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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의 독립운동가 <어윤희>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3.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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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1881~1961]

■ 훈격 : 애족장 / 서훈년도 : 1995년

■ 공적개요

ㅇ 3.1운동 당시 개성에서 만세시위 주도 후 체포되어 옥고
ㅇ 신간회와 근우회 개성지회 창립 및 주역으로 활동




개성 운동의 주역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당시 개성에서 만세시위 주도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신간회와 근우회 개성지회 창립 및 주역으로 활동한 어윤희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1년 충북 충주군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1894년 에 결혼하였지만 남편이 동학군이 되어 전사하자 10여 년간 황해도 평산, 해주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후 경기도 개성에 정착한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정춘수의 설교에 감명 받아 기독교에 입문하고, 1909년 6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갬블에게 세례를 받았다. 미리흠 여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호수돈여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졸업했다. 이후 선생은 전도부인이 되어 애국계몽운동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1919년 전민족적 항일투쟁의 추진체였던 민족대표들은 종교조직 및 학생조직을 통해 3.1운동의 지방 확산 및 대중화를 계획하였다. 당시 개성의 여자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을 지내던 선생은 조선독립선언서 80매를 받아 개성 읍내에서 배포하는 등 개성지역 3.1운동의 도화선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곧바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4월 11일 보안법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몸은 비록 갇혔으나 유관순 등 옥중의 동지들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투쟁 감행하는 등 옥중에서도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생은 이듬해 4월 28일 출옥 후에도 개성에서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신앙 이외에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교육활동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1920년 7월 15일 개성여자교육회 창립에 동참하여 국권회복과 여성의 권익 신장을 목표로 강연 활동을 전개하여 민족운동의 여성지도자로 역할을 다하였으며, 1920년 12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1회 남감리회여선교대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독립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의 측면 지원에 앞장섰다.

1927년을 전후하여 민족운동 역량강화를 위한 중심기구의 단일화 움직임이 가시화 되고, 신간회가 출범하였다. 이에 선생은 신간회 개성지회 설립 준비 단계부터 간사로 참여하여 1931년 1월 임시대회 준비 및 해소까지 활동하였고, 1929년 6월 15일 근우회 개성지회 창립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여성계몽과 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1년 5월 신간회해소 이후에도 선생은 민족운동단체에서 물러나 아동복지활동에 헌신하면서 일생동안 민족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개성 3.1운동의 주역 어윤희 (1881~1961)

어윤희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경 개성시내 각 거리에서 옷 속에 숨겨간 독립선언서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근의 주민에게 나누어 주면서 '조선독립선언서' 임을 알리고 서울의 3.1만세운동을 전하며 개성 3.1운동 발발에 도화선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개성에서 감리교를 만나 근대적 여학교 교육을 받다.

어윤희(魚允嬉 1881-1961)는 1881년 6월 20일 충북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어윤희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워 학업의 기초를 닦았다. 아버지가 늘 강조했던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 란 글귀를 가슴에 새겨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어윤희는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894년에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군이 되어 집을 떠났으며 불행하게도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창졸간에 남편을 잃은 어윤희는 시댁을 떠나 본가로 돌아와 지내던 중 1897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을 떠났다. 아마도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녀는 10여 년을 황해도 평산,해주 등지를 전전하다 1909년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어윤희는 우연히 개성 북부교회에서 정춘수(鄭春洙)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아 기독교에 입문하여 북부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춘수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세례받고 1906년 전도사로 개성북부교회에 부임하여 사역 중이었다. 이시기 기독교와의 만남을 어윤희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충효사상을 익힌 까닭에 나라를 위해 나서려는 마음에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어윤희는 1909년 6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개성북부교회 등에서 전도하던 갬블(gamble, rev. 甘保利)에게 세례받았다. 이후 갬블의 주선으로 개성의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남감리회에서 세운 선교학교로 호수돈여학교와 함께 개화기 및 일제시대 개성지역 여성교육의 산실로 평가받던 곳이었다. 당시 이 학교에는 윤치호가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초기 남감리교 선교 및 교육활동에 중심적 인사였으며 문명개화론을 주장하고 문명자주독립과 민권운동을 위한 국민계몽에 뜻을 두었다. 배재학당에서의 그의 교육관이 충군애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복음전도와 봉사를 중시한 점으로 보아 이 시기의 윤치호는 자주독립,부국강병에 주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국민계몽관이 미리흠여학교의 학생교육 속에도 녹아들어 비록 여성들이지만 민족과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선각적인 여성으로 교육시키고자 하였을 것이다.

