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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⑪]한번 정치범은 영원한 정치범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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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태진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김태진(요덕수용소, 1988~1992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불운했던 가족사와 탈북

나는 1956년 4월 3일 중국 길림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중국인민해방군 소속으로 한국전쟁 참전을 위하여 북한에 들어왔다가 어머니를 만나 전쟁에 같이 참전하셨다. 휴전 후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따라 북한에 오려 하셨으나 당시 중국공산당 당원이던 아버지의 신분상 복잡한 절차로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 겪은 비극적인 혈연관계, 그리고 장성하고 나서도 인고해야했던 씁쓸했던 가족 사이의 불화가 내 탈북 충동을 더욱 부채질한 것 같다.

가족사도 가족사지만 결국 주요한 탈북 동기는 북한 사회 특유의 견딜 수 없는 억압과 그로 인해 야기된 자유를 향한 목마름이었다. 결국 나는 결혼을 한 몸임에도 아내를 두고 1986년 3월에 중국으로 월경을 감행했다. 16개월 동안 풍요와 자유를 만끽하면서 생활에 적응할 즈음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 북송 되었다. 당시는 탈북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기에 보위부는 나를 완전히 반동 간첩으로 취급했다. 설상가상으로 짐 꾸러미에서 성경책까지 나와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나는 처음에 함경북도 회령 구류장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곳에서 겪은 고통은 차마 말로 이루 다 할 수가 없다. 8개월 간 구류장에 갇혀있는 동안 겪은 가장 고된 고문은 수면 시간을 제외한 시간 동안 정좌 자세로 꿇어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차라리 구타가 낫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바로 몽둥이가 날아왔다. 위생 상태 또한 열악하기가 그지없었다. 식사 후 그릇을 용변기에서 씻어야 했고 겨울이 되면 추위도 견디기 힘든데 벼룩에 이까지 들끓으니 말 그대로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한 번은 차라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하고 쇠못을 통째로 집어 삼킨 적도 있다. 수술을 받기도 전에 못이 대변으로 나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 고통스러운 8개월간의 조사과정 동안 나는 주님께 의지하며 나의 신앙과 신념을 더욱더 굳세게 했다.

그 후 나는 함경남도 요덕의 15호 관리소 혁명화구역으로 이송되었다. 그때가 1988년 3월 31일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나는 일주일 정도를 경비실에서 머물다가 작업반 독신중대에 배치되어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을 맡았다. 그 돌들은 당시에 한창 건설 중이던 혁명화구역 발전소 수로공사에 사용할 것들이었다. 우리는 뼈만 남은 허리에 큰 돌들을 지고 길고 긴 해를 저주하면서 일을 했다. 수감된 이후에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여기서 죽는다면 이름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살아나가자면 가장 필요한 것이 8개월의 구류장 수감기간 동안 상할 대로 상해버린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식당에 배치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힘이 없어 일을 못하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일을 할 힘도 없었지만 보통은 계획량을 채우기 위해 다들 없는 힘이라도 내서 계획을 완수한다. 나는 혼이 나더라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일을 못하는 척했다. 그리고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담당보위부원을 찾아가서 사정을 했다.

“저를 식당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몸을 추슬러서 다른 소대원들보다도 더 열성으로 일을 잘 하겠습니다.” 내가 하도 안쓰러웠던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담당보위원은 뜻밖에도, 처벌은커녕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후 나는 식당에 배치되어 2개월을 일했다.

식당에 배치되어 일을 했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몸은 회복될 줄을 몰랐다. 내 몸은 오히려 후에 방탄벽 공사를 하면서 회복됐다. 그때 내 몸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수용소에서 친해지게 된 강필수가 공사장 식당근무를 하면서 나를 돌봐준 까닭이다. 이때 강필수가 몰래 주는 밥을 안혁과 함께 나눠먹으면서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고된 수용소 생활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후 학교지붕공사, 양어장공사, 무밭 만들기 작업 등을 하다가 1989년 5월 독립소대장을 맡게 되었다. 내가 소대장을 하면서 옥수수 생산량이 급증하였는데 당시 농사가 너무 잘돼서 수용소 정치부장이 크게 만족하였을 뿐 아니라 포상으로 우리에게 남는 옥수수를 주었다. 농사하고 남는 생산량을 줄 정도로 농사가 잘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당시에 나는 보위부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때 나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보위부원 중 한명이 1작업반 담당 보위부원이었다. 이후에 종종 내가 속한 소대가 1작업반에 배치되어 일을 하곤 했는데 가족세대반인 1작업반에 배치되게 된 것도 그 보위부원이 나를 아꼈기 때문이다. 자기 밑에 있어야 수월한 일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내가 있는 소대를 1작업반 지원사업에 동참시키곤 했다.

나는 방탄벽공사를 하면서 최영화라는 여자와 몇 번 만났는데 이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독립소대장에서 해임되고 행정처분을 받아 구류장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요덕수용소 정문에 위치한 구류장에 수감되어 한 달을 지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 하나로 버텼다. 수용소에서는, 한번 구류장에 수감될 때마다 형기가 1년 연장된다. 나는 구류장에 한번 수감되었기 때문에 형기가 1년 연장되어 4년의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구류장 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공업반 분조장을 하기도 했고, 화목조, 벌목조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1작업반에 지원을 나가 일을 하기도 했는데, 담당 보위부원 덕분에 비교적 수월한 일을 맡았다. 보위부원들이 먹을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거나 화목공을 일을 하면서 혁명화 구역 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나물을 뜯으러 돌아다니다가 완전통제구역 금광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1991년 가을에 식당에 다시 배치가 되어 1994년 4월 해제가 될 때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다.

