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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증언⑫]국군포로의 자식이어서..
  • 블루투데이
  • 승인 2012.10.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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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기철

본 내용은 지난 21일 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주관으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시한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김기철(요덕수용소, 1991~1994 수감)씨 증언의 일부 내용임.(편집자 주)


차별과 수모로 얼룩진 28년 인생의 종착역...요덕수용소

나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였다. 국군포로는 매우 나쁜 성분으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항상 차별과 수모를 겪으면서 살았다. 국군포로의 자식이기 때문에 군대와 대학에도 갈 수 없었고 학교에서도 멸시와 수모를 당해야 했다.

북한에서는 원래 국군포로의 자식들은 사상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인민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다 1980년에 김일성의 교시로 국군포로의 자식들도 군대에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에 김일성은 "계급적으로 토대가 나쁜 집안의 자식들도 인민군대에서 사상교양을 철저히 시켜 우리 사람으로 만들라. 그래서 민족통일의 위엄을 달성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던 나는 김일성의 교시로 인해 인민군대에 입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대에서도 차별적인 대우는 계속 되었다.

나는 입대 후 2군단에 배치되어 민경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사상동향이 나쁘다는 이유로 민경 배치에서 제외되었다. 아버지가 국군포로이고 남쪽에 친척이 있기 때문에 전방에 배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내가 원하는 부대를 골라서 갈 수 있었지만 군대에 와서까지 차별을 당하는 것이 서러울 뿐이었다. 11년의 군 생활 동안에도 나는 국군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렇게 차별로 얼룩진 군 생활이 끝나가던 어느 날, 요덕으로 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제대를 불과 몇 개월 앞둔 1990년 12월 김정일의 지시로 탄광에 무리배치를 받게되 강력히 항의했다.

"장군님 방침이다. 어렵고 힘든 곳에 젊은 당원들이 가서 탄을 많이 캐야 나라의 전기 사정이 풀린다." 나의 항의에도 틀에 박힌 방침만 전달할 뿐이었다. 나는 악이 받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라가 어렵고 힘들면 장군님 아들들을 보내라 하시오. 나는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군에서도 계속 따돌림을 당했는데, 이제 제대해서 탄광에 가라고 하니 억울해서 못 살겠소. 나를 믿고 신뢰한다면서 죽어도 아깝지 않은 탄광에 보내는 게 진짜 믿는거요? 장군님 아들들이 나라를 위해 몸소 탄광일을 한다고 하면 안 갈 사람이 어디 있겠소? 장군님 아들들이 가면 진정 나를 믿는다는 것으로 알고 군말 없이 가겠소."

장군님의 명령에 불복한 것도 모자라 장군님 아들들이나 탄광에 보내라고 악을 쓰다니 반동도 이런 반동이 없을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못할 짓이다. 그러나 28년을 국군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당의 필요에 이용당해온 나는 잃을 것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한 말이었다.

나는 그 길로 총정치부 보위부로 끌려가게 되어 6개월 동안 조사를 받은 후 1991년 5월 12일 요덕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국군포로의 자식으로서 겪은 28년의 수모를 참지 못한 결과였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킨 대가로 얻은 오리사 배치

나는 외래자반에서 한 달을 지낸 후 오리사로 배치되었다. 오리사는 보위부원들에게 바칠 오리, 닭, 거위를 기르는 곳으로 수용소 정치부 부부장 직속기관이었다. 혁명화구역에 있지만 혁명화구역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오리사에는 건강하고, 수용소 내에 아무런 인맥이 없는 사람을 주로 보낸다.

수용소에서는 배급량이 적을 뿐 아니라 고기는 거의 공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배고픈 사람을 오리사에 보내면 닥치는 대로 오리를 잡아먹을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수용소에서 오래 지낸 사람은 수감자들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몰래 오리나 닭을 팔아먹을 수도 있다. 고기가 귀한 까닭에 특히 가족세대로 들어온 사람들은 옷이나 가재도구를 오리·닭과 바꿔 먹곤 했다. 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어서 수감자들과 안면이 없었던 데다가 건강한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리사로 배치하기에 적격이었다.

내가 건강한 상태로 수용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6개월의 보위부 조사과정 동안 고문을 받지 않고 정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잃을게 없었다. 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이상, 이미 죽음은 각오한 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총정치국 보위부에 끌려갔을 때, 때리거나 고문을 한다면 조사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자살을 할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나의 당당한 모습에 보위부원들은 당황하다 못해 어이없어 했다. 처음에는 공갈 협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진심이었다.

