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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의 독립운동가 <지복영>
  • 블루투데이 기획팀
  • 승인 2012.05.1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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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영 [1920~2007]

■ 훈격 : 애국장 / 서훈년도 : 1990년

■ 공적개요

ㅇ 지청천 장군의 딸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 초모위원 겸 비서로 활동
ㅇ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대적 선전원고 작성과 방송활동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 초모위원 겸 비서로 활동한 지복영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지청천장군, 어머니는 윤용자였으며, 1924년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및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선 분이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한 희생정신을 몸으로 익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관내지역의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산을 거쳐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먼 길을 이동해야했다. 남경의 중국학교에서 수학하던 선생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한 피난길 중에도 피난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11월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자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이었으며 이중 여성대원은 지복영 선생을 포함 11명이었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의 항일정신과 기개를 선전하고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것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위한 급선무였다. 선전활동은 거리선전, 연예와 항일연극, 대규모 공연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활동은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8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선생은 오광심, 김정숙 등과 함께 여성광복군으로 참여하였고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전방인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하게 되자 선생도 서안에서 오광심 선생 등과 함께 1년 반 동안 기관지 《광복》간행에 전념하였다. 이후, 모병 업무 강화를 위해 광복군 서안 제3지대가 편성되자 선생은 서안보다 더 전선에 가까운 안휘성 부양에서 광복군 초모 활동을 전개하는 등 대일항전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활동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중경으로 돌아온 선생은 건강을 회복한 후 1943년부터 임시정부 외무부로 차출되어 중국방송을 이용해 한국인 학병들의 탈출을 권유하는 등 모병활동을 전개하였고 1945년 광복군 총사령부 편대 재편성 당시 소령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군(女軍), 여성광복군 지복영 선생

1931년 일제의 탄압으로 근우회 해체를 끝으로 여성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후 여성활동가들은 해외로 망명을 가거나 국내항일비밀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국내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대부분 해외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중국 동북항일유격대,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여성들은 많은 활동을 벌였다.

이중에서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서 재창설되었다. 여성들도 광복군 성립 초기부터 참여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군, 여성광복군이었다.

지복영 선생의 성장

선생은 1920년 4월 11일(양력)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지청천장군, 어머니는 윤용자였으며, 1924년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은 조선 말기 무관학교에 입교, 1913년 일본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 때 이름을 이석규에서 이청천으로 고쳤다. 일본군 현역군인 출신으로서 탈출하였기 때문에 잡히면 총살이었다. 그래서 성도 모성인 이씨를 따라 이청천으로 고친 것이다. 지복영은 이복영으로 알려진 것은 고친 아버지 성씨 때문이다. 이청천은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간부가 되었고, 1921년 자유시사변 후 고려혁명군을 조직한 데 이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1932년 동아혈성동맹 간부, 1933년 한, 중연합군 총참모장과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국인특별반 책임자, 1940년 광복군총사령부 사령관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대동청년단 단장, 제헌국회의원, 무임소장관,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지복영 선생

지복영 선생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1937년 8월 중국 남경에서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및 미주의 몇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한국광복진선)의 후신이다. 한국광복진선은 창설된 이래 중일전쟁 발발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산을 거쳐 1940년 중경에 정착하였다. 지복영 선생도 남경의 중국학교에서 수학하는 중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녀는 피난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면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피난살이로 임시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일항전을 하지 못하자 청년 남녀들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청년 남녀들은 1938년 11월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자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이었으며 이중 여성대원은 지복영 선생을 포함 11명이었다. 나머지 10명은 오광심, 오희영, 오희옥, 방순희, 김병인, 김효숙, 신순호, 연미당, 조계림, 이국영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광복진선을 조직한 3당 당원들의 부인들과 딸들이었다. 오광심은 조선혁명당원이자 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의 부인이었으며, 오희영과 오희옥은 오광선 장군의 장녀와 차녀였다. 방순희는 임정의정원 의원을 지냈으며, 광복군 김관오의 부인이었다. 김병인은 광복군 총사령부 제1지대장 이준식의 부인, 김효숙은 김붕준의 장녀이면서 송면수의 부인이었다. 신순호는 독립운동가 신건식의 딸이며, 연미당은 오항섭의 부인이다. 그리고 조계림은 조소앙 딸이며, 이국영은 민영구의 부인이었다. 연령별로는 10대에서 30대까지였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의 항일정신과 기개를 선전하고 한국인들에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선전공작이 중심이었다. 선전활동은 거리선전, 연예와 항일연극, 대규모 공연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거리선전은 포스터 붙이기, 항일운동에 함께 나서자며 중국어로 외치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의 행사가 있을 때는 함께 나서서 가두선전을 해 주었다. 가장 큰 공연은 1939년 3월 4일에서 5일 양일간에 걸쳐 중국 청년문화단체와 합동하여 개최한 위로항적부상장사유예대회(慰勞抗敵負傷將士遊藝大會)였다. 연극으로 국경의 밤, 독창으로 상병지우, 아동부 유희, 연극, 하모니카 합주, 중국노래 합창, 중국 아동극단의 2부 합창, 한국 민요 등 한국과 중국인들이 연합하여 개최한 다채로운 공연이었다. 이들의 선전활동은 큰 호응을 얻었다.