어윤희는 재학 중 1910년 8월 국권상실의 비보를 듣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할 듯 여겨 자결코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던 중 죽음으로 고통을 잊기보다 미력이나마 독립운동에 헌신함이 진정한 애국임을 깨닫고 우선 학업에 정진해 힘을 키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녀의 나라사랑은 한일합병조약의 발표로 자결순국한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 황현 등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보여주었던 그 마음이었다. 이미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그리고 국모시해사건을 경험했으며 그 과정에서 남편도 잃고 부모도 여의고 홀로 고향을 떠나 멀리 개성까지 온 어윤희에게 나라마저 일제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현재의 삶을 되짚어 본 어윤희는 새로운 삶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고자 했으며 국권상실의 치욕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재학시절 이미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져 개성동부교회 부속학교의 교사로 활약하였고,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뒤 호수돈(好壽敦)여학교에 입학하여 35살 되던 1915년 3월 졸업하였다. 호수돈여학교 역시 남감리교 계통의 여학교로 그 교육이념은 주체적인 여성 양육과 생활개선 등의 실용적인 여성교육과 민족독립을 위해 내조하고 헌신하는 민족여성을 양육하는 독립교육을 겸비하였다고 하겠다. 어윤희는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민족독립을 위해 희생할 준비된 여성으로 재무장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다져나갔다.

전도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희생정신을 키우다.

그런데 어윤희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개성은 상당히 완고한 곳이었다. 1930년 당시 개성을 묘사한 잡지 別乾坤의 '개성은 가족제도가 너무나 엄격하고 개성여자들은 아직도 '쓸치마'를 완전히 벗지 못한 채 구도덕과 인습에 눌려 머리를 들 생각조차 못하였다.'는 기사를 보면 그보다 20여년 전인 1909년경 개성에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던 어윤희에게 닥친 실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윤희 역시 당시 조선여성이 처한 이중삼중의 억압 하에서 생활했지만 그 상황에 순종하지 않고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게 되었다. 또한 개성은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 하에서도 호수돈여학교와 한영서원의 애국창가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개성상인들의 일화배척운동을 통한 투쟁이 지속되는 등 배일사상이 강한 지역적인 특성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이 시기 개성은 당시 미국 남감리회 전도사업의 중요한 근거지였으며 그 중심지가 바로 개성북부교회였다. 이 교회는 초기 한국 감리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지도인사들을 배출했던 요람이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민족문제를 염려하던 민족적 지도자들이 모여 교류를 맺고 인맥을 형성해 가던 역사적 의의가 큰 곳이었다. 즉 정춘수를 비롯, 오화영, 신석구 등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3명이 개성북부교회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바로 어윤희가 세례받고 교회에 다니면서 미리흠여학교에서 교육받던 때였다. 즉 그녀 역시 오화영이나 신석구 등이 가진 기독교사상은 물론 구국의 방편이 된 계몽운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다져나갔다. 특히 오화영은 1910년대의 무단통치 하에서 한영서원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던 애국창가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었던 민족투쟁적인 경력이 있는 인사였다. 또한 신석구는 종교를 개인적 신앙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국민계몽의 길이자 국권회복운동의 길로 인식한 것이다. 신석구 역시 기독교신앙을 독립운동의 방도로 인식했다는 것과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개성북부교회의 교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이들은 구국을 위한 민족의식과 독립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세상과 민족을 구원하고 복음전파를 통한 개인, 가정, 사회, 국가를 변혁하려는 기독교사상을 만나 새로운 길을 열고자 했다.

