서 내 한 목숨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모슬포 경찰서에 가서 지원하였다. 모슬포 초등학교에서 신체검사(제주도립병원장 주관)를 하여 지원자 30여 명 중 13명만 합격했다. 합격통지를 받고 동네에서 학생, 동네주민 등이 태극기에 글씨를 써서 주어 머리에 두르고, 8월 27일 제주동초등학교에 집결하여 이발하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관했다. 이때 어머니께서 오시더니 “죽지말고 살아오라”는 말을 하고 돌아갔으며,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제식훈련을 받은 후 8월 3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여자들만 입대식을 했다.”

선발방법은 신체검사와 간단한 구두시험으로 이루어졌다. 합격자들은 1950년 8월 27일, 28일 이틀에 걸쳐 입대준비를 하였는데, 머리가 긴 여성들은 단발머리로 자르고 군복 등 군용 물품들을 보급 받았다.

8월 31일, 정식으로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입대식을 치루면서 최초로 여자해병이 탄생했다.

▲ 당시 진해에서 훈련받던 여성해병들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여성해병들의 훈련과정

1950년 8월 31일, 입대식을 치루고 바로 다음날인 9월 1일 아침, 제주항 산지부두에서 해병 제3,4기와 같이 해군수송선 LST를 타고 출항했다. 이들은 9월 2일 저녁즘에 진해항에 입항하여 해군신병교육대에 도착했다.

신병교육대에 도착한 여자해병들은 해군신병교육대 특별중대로 편성되고 2개 소대로 나누어졌다. 당시 신병교육대장은 강기천 중령이었고, 중대장은 김성대 대위였다. 얼마간은 내무교육, 제식훈련, 구보 등 기초훈련을 받은 후, 해군 신병교육대 남자교관들에게 인계되어 정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각개전투, 분대전투, 총검술, 소총분해결합, 수기통신, 응급처치, 사격훈련등을 교육받았는데 남자 해병대원들과 똑같은 훈련과정이었다.

이들 해병여군들은 본래 학생신분으로서 어린여자들이 다수였다. 한참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시기에 고향을 떠나 훈련소의 열악한 환경에 처해 지내면서 힘든 군사훈련을 받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킬 수만 있다면 참고 이겨야겠다는 정신력으로 6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10월 10일 부로 126명 전원 수료했다. 이후 수료를 마친 여자해병들은 당시 학력과 경력등을 고려하여 차등으로 계급을 부여받았다.

대학교를 다녔거나, 재학 도중 입대하거나 졸업한 사람들은 소위 계급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입대한 여자해병들 그리고 교원양성소 교육생 및 중학교 이상 졸업생들은 경력과 나이를 고려하여 병조장(현재 계급 상사), 일등병조(현재 계급 중사), 이등병조(현재 계급 하사) 그리고 삼등병조(현재 계급 병장)등 차순으로 부여받았다. 중학생신분으로 입대한 나머지 90명은 일등수병(현재 계급 상병) 계급을 달았다.

한편 수료식은 강기천 신병교육대장이 주관하여 훈시를 한 후 소위로 임관한 신영희가 답사를 했다.

“우리도 여성입니다. 그러므로 화장도 하고 여성복도 있어야 합니다. 결혼하여서도 가사일을 돌보고 자식을 키우는 현모양처를 동경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고보니 나라가 없었고 그 후 광복은 되었으나 남북으로 쪼개져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제 벼랑 끝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입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을 메고 나라를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창 젊은 나이니 그래도 괜찮지만 이 자리에 함께 한 어린 소녀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겪을 고통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어쩌다가 이러한 비극만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까?”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안보단체 블루유니온에서 운영하는
블루투데이 후원도 소중한 애국입니다

기사에 언급된 취재원과 독자는 블루투데이에 반론, 정정, 사후보도를 청구 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요구처 : press@bluetoday.net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http://www.imhc.mil.kr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올해 추석 최고의 덕담은 “화천대유 하세요, 3억 5천만원 → 4000억원”
올해 추석 최고의 덕담은 “화천대유 하세요, 3억 5천만원 → 4000억원”
美 국방부 “한국보다 더 강력한 동맹 없어”
美 국방부 “한국보다 더 강력한 동맹 없어”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