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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⑬ 바다 위의 나이팅게일 6.25전쟁에 뛰어들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2.2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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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장교후보 제3기생 기념촬영 - 대한민국 국방부 여군 참전사 자료 캡쳐

전쟁 발발과 해군 간호장교들의 움직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해군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장교들은 전장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온 해군 및 해병대 부상자들을 진료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간호 인력이 모자라자 1950년 10월, 진해 해군신병교육대를 수료한 여자해병 중 장교로 임관한 2명이 간호 및 위생장교로 배치되었다. 함께 여자해병으로 지원했던 어린 여성들은 간호보조역할 부여받아 부족한 간호 인력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1년 7월경부터 고지쟁탈전이 벌어져 부상당한 장병들이 늘어나자 간호 인력은 다시 부족해졌다.

이에 간호장교후보 제3기생을 모집했고 11월 1일자로 임관했다. 그러나 부상자는 늘어가기만 했다.

1952년 6월 6일 늘어나는 부상자를 효율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신병교육대가 사용하던 막사를 인수했다. 병원 용도로 알맞게 개조한 후 제5, 6, 7, 8병동으로 사용했다. 동년 12월 22일에는 11병동을 신축하여 환자들을 계속 수용했다.

후방에서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

휴전선 부근의 간호장교들의 간호가 치열했듯이 후방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전쟁 전 인천해군병원에 배치되었던 간호장교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로 철수하여 1950년 7월 27일에 개설된 목포도립병원에서 간호임무를 수행했고 인천해군병원의 일부 의료진들은 제주에 위치한 해병대사령부에 야전병원을 창설했다.

이에 인천해군병원에서 근무했던 일부 간호장교들은 제주야전병원으로 파견되어 해병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진료 및 간호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950년 8월 17일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통영상륙작전을 실시할 때 제주야전병원 소속 군의관 1명과 간호장교 1기생 이광희 소위와 2기생 김주만 소위가 전투부대에 배속되어 부상당한 해병대 장병들을 돌보았고 부상당한 북한군 포로도 진료했다.

▲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시에도 계속되었다. 사진은 흥남철수 당시 사진 ⓒ 다음 누리꾼 블로그 캡쳐

북한점령지역에서 해군 간호장교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북진한 후 북한점령지역에서도 계속 되었다.

해군본부 작전명령에 의해 원산도립병원을 인수했다. 인천해군병원을 해체하고 소속되었던 의무인력은 원산도립병원으로 이속시켰다. 원산도립병원의 이름을 원산해군병원으로 바꾸고 제3해군병원으로 지정했다.

1950년 10월 26일 제1해병대대가 원산에 상륙한 후 원산, 고성, 함흥지구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군의관 2명과 해군 간호장교 1기생 이광희 소위, 유순덕 소위, 조성일 소위, 배소제 소위 등 4명이 배속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15일 철수할 때까지 이들은 약 2개월간 북한지역에서 전방전투부대의 위생담당관들에게 약품과 의료자재를 지급하고 구급환자들의 후송과 처지 등 업무를 수행하느라 교대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당시 북진하던 전선 상황은 ‘해군 일화집 제5집’ 에 실린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해병대가 북진할 때 군의관 2명과 간호장교 4명(이광희, 유순덕, 조성일, 배소제 소위)이 배속되었다. 약 2개월간의 북한지역 작전 중 해병대와 함께 수많은 전설을 누비며 역경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던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은 “내 다리를 내놔! 내 눈을 찾아줘!” 하며 소리치며 울부짖던 전우들, 그리고 해군묘지에 하얗게 칠해진 나무 십자가들이 빽빽하게 있던 그 영상을 이따금 기억 속에 떠올리며 전우들의 명복을 빌곤 했다.

▲ 고지쟁탈전당시 간호장교들의 활약은 매우 컸다. ⓒ 백봉 story 다음 카페 캡쳐

고지쟁탈전 시기

한편 전선은 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38도선 부근까지 다시 밀려났다. 전선은 38도선으로 고착된 가운데 1952년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가 벌여지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결려되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한 고지라도 점령하고 전선에 유리하게 양상 시키려는 의지였다.

이로 인해 부상자는 더욱 늘어갔다. 이에 간호장교후보 제4기생을 모집하여 12명을 임관시켜 부족한 간호 인력을 보충했다.

그러나 간호 인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이에 해군본부는 11월 1일부로 서울 답십리에 제5해군병원을 신축했다. 제5해군병원의 임무는 전방지역에서 후송된 부상자들을 1차 진료 후 장기입원환자들을 후방 진해해군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제5해군병원에 이속된 간호장교는 제1기생 조성일 중위, 제2기생 설문수 중위, 제3기생 유기순, 유영하 소위, 제4기생 김용이 소위 등이 배치되어 입원실과 병동에서 부상자를 진료하며 수술지원 및 의무행정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 병원선에서 해군 간호장교들 ⓒ 국방부 여군 참전사 자료 캡쳐

병원선

1951년 2월 15일 원산항 부근에서 대파된 520톤 FS 영등포호에 의료장비를 설치하여 병원선으로 개조했다. 당시 병원선은 이 함선 한 대 뿐이었지만 이 병원선에서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이 컸다.

이 병원선에는 해군 간호장교 제1기생 편남분 중위, 이완숙 중위가 근무했으나 1951년 10월 10일 제3기생이 임관한 후 고금례 소위, 김창열 소위, 박정실 소위 등 3명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이 병원선은 전선에서 진해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환자들을 중간에 치료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해병대 장병들이 고지쟁탈전을 수행하다 부상당해 온 경우가 많았는데 간호장교들은 이들을 정성스레 치료하고 간호하여 감동을 받은 장병들이 퇴원할 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선에 상황은 당시 참전 해군간호장교 1기생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해군 최초이자 마지막 병원선이었던 영등포호에서도 간호장교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함내에 들어서면 외래환자 접수처 다음이 조제실이고 함내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오밀조밀하게 손바닥만한 공간이라도 최대한 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중략) 수용되는 상이장병은 대체로 당시 중동부 전선에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으로 용맹을 떨치던 해병들로서 치료를 받고 퇴원할 때에는 정이 들어 눈에 눈물이 어리는 것이 상례였다. 입원환자는 간호장교 편남분 중위와 이완숙 중위가 책임을 지고 간호하였으며, 매주 월요일에는 어린이 음악대 혹은 정훈 음악대에서 위문 연주를 해주었고, 해군 부인회 혹은 사회단체로부터의 위문이 그칠 날이 없었다”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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