여자대원들 중 미혼여성들은 어른들의 고루한 생각 때문에 연극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합창과 같은 것만 했다. 연극은 한국부인들과 중국 여성들이 맡아서 하였다. 지복영도 미혼여성이라 합창 정도만 했다.

한국광복군 창설과 기관지 [광복]을 통한 선전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중국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동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총사령관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었으며, 총사령부는 약 30여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여자광복군으로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민영주, 신순호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사령부의 비서 사무 및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11월 17일 실제적인 항일 전투를 하기 위해 중경을 떠나 29일 전선이 가까운 서안으로 이동하여 광복군 서안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 때 지복영 선생은 오광심, 조순옥과 함께 서안으로 갔다. 여성들이 여성광복군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순옥은 독립운동가 조시원의 딸로 1923년 출생하였다. 조시원은 조소앙의 동생으로 가족 전원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가족이었다. 조시원은 1920년 상해로 망명, 1927년 金武亭 등과 중국본부한인청년총동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펼쳤다. 1930년부터 [韓報], [韓國文苑] 등의 잡지를 발간, 문화운동에도 힘썼으며,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관, 1942년 법무처장, 정훈처장 등으로 있다가 1946년 귀국하였다. 조순옥은 아버지 조시원이 상해로 망명한 지 3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헌장 3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함, 5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유함이라고 선포하여 남녀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밝혔다. 임시정부 헌장에 남녀평등에 대한 조항이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여성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헌장에 명문화는 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당시 젊은 여성들은 사관학교에 들어가 당당한 군인 장교가 되어 항일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측은 부녀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1940년 재창설된 한국광복군에서는 여성들도 한국광복군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총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은 한국광복군은 한국임시정부에 직할된 한국의 국군이다. 한국 임시정부 본신이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혁명기관인 만큼 광복군도 당연히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군사기구가 되는 것이다. 凡韓國革命 男女는 누구를 勿論하고 그의 歷史的使命을 完成하기 爲하여 光復軍에 參加할 權利와 義務를 똑같이 所有한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이처럼 인식이 달라진 것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국 여성들이 국내외에서 남성못지 않은 전투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지도자로 명성이 높았던 평북 의주 출신의 조신성은 조맹선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청년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평남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활동을 총 주도하였다. 그는 남성 단원들을 이끌고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 등을 품고 생식을 하면서 단원들을 이끌었다.

평남 대동 출신의 안경신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국제여론 환기와 독립의욕 고취를 위해 평남 경찰국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다. 경북 영양 출생의 남자현은 1925년 朴靑山과 함께 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려다 만주로 망명한 후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의 리튼경(卿)이 하얼빈에 왔을 때 왼손 무명지를 끊어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쓰고 끊어진 손가락 마디를 함께 싸서 보내어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33년 李圭東 외 여러 동지와 함께 만주 건국일인 3월 1일을 기해 일본군 장교 武藤信義를 암살하려고 무기와 폭탄을 가지고 가다 체포되어 단식 항쟁하다 병으로 보석되어 8월 22일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조신성, 안경신, 남자현 등과 같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던 여성들, 그리고 국내외에서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하고 가담하여 활동한 여성들의 활약은 남성들에게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끔 하였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여성들에 대해서도 입대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지복영 선생은 광복군 여성대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지복영 선생이 한국광복군 여성대원으로서 활동한 계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녀가 중경에 있을 때였다. 일본군 폭격기가 폭격을 해대자 방공호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몸을 피신하였다. 어느날 폭격기의 폭격으로 임시정부 청사 근처의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일로 지복영 선생은 일주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을 못 자면서 번민을 했다. 그 후 학사, 박사가 되면 뭐하겠느냐, 이 전쟁 하루라도 빨리 끝나도록 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결론을 내린 후 광복군 참여를 결심하였다. 그녀는 1996년 8월 15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광복군 입대 동기에 대해 임시정부 헌법이 빈부와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 데 자극받아 미력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어서였지요. 당시 여군에 대한 대접도 좋아 월급도 중국 돈 5원으로 남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에게도 광복군 입대를 묻자 조국 독립하는데 남자 여자 가리겠는냐?며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 길로 지복영 선생은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서안총사령부는 총사령 대리로 황학수, 참모자 대리로 김학규, 그리고 참모조, 부관조, 경제조, 선전조, 편집조 등으로 구성되었다. 각 조의 조원은 1-3명 정도였다. 선전조는 지복영, 오광심, 조순옥 등이 담당하였다.