이러한 교육활동과 개성북부교회의 항일투쟁의식이 강한 지도급 인사들의 항일의식 고취는 1910년대 호수돈여학교와 한영서원에서 전개된 애국창가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어윤희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리흠여학교,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4월 남감리회 전도부인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어윤희는 1919년 개성의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하고 그 학교의 기숙사사감으로 지내면서 학생들에게 신앙적인 면 이외에도 자립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1923년 졸업하였다.

개항 이후부터 일제 초기까지 선교사를 대신하여 조선의 여성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한 이들이 전도부인이었다. 이들은 전도 외에 성경반 운영, 사경회 인도, 야학강습 등의 교육활동도 겸하여 여성교육과 국민계몽의 장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사경회가 성경을 쓰는 것 이외에 위생학, 한글, 혼례, 금주, 단연교육, 풍속개량, 가정교육, 조혼의 폐해, 자급방침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내용을 교육하며 학교교육에서 소외된 일반 여성들에게 근대적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또한 1920년대 이후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실시한 성경야학이나 강습소 교육운동을 통해 국어, 산술, 한글 신철자법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어윤희는 물론 이시기의 전도부인은 1910년대 무단통치라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외부와 차단되었던 여성들을 공적인 활동영역으로 이끌어 냈으며, 나아가 공적인 영역에 나온 여성들을 성경반, 사경회, 부흥회 등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민족과 여성문제를 자각하도록 길을 열어준 공로자였다.

이와 같이 근대적 여학교교육을 통해 그리고 신앙교육과 전도활동을 통한 인류구원과 사랑이란 기독교적 세계관을 다져가면서 어윤희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권상실의 충격으로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던 그녀 역시 인간의 권리와 남녀평등사상을 인식하게 되었고 세계사적인 넓은 안목도 갖추었다. 더하여 항일구국운동에 용감히 투신할 수 있는 강력한 신념도 갖게 되었다. 이 점은 어윤희가 1919년 3.1운동 당시 개성지역 독립선언서 전달역할을 주저없이 감당했던 용기있는 투쟁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윤희의 민족의식은 상술한 교육과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다양한 민족운동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져지고 확고해져 갔다. 어윤희가 기독교신앙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일제 경찰 역시 그녀의 신변을 늘 감시하고 있던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개성 3.1운동에 불을 부치다.

개항 이후 추진된 정부주도의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 선교사들의 여성교육운동을 통해 깨어난 여성들은 점차 진정한 사회구성원이 되어 갔으며, 한편으로 여권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의 진전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조직적인 항일 여성투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경험은 1910년대의 준비기간을 거쳐 3.1운동에서 다양한 활약으로 이어졌다. 경기도 개성 3.1운동발발의 주역이 바로 어윤희였다.