"나는 28년을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고 자랐소. 나는 이 사회에 더는 미련이 없소. 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데 내가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당신들의 조사에 응할 것 같으오? 차라리 죽고 말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내가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보위부원들은 조서를 받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6개월의 보위부 조사기간 동안 구타나 고문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식사도 인민군대에서 먹던 그대로 제공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건강을 유지한 상태로 수용소에 수감되게 된 것이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킨 대가로 얻은 오리사 배치는 내가 수용소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내가 만난 가족세대

오리사로 근무하면서 나는 주로 가족세대들을 만났다. 독립적인 생활을 한 탓에 혁명화구역 내 수감자들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가족세대들은 김치와 같은 저장음식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치를 얻어먹기 위해 가족세대들과 만나곤 했다. 대부분의 가족세대들은 들어온 지 오래됐고 언제 나갈지 기약도 없었기 때문에 닭이나 개를 키워서 새로 들어왔거나 곧 해제될 사람들과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는 집들이 더러 있었다.

그때 있던 가족세대들 중에는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의 처형(妻兄)네 가족, 1호 비행사인 김형락 가족, 1983년 미그 19전투기를 타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의 누이들, 국제태권도 연맹 오스트리아 사무국 북한 특사로 나가 있었던 이영규 가족, 서해함대 사령관 방철갑 가족, 항일투사 김익현 가족 그리고 오길남의 가족인 혜원·규원이네가 있었다.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의 처형은 연좌제로 들어왔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후계자 구축 작업이 진행될 때 김정일은 후계자 재목이 아니라고 반대했다가 그것이 죄가 되어 본인은 중앙당 온천 휴양소에 감금당하고 다른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연좌제로 처벌된 김영주 가계 중에서 김영주의 처형네만 혁명화구역으로 왔고 다른 가족들은 모두 완전통제구역으로 갔다고 들었다.

귀순한 이웅평 대위의 누이 두 명도 가족과 함께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었었다. 국제태권도 연맹 오스트리아 사무국 북한 특사였던 이영규는 국가 기밀 누설죄로 들어왔다. 1992년쯤에 들어왔다가 나보다 빠른 1994년도에 해제되었다.

1호 비행사 김형락은 김정일과 후계자 다툼을 벌였던 김일성의 또 다른 아들인 김평일과 친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왔다. 김형락은 김일성 전용기 비행사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양반이었다. 내가 해제된 이후에 수용소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서해함대 사령관이었던 방철갑은 혼자 들어왔었으나 죽을 거 같아 가족들도 수용소로 들여보냈다고 했다. 김일성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김익현도 가계누설죄로 혁명화구역에 들어왔었다. 그는 70년대에 수감되었다가 1992년 김일성 80돌에 해제되어 나갔다.

서독집 이야기

하루는 정치부 부부장이 올라와서는 나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혜원이네에 땔나무를 해주라고 했다. 혜원이네가 서독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당시에 혜원이네는 서독집이라고 불렸다. 그렇게 나는 통영의 딸로 알려진 신숙자 모녀와 교류를 시작했다.

당시에 수용소 담당 보위부원들은 신숙자 모녀 때문에 곤혹스러워했다. 당국에서는 신숙자 모녀가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더욱 신경을 쓰라고 쪼아대는데 특별히 나오는 건 없으니 결국 수용소 측에서 알아서 챙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위부원들이 직접 나무를 해주고 집안 살림을 도와줄 수는 없고 다른 수감자들도 관리해야 하니 정치부장도 국가보위부에서 안 잡아넣어도 되는 걸 잡아넣었다고 투덜대곤 했다.

당시에 혜원이 엄마인 신숙자씨는 몸이 안 좋아서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리사에 나와 앉아서 새끼 오리들을 돌보는 일을 도와주곤 했다.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어린 혜원·규원 자매가 도맡아 했다. 아침도 자신들이 해서 먹고는 학교에 갔다. 한번은 자매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침을 하는데 다 젖은 생나무라서 불이 잘 붙지 않고 집안에 연기만 가득 찬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혜원이네 나무를 할 때는 일부러 송진이 있는 부분을 잘게 쪼개서 갔다 줬다. 송진이 있으면 불이 잘 붙기 때문이다.