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한 후 군대를 파견해서 전선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군인원수가 적고 장교급들만 있고 사병이 없었다. 가장 급한 일이 선전활동이었다. 적 후방에 있는 교포들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한 선전활동으로서 잡지 [광복]을 발간하였다 지복영 선생 등 선전조가 이 사업을 맡았다. 광복군 총사령부에 [광복] 간행을 위하여 정훈처를 두고 조경한을 정훈처장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편집은 사천 사업대학 출신의 김광이 전담하고 원고작성과 번역은 선전조가 책임을 맡았다. 1941년 1월 1일자로 [광복]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였다. 당시 한국청년들이 주로 중국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한국어를 잘 못하여 여성 선전조들이 원고를 작성하고 번역하였다. 한국어판 창간호 필자들은 김구 주석을 비롯, 지청천, 황학수, 김학교, 이복원, 김광, 지복영, 오광심 등이었다.

창간호에서 여성대원들은 한국여성동지들의 약진을 격려 호소하는 글을 두 편이나 게재하였다. 오광심은 한국여성들에게 일언을 들림이라는 글을 써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여자도 남자와 평등하게 참여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우리 여성의 임무가 어찌 집안에서 아해나 양육하고 밥이나 해주고 길쌈이나 하는 것이겠음니가?라고 하면서 여성의 권리는 여성 스스로 찾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그는 민족 존망의 책임이 남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 여성에게도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남녀평등을 아모리 부르짖지만은 또는 여권을 찾아보자는 구호가 雲?에 높앗지만 원래 이런 혁명적 임무를 지지 못하면서 어찌 권리를 말할 수 있으리오. 평등과 권리를 찾으려면 먼저 자체의 舊鬪와 능력이 있고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남자와 같이 負責하고야 될 것임니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 농완물 기생충 등등의 치욕되는 명사는 어느 남자가 준 것이 않이라 우리 여성들이 자취한 것이라 함니다. 동성동지들! 말로 평등과 권리를 부르짖지 말고 실제 노력과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쟁취합시다. 男子와 같이 피흘리고 男子와 같이 국가와 사회에 負責하고 男子와 같은 능력과 인격이 있다면 누가 能히 우리 손에서 平等과 權利를 빼앗겠음니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않이오.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오며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않이하면 맞이 사람으로 말하면 절룽발리가 되고 술래로 말하면 외박퀴 수레가 되야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이다. 우리는 우리 혁명을 위하야 또는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야 우리 여성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야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서 우리 여성의 피가 압록 두만강 연안에 흘리며 이 선혈 우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며 광복군 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남녀평등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단언하였다. 오광심이 광복군에 입대하고 또는 다른 여성들이 입대하기를 희망한 것은 이러한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여성해방을 이루는 길이라는 판단에서 나왔던 것이다.

지복영 선생은 대시대는 왔다 한국 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글에서 한국 이천삼백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동포들은 조국을 광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데 한 역군이라는 것을 범 한국사람은 다 깊이 깨달어야 할 것이다. 이중삼중의 압박에 눌리워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이러나서 이 민족해방운동의 뜨거운 용로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 생활은 여기서 불살너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 흑암중에 서광-한국광복군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봉화는 붉고 맑게 빛난다 이에 모인 혁명동지들은 뜨거운 손길을 내어밀고 열정에 넘쳐 속히 속히 달려옴을 기대리고 잇다 오라! 와서 힘을 뭉치여 적을 부시고 새집을 세우고 새로운 삶을 찾자!라며 한국 여성들에게 광복군 입대를 종용하였다. 그의 이러한 글에서는 그동안의 봉건적 굴레에서 신음하던 여성들이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길은 남성들과 똑같이 민족 전선에서 투쟁하는 길 밖에 없다는 그의 단호한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자신의 원고 이외에도 김구의 글과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전문 등을 번역하여 [광복]에 실었다.