1919년 전민족적 항일투쟁인 3.1운동의 추진주체였던 민족대표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종교 교단조직과 학생조직을 이용하여 3.1운동의 지방 확산 및 대중화를 계획하였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오화영목사는 개성지역의 연락을 책임지고 2월 중순부터 적임자를 물색하며 아우 오은영과 실행계획을 세웠다. 1919년 2월 28일 개성에 급파된 오은영은 독립선언서 100매를 개성북부교회 목사 강조원에게 전달하였다. 강조원은 독립선언서 배포방법을 모색하다가 3월 1일 아침 이 선언서를 전도사 신공량에게 전달하였다. 신공량은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직접 배포하지 않고 배포할 사람을 찾았지만 선뜻 위험을 감수할 자가 나서지 않았다. 이 거사를 비밀리에 전해들은 어윤희는 자신이 선언서를 배포하겠다고 의사를 전하여 배포자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독립선언서 약 80매를 전달받은 어윤희는 전도부인 신관빈과 함께 오후 2시 경 개성읍내 만월정(滿月町), 북본정(北本町), 동(東) 본정으로 갔다. 두 사람은 그 일대의 거리에서 '조선독립선언서' 라고 알리면서 조선인과 부근의 주민 수 십명에게 배포하였다. 이후 개성지역의 3.1운동이 송도고보와 호수동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어윤희는 곧바로 일본경찰에 끌려갔지만 독립선언서 배포로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개성지역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이란 그녀의 독립선언서 배포는 3.1운동 당시 이루어낸 여성의 역할 중 빛나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에 연행된 후 어윤희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해 4월 11일 보안법위반으로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정작 독립선언서를 어윤희에게 전달한 강조원, 신공량은 7개월 집행유예 3년형으로 확정된 것과 비교해 보면 3.1운동 당시 그녀가 감당한 역할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어윤희는 재판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어윤희 역시 유관순이나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들처럼 감옥에서 쉬지 않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함께 수감되었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옥중투쟁은 쉬지않고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중인 어윤희를 비롯한 여성투사들은 투쟁의지를 더욱 강고히 하여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에 옥중만세시위 투쟁를 전개하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무도한 탄압과 모진 악형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여성투사들은 1920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3.1운동1주년 기념 만세투쟁을 감행한 것이다. 1920년 2월 말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어윤희는 유관순 등과 함께 이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통방이라는 감방안의 비밀통신방법으로 17개 여자감방의 세를 모아서 3월1일 오후 2시 일시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투쟁을 전개하였다. 간신히 시위를 진압한 일인교도관들은 주도한 사람을 색출하고자 여성 투옥자들을 고문하였으며 유관순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또한 어윤희는 일본인 간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밥을 나르던 우리나라 여인을 붙잡아 반민족적인 행동을 질책하고서 따끔한 훈계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한 뒤 도리어 독립투사들의 비밀연락원 역할을 감당케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렇게 1년 이상 투옥되었던 어윤희는 1920년 4월 28일의 사면령에 따라 출감하게 되었다.

어윤희는 순수한 나라사랑으로 참여한 3.1운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사회구성원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를 계기로 민족자존과 독립을 위해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절감하고 이후 민족독립운동의 대열에 적극 헌신하게 되었다.

1920년대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개성지회의 중심인물이 되다.

출옥 후 어윤희는 개성에서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신앙이외에 민족의식고취와 계몽교육활동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어윤희는 3.1운동에서의 항일투쟁경력을 인정받아 개성지역의 종교 및 민족운동 단체에서 주요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선 어윤희는 개성지역을 넘어 감리교내의 여성지도자로 성장하여 1920년 12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1회 남감리회여선교대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될 정도로 중요인사로 부상한 것이다.

이 시기 어윤희는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우선 해외에서 작전을 위해 잠입한 독립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위험한 임무를 감당하였다. 예컨대 1920년 10월 발생한 대한독립의군부 군자금모집사건이 그 사례다.