혜원·규원은 나이도 어렸지만 키도 작았다. 그래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물지게를 지는 것을 힘들어했다. 요덕의 겨울은 유달리 혹독하였는데 겨울에는 보통 어른 허리만큼 눈이 쌓이곤 했다. 그 정도면 키가 작은 혜원이, 규원이에게는 목까지 오는 높이였다. 겨울에는 그 아이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물지게도 너무 커서 지게를 지면 바케스가 땅에 닿았다. 정치부 부부장의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아이들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무도 신경 써서 해주고 물지게도 아이들 키에 맞게 맞춰주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 혜원이네 아버지가 신숙자 모녀의 사진과 편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사진도 내가 있을 당시에 찍은 것이다. 신숙자 모녀가 보위부원들과 어디를 다녀오기에 애들 엄마한테 어디를 다녀 오냐고 물었더니 "애들 아빠한테 사진 보내려고 분주소에 가서 사진도 찍고 편지도 쓰고 왔지"라고 대답했었다.

애들 엄마랑 애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수용소에 들어왔겠는가. 자기들 뜻과 달리 혜원이 아버지가 탈출을 했으니 괘씸죄로 가족들을 수용소에 몰아넣은 것이었을 뿐이었다. 신숙자 모녀는 연좌제의 전형적인 피해자이다. 수용소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혜원·규원이네 만큼 마음에 남는 사람은 없다.

국가에 충성을 다 바친 결과, 요덕 혁명화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의 사위인 윤처두는 가계누설로 혁명화구역에 잡혀 들어왔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 김익현도 가계누설로 잡혀 들어온 경우이다. 그는 김정일의 출생에 대해 발설하였다 하여 수용소에 20년 가까이 수감되었었다. 부주석이었던 박성철의 아들 박춘식은 김정일 당자금 건으로 들어왔다. 박춘식의 혐의는 해외 당자금을 빼돌렸다는 것이었는데 요덕에서 해제된 이후에도 당자금 건이 해결되지 못해 처형당했다.

왕재산 지하당 조직 책임자 권영벽의 조카 권세봉, 당중앙위원회 대남담당 비서의 사위 김광남 등도 혁명화에 잡혀 들어왔었다. 권세봉은 국가 보위부 해외담당국 책임지도원을 하다가 요덕에 왔고 김광남은 중앙당 조사부 소속 간첩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요덕수용소에는 어느 면으로 보나 국가에 절대충성하고 김일성에 절대복종만 했을 거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사람들이 말 한마디 잘못해서 혹은 모함을 당해 수용소에 끌려 들어온 것을 보니 국군포로 자식으로 차별만 당하고 살아온 내 인생이 그렇게 억울한 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국가에 죽도록 충성하고 제 입도 제 맘대로 놀리지 못하는 집단 뻐꾸기가 되어 산다 하여도, 언제 어떻게 모함을 당할지 몰라 항상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북한 인민들의 숙명이다.

횃불사상 조직

내가 있던 당시 김일성 종합대학 교원이었던 이만호라는 사람이 들어왔었다. 그는 횃불사상 조직 건으로 1994년도에 들어왔다.

횃불사상 조직은 김일성 종합대학, 이과대학, 함흥수리대학 등 북한 전 지역의 20개 대학에서 비밀리에 활동했던 지하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투쟁목적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이론에 불과한 공허한 사상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계몽시키는 것이었는데 투쟁강령까지 있었다.

이만호에 따르면 회원들은 횃불사상 마크가 새겨진 무언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이만호처럼 일부 교원도 가입이 되었다고 했다. 조직의 한 명이 변절하는 통에 조직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는데 제일 죄가 경했던 이만호와 다른 한 명만 혁명화구역으로 끌려왔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북한처럼 통제된 사회에서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주체사상을 비판하는 모임을 만들었다는 것이 참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온 나라를 군대가 통치하는 북한에서 이러한 모임이 성공을 하려면 무장투쟁을 했어야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대학까지 간 엘리트들이 그렇게 좋은 모임을 만들어 놓고는 왜 이론적으로만 했냐며 애꿎은 이만호만 다그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94년 6월 29일 요덕에서 해제된 뒤에 집으로 돌아갔으니 열일곱에 군대에 입대하고 난 후 꼭 14년만이었다. 14년 만에 어머니의 얼굴을 봤을 때 어찌나 눈물이 흐르던지 요덕에서 보낸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요덕수용소에서 살아나와 14년 만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 최고의 기적으로 기억될 것이다.(Konas)

김기철(요덕수용소, 1991~1994 수감)

제공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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