혹독한 수용소 생활

나는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보위부 조사 과정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노동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수용소 보위부원들은 나를 하루 12시간의 노동으로 내몰았다. 힘이 없어 일을 잘 못하다 보니 실신할 때까지 참나무 장작으로 때린 후 벌거벗기고 수갑을 채워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 놓기도 했다.

하루는 비 오는 날에 공사장의 생석회 위에 나를 앉혔는데 빗물과 생석회가 반응하여 열이 발생하면서 엉덩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90년 가을에는 양수철이라는 보위부원이 불붙은 장작으로 다리를 심하게 구타하고 심지어 지지기까지 했다. 그 때의 그 화상자국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 그 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상습적인 폭력과 함께 수감자들의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심각한 영양 상태였다. 수용소에서는 인간성의 망각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다. 나를 포함한 수감자들은 뱀, 개구리 알, 풀뿌리, 쥐 등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철저히 개인주의에 국한된 생활을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취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주변 일에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누구에게 담배가 있고 누구를 통하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고급정보에 모두들 관심이 많다.

나도 수용소 수감 초기에 내가 처한 상황을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주변과 수용된 사람들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7년 정도 수감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17년 된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곳을 탈출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도주하다 잡히면 무조건 공개총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재판도 없이 수감되기 때문에 가족들도 우리가 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수용소에서는 자신 이외의 사람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너무 가까운 사람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요덕수용소의 황금기 1988년

내가 들어갔던 1988년은 혁명화 구역의 황금기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88년을 전후로 가족세대의 해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갔을 당시에 혁명화 구역에는 1,000명 이상의 수감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900명 이상이 가족세대였다. 당시에 있던 가족세대들의 대부분은 노동당 간부로 있다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김일성 우상화 작업·김정일 후계자 구축과정에서 숙청된 사람들이었다. 특히, 가족세대의 경우는 연좌제로 손자들까지 끌려온 경우가 많았다.

요덕수용소는 원래 완전통제구역이었으나 1980년대에 혁명화 구역이 생겼다. 나갈 기약도 없이 살았던 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혁명화 구역으로 이송된 가족세대들은 대부분이 해제가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요덕이 생긴 1960년대에 수감되어 혁명화 구역으로 이송되지도 못한 가족세대들은 죄 아닌 죄로 평생을 그것도 대를 이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하니 그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

수용소 생활을 버티게 해준 김봉숙과의 만남

나는 구류장에서 나와서는 독신 중대에서 소대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불꽃과 같은 연정을 나눈 김봉숙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깊은 생각과 나에 대한 애정 등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우리는 보위부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을 이어 나갔다.

당시 보위부원은 일부러 나를 봉숙이가 있던 2작업반에서 거리가 꽤 되는 독립분조에 강제 배치하였는데 그래서 더욱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같이 있는 순간이 찰나와 같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닌 수용소에서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 바로 봉숙이와의 사랑이다. 안타깝게도 1991년 6월 이후로는 내가 1작업반에서 식당일을 하게 되었으므로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1992년 4월에 수용소에서 나오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정치범은 영원한 정치범

집에 돌아가니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만나서 얘기를 나누니 내가 정치범 수용소에 갔다 왔다는 사실이 나중에 아이들에게 사회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결국 이혼으로 관계를 끝맺게 되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내가 사실 당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고백하시는 게 아닌가. 전쟁 당시 부상을 당해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자 나를 입양하셨다는 사실을 털어놓으시며 이제 부모 자식 간에 의절을 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그게 북한의 식량 사정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1996년 2~3월의 일이었다.

수용소에 갔다 온 뒤 내게 붙은 정치범이란 꼬리표 때문에 직장을 구할 때에도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구한 일자리가 평성시 상하수도 건설대라는 곳이었는데 직원 모두가 전과자로 낙인이 찍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평판이 아주 좋지 않은 회사였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탈북 기회를 다시 한 번 엿보고 있었지만 북한 사회가 워낙 감시가 엄중한 터라 그 기회를 잡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사회 전체적으로 통제가 느슨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식량 사정이 전보다 더욱 악화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주민들이 식량을 구하러 나선 것이다.

나는 이 혼란을 틈타 97년 4월 7일에 다시 한 번 탈북을 시도했다.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에 들어갔는데 순찰차에 걸려 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연민을 유발하기 위해 나를 체포한 중국인들에게 내 출생지가 중국이라는 점, 아버지가 중국인이라는 것, 고로 나 또한 중국인이라는 것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내 설득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도와주겠노라는 약조를 해주었다. 나는 그 후 인삼밭에서 7개월 동안 일을 하다가 나중에 어느 중국 동포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몽골까지 거쳐 가며 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드디어 2001년 6월 21일, 대한민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나원 생활 중 경주, 울산 등의 도시를 거치며 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북괴가 그리도 소리 높여 우짖던 ‘인민의 낙원’이 바로 대한민국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본인의 능력만 허락한다면 선택의 자유가 펼쳐진 이곳에 있다는 자체가 정말 큰 기쁨이 아닐 수가 없다. 앞으로 나는 이곳에서 개인의 영달이 아닌 나눔을 미덕으로 여기는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리라.(Konas)

김태진(요덕수용소, 1988~1992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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