1919년 4월경 간도에서 조직된 대한의군부의 단원인 李貞基와 白二興와 奉在龍과 鄭憲台등이 1920년 10월경 군자금모집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3.1운동 참여 후 북간도 방면으로 도주하여 대한의군부에 가담했던 인사들이다. 이 단원들은 남감리파 교인으로 개성으로 잠입해 활동지원을 위해 어윤희와 접촉하였으며 교회 기숙사에 은신처를 확보하고 간도본부의 후속부대투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후속부대의 투입이 난관에 봉착하자 작전을 변경하여 소수단원으로 개성경찰서 습격계획을 세웠다. 당시 어윤희는 해외의 무장투쟁과는 달리 일제의 철통같은 폭압적인 식민통치 하에 놓인 국내의 무장투쟁은 성과가 적은 무모한 방략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어윤희는 습격계획의 무모함을 강조하면서 차후의 대의를 도모할 것을 강력히 권유한 것이다. 단원들은 장고 끝에 이를 수용하고 후일을 기약하고 지지세력 확대의 방향으로 작전을 변경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성경학원 학생 혹은 교회 부속학교 교사나 서당교사로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향모색은 기독교신앙으로 무장한 어윤희의 독립운동방략이 실력양성론 혹은 준비론적 운동방략이 대체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세력에 기초했던 점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어윤희의 활약상은 1920년대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에서도 빛을 발했다. 즉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와 근우회의 개성지회 등에서 지도급인사로 이 지역 민족독립투쟁과 여권신장활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폭압적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기만적인 통치정책으로 전환하자 제한적이나마 한국인의 사회운동도 다소나마 활동 공간을 갖게 되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1920년부터 전국에 여자청년회가 다수 발족되면서 여성교육과 의식계몽운동이 활발해졌고, 신교육여성들 주도의 여성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성운동 내부에서 제기된 여성해방은 사회개조의 기초로써 이는 곧 반봉건 근대화의 기치를 확립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남녀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여성운동의 선결과제는 바로 여성의 계몽과 교육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주도된 1920~23년의 민족운동은 교육계몽운동적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다. 초기의 선도 단체가 1920년 4월에 서울에서 창립된 조선여자교육회였다. 이 단체는 국권회복과 여성의 권익신장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조선여성의 교육계몽을 실행하려는 취지에서 출범하였으며 특별 강연회와 지방 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다른 지역의 계몽단체 설립을 촉진하는데 한 몫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개성에도 이어져 1920년 7월15일 이 지역 여성지도자들이 개성여자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어윤희 역시 이에 동참하였다. 개성여자교육회는 3.1운동 직후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조성하려는 분위기 하에서 신교육여성들이 주도해 여성의식을 계몽시켜 여성의 인격과 사상 및 행동을 개조할 목적으로 창립했던 것이다. 즉 조선여자교육회와 같은 국권회복과 여성의 권익신장을 목표로 하며, 강연 등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의식을 자각시키고 세계관을 넓혀주고자 하였다. 이것은 후일 (1929년 경) 교육회 회장에 취임했던 어윤희의 여성교육운동의 목적이요 방향이기도 하였다.

이어지는 어윤희의 활동은 개성신간지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개성지회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갔다.

어윤희는 1927년 7월 신간회 개성지회의 설립준비단계 부터 간사로 참여한 이래 1931년 1월 임시대회준비 및 해소까지 줄곧 간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어윤희가 비록 여성이며 나이도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성지역의 각종 민족운동전선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예컨대 그녀가 3.1운동과 해외독립운동 지원활동에서 보여준 항일투쟁 경력은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세력들에게 투쟁동지로 인정받고 중심축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해준 요인이었으며, 신간회와 근우회지회 활동에서 간사 및 집행위원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이었을 것이다.

1927년을 전후하여 민족운동 내에서는 다양한 민족운동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중심기구의 단일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27년 2월 15일 민족단일당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였다. 신간회운동의 급속한 확대를 위해 전국적으로 지회설립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927년 7월에 설립이 시작된 개성지회는 그 지역 청년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노동운동단체가 연합해서 발기한 경우다. 개성지회는 7월초 설립준비에 착수하여 7월 18일 신간회개성지회 설립준비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지회설립 지원을 위해 본부에서 파견된 박동완과 오화영의 지원을 받아 준비위원으로 어윤희를 비롯해 하규항, 손세구, 한창환, 우상순,이기연, 하채성 등을 선출하고 실질적인 지회설립에 착수하였다. 마침내 1927년 8월 8일에 지회설립대회를 개최하고 공식화된 개성지회는, 최초로 설립된 정읍지회가 4월이었음을 고려하면, 비교적 초기에 설립된 것이므로 개성지역의 민족운동단체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가늠케 한다. 출범당시 개성지회 회장은 이연교, 부회장은 한창환이 각각 선임되었고 간사로 이기연, 하미성, 이병렬, 이서옥, 김형근, 임한선, 백진기, 황중현, 손홍구 그리고 어윤희가 선출되었다. 개성지회는 서무부, 재무부, 정치문화부, 선전조직부, 조사연구부로 구성되었으며 어윤희는 이성득, 하보항과 함께 선전조직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개성지회의 회원 수는 약 200여 명 정도였다.

개성지회에서는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의 중심축으로 개성사회단체연합을 통해 민족운동역량을 강화하려는 활동, 근우회 지회설치를 촉진하는 활동 등이 주요 활동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또한 1927년 12월 신간회 개성지회가 주축이 되어 개성지역 11개 단체대표들과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조직하고 중국당국의 정책으로 억압받는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당시 서울에서 진행되던 신간회 본부의 재만동포옹호동맹에 대한 지지와 협조를 위한 활동이었다.