한국광복군 제 3지대에서 활동

한국광복군의 활동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첫째 초모활동, 둘째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 등을 통한 교육과 훈련, 셋째 선전활동, 넷째 인면전구공작대의 파견, 다섯째 한미군사합작과 전략첩보활동, 여섯째 국내진입작전과 정진대 활동 등이다. 여성대원들은 남성대원들과 함께 위와 같은 활동을 하면서 서로 동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의식주면에서나 훈련 등 모든 면에서 함께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대원들은 남성대원들을 동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성대원들도 여성들과 함께 군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했던 김문택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들뜬 기분에 쌓여 우리는 새로 들어온 신동지들에 대한 환영식도 가졌다. 저녁노을이 지는 부양성 안 병사에 꾸며진 초라한 연장에는 30여명의 젊은 애국투사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비록 조촐하고 보잘 것 없는 연석이지만 여기에는 상(上)과 하(下), 노(老)와 소(少), 남(男)과 여(女), 신(新)과 구(舊)의 구별이 없는 문자 그대로 동지들의 동락회의 연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광복군에 입대하면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없어지고 서로 동지로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복영의 회고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떤 광복군 남성대원이 자신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고백하자 우리가 뭐 이런 시절에 그야말로 내일 죽느냐 모레 죽느냐도 모르는 판에 무슨 결혼이겠느냐 다같은 동지로서 손잡고서 조국광복에나 그냥 힘쓰자고 거절했다고 한다.

여성대원들도 남성대원들과 똑같은 교육과 훈련을 받고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했던 김문택은 당시 여성대원들의 군사훈련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밝혔다.

우리들의 일과는 참모에 의하여 계획되고 짜여진 일과표에 의하야 진행되었으니 아침의 기상과 아침 점호의 조회로 시작하여 아침 식사 후 잠시 후에는 군사훈련이 시작된다. 물론 군사훈련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소, 남녀, 신구의 구별없이 동등하고 일률적으로 다같이 받기 마련이었으니 왜적을 때려 잡는 연습에 어찌 어떤 구분과 구별이 있을 수가 있으라

그런데 여기에 특기할 것은 남동지에게 뒤질새라 열심히 남동지를 앞지르던 이 동지 정인덕(鄭仁德)!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고 남동지를 뒤따르는 정동지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 지 알길이 없다.

여튼 홀홀단신 처녀의 몸으로 부모의 원수이자 겨레의 원수 왜적을 자기 자신의 손으로 토벌하기 위하여 수천리 머나먼 저 북경에서 이 부양에까지 뛰어 들었으니 그 적개심에 타오르는 정열, 어찌 딴 동지에 뒤질 수가 있으라.

이 어찌 정인덕에 한하랴. 신혼의 단꿈도 마다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이 독립전선에 뛰어든 여자동지들! 여튼 여동지들은 굳세고 강하였다.