그 외에 국민계몽의 차원에서 교양훈련 및 미신타파강연 개최활동도 전개되었다. 또한 산업방면의 투쟁으로는 일제의 인삼전매제도를 반대하는 운동 등을 실행하였다. 개성에서도 일제는 신간회지회를 '과격한 불온단체'로 파악하고 집회 금지 탄압이 극심하였다. 개성지회 역시 1928년 2월 신간회창립대회기념식과 1931년 1월 개성신간지회 임시대회가 금지당하였다. 이러한 개성지회의 활동은 신간회본부의 운동을 지지, 후원하면서 개성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성격의 투쟁도 운동 목표로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다 강력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여타의 지회에 비해 덜 밝혀졌지만 개성지회에서 어윤희는 설립준비위원, 간사, 집행위원 등 해산당할 때까지 항상 임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어윤희가 개성지회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 근우회 개성지회 설립의 주역이 되다.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개성지회의 결성은 어윤희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927년 5월에 설립된 근우회는 민족독립운동의 통합조직인 신간회 창립에 자극받은 한편, 그동안 분산된 여성운동계도 단결된 단일조직으로 통합함으로써 근대 한국여성운동사상 일획을 긋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은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향상이었고, 운동 목표로 봉건적 굴레와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였다. 근우회 조직은 지도부의 민족주의계(종교계),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는 물론 여학생, 직업여성 등 지식인 여성과 여성농민, 여성노동자, 전업주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을 망라하였다. 1930년까지 118개 지회가 설립되는 세를 과시하였다.

근우회 개성지회가 창립된 것은 1929년 6월 15일이었다. 즉 개성지회는 개성여자교육회를 기반으로 창립되었는데 설립대회 임시의장은 근우회 본부에서 온 정칠성(丁七星)이 맡았다. 그런데 개성지회의 설립에는 근우회본부와 신간회 개성지회의 후원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근우회개성지회는 신간지회에 비해 설립이 지체된 것으로 보이며 1927년 12월경 근우회지회설립 촉진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개성여성운동계의 대응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9년 1월 신간회간사였던 어윤희가 개성여자교육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비로소 이 단체를 근간으로 근우회개성지회가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양 단체에 관여했던 어윤희를 매개로 근우회 개성지회가 창립되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국 근우회 개성지회의 설립을 출범시켰던 숨은 주역이었고 할 수 있다. 어윤희는 근우회가 지향하는 여성지위 향상과 민족독립투쟁이란 목표가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전도부인이란 종교적인 신념에 구속됨이 없이 민족독립운동전선에 동참해서 여성계몽과 교육을 통한 여성해방과 민족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여성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개성지역의 3.1운동을 촉발시켰던 중요한 역할을 시작으로 1920년대 해외독립운동 지원활동, 국내 민족협동전선의 양대 단체인 신간회, 근우회의 개성지회의 창립 및 활동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그 중요도가 높아졌음을 간파할 수 있다. 다시말해 그는 개성지역 민족운동의 지도자적 위치에 서 있던 여성독립운동가였다.

1931년 5월 신간회해소 이후 어윤희는 민족운동단체에서 물러나 아동복지활동에만 헌신하였다. 1937년 감리교의 지원 하에 개성 유지의 도움으로 개성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 이를 재건하여 복지활동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어윤희는 1961년 11월 18일 유린보육원에서 별세하였다. 정부는 어윤희의 애국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여 독립운동과 겨레사랑에 일생을 바친 뜻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어윤희는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활동 및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켰던 3.1운동의 주역이었다. 1920년대 어윤희는 독립선언서 배포투쟁을 통해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후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개성지회, 근우회개성지회를 이끌어 가는 핵심인물로 도약하였다. 이처럼 어윤희는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고 개성지역 민족운동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민족문제, 여성문제를 해결하고자 헌신했던 여성독립운동가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유린 양육원 어린이와 어윤희 여사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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