위의 글처럼 당시 여성대원들은 남성대원들의 역량보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무조건 이기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지복영의 이왕지사 내가 나서서 그 때 여자 활동이 참 순조롭지 않거든요. 않았는데 이왕지사 나섰으면 내가 남한테 욕은 먹질 말아야 되겠다... 아 여자가 활동하면 그저 그렇지...나중에는 손가락질은 받질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아주 결심을 단단히 했거든요라는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오광심의 회고에 의하면 여성대원의 역할이 남성대원들보다 많았다고 한다. 오광심은 1967년 8월 12일자 매일신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여자대원이 하는 일이란...취사, 통신, 정보수집, 모금 등 남자대원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원시적인 생활이다시피 거친 생활이었기 때문에 모두 고생이 많았지만 여군의 부담은 더 컸었죠.라고 하면서 남자군인과 女軍, 장교와 사병의 구별없이 똑같이 일했습니다.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한 편지를 써서 투하시키고, 최전방에서 방송으로 탈출 루트를 알려주고 포로를 통한 정보수집, 미군들에게 폭격목적지를 알려주는 등이라고 밝혔다. 여성대원들은 광복군내에서 남성대원들에 비해 다른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세탁, 재봉 등을 여성대원들이 담당하였다. 김문택은 여자동지들! 여튼 여동지들은 굳세고 강하였다. 특히 여동지들은 구호대원을 겸하였고 또 틈만 있으면 남동지들의 해진 군복을 꿰매며 세탁까지를 하였으니 이 얼마나 고되었으랴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광복군 활동 초기 여성대원들의 군복은 상의는 남자와 같았으며 하의는 치마였다고 한다. 모자도 남자는 챙 있는 군대 모자와 배 모양으로 된 것을 썼는데 비해 여성들은 모두 배 모양의 것을 썼다고 한다. 이후에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에는 여성들의 숫자도 얼마 안 되어 전투를 할 만한 조건이 안 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많은 여성들이 입대하여 남성들과 똑같이 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군복도 똑같이 입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의 총인원 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1977년 광복회에서 조사 한 바로는 755명으로 되어 있다. 총사령부 95명, 人緬전구공작대 9명, 보충대 44명, 1지대 64명, 2지대 233명, 3지대 235명, 9전구 75명 등이다. 그러나 이 통계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을 지냈던 박영준에 의하면 1940년 성립 당시 광복군의 총 숫자는 남녀 포함해서 70명 정도였는데 1945년 전쟁 말기에는 700명에서 8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부들을 제외한 일반대원들은 중국의 면적이 너무 넓고 통신 시설이 제대로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 지대의 숫자는 알 수 없었다는 것 이다. 해방이 되자 광복군 숫자가 가속적으로 증가했는데, 그것은 점령구에 있던 사람, 징용자들을 모두 포용하라는 사령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한국광복군 자료를 소지하고 있던 지청천이 한국전쟁 당시 이를 모두 소실해 버렸기 때문에 현재까지 광복군의 총 숫자는 정확하게 밝혀질 수 없었다. 현재 광복군의 총 숫자는 상기와 같이 7백명에서 8백명, 혹은 1천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광복군 성립 초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총 6명으로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등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여성대원들이 많이 증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말기 여성대원들은 각 지대별로 30여명씩 있었다고 한다. 이 숫자는 1967년 8월 12일 대한일보가 개최한 좌담회에서 여성대원이었던 김효숙이 광복군의 정확한 숫자는 비밀로 되어 있었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여자대원은 각 지대에 30여명씩 있었던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여성들이 광복군에 입대해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서 조금이나마 자료가 남아 있는 여성대원은 약 20여명 정도인데 모두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로 포상 신청을 한 인물들이다. 대체로 미혼의 여성들이 많았다. 광복군의 특성상 남성들과 함께 숙식을 하며 훈련을 해야 되는 등 기혼의 여성으로서는 어려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혼의 여성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혼인 경우는 민족이 독립을 하면 가족과 만나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서안총사령부 설치 이후 광복군은 적 후방 공작사업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처음에 3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그 후 1941년 1월 서안에서 무정부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제 5지대로 편입하여 4개 지대로 편제되었다. 다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편입으로 지대가 편제되었다. 제 1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 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는 2지대와 합편하였다. 각 지대에는 지대장과 그 수하에 7-8명의 간부대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김학규의 제 3지대에는 대원 6명 중 절반이 여성대원이었다. 지복영 선생은 오광심, 오희영과 함게 제 3지대에 속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평소 아버지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너는 대한의 잔다르크가 되거라라고 들어왔던 터라 최선전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지청천 장군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자원했다. 그러자 대부분이 여성이 적후방으로 가면 위험하다면서 총사령관이 알면 큰 일 난다고 말렸다. 이에 지복영 선생은 밤새도록 편지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냈다. 지청천 장군은 좋다고 잘 생각했다고 내가 남의 자식도 보내는데 내 자식이라고 금지해서 못 보내겠는냐 잘 생각했다는 답장을 받고 지복영은 부양으로 떠났다. 산동을 향해 진군하던 김학규의 제3지대는 산동 정세가 급박해지자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휘성 부양에 제 3지대 본부를 설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되기까지 4년간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오광심, 오희영과 함께 남자 광복군 대원들과 똑 같은 임무를 받고 초모 활동을 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낮에는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고 밤에는 광복군 초모사업을 했다. 그러다 지복영 선생은 부양에 온 지 1년 1개월만에 병이 나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중경으로 돌아갔다.

몸이 회복된 후인 1943년부터는 임시정부 외무부로 차출돼 중국 방송을 이용해 한국인 학병들의 탈출을 권유하였다. 1945년 광복군 총사령부 편대를 재편성했을 때 지복영선생의 직책은 소령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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