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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일성 회고록의 진실 (3-1) 화성의숙의 꾸며진 회고
  • 홍성준 기자
  • 승인 2012.09.1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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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제2장은 ‘잊을 수 없는 화전’ 이라는 제목으로서 김일성의 화성의숙 재학시기와 무송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1926년 후반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 장에 대해 김일성은 5절에 걸쳐 11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늘어놓으며 거창하게 설명하고 있다. 진실을 ‘거짓’ 으로 뒤덮어버리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다.

김일성이 화성의숙 시절을 두고 한 거짓말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① 입학과 퇴학시기, 즉 재학기간문제
② 민족주의 학교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었다는 ‘타도제국주의동맹’ 에 대한 문제

우선 김일성의 재학문재에 대한 거짓말을 파헤쳐 보자.

집권초반 민족주의계열 화성의숙 재학사실을 숨긴 김일성

1952년의 전기에는 김일성이 남만주(南滿州)의 민족주의단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운영한 화성의숙에 있었다는 것은 기록되있지 않았다. 김일성은 북한에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생존해 있던 1950년대에는 자기가 정의부 계통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남로당파,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를 모조리 ‘종파’로 몰아붙여 숙청한 뒤인 1961년 ‘조선근대혁명운동사’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화성의숙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 책에는 “1926년… 김일성동지는 화전현에 있었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라고 서술한 것이다.

▲ 김일성이 화성의숙에 다닐때 기숙사

그러나 1968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이라는 책이 나올 때까지 북한의 전기 작가들은 김일성이 소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26년 3월경에 그가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으로 기술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성의숙 입학 시기는 이후 몇 년 간 명확한 날짜가 밝혀지지 않은 채 넘어 갔다. 그랬던 것이 1972년에 아무런 설명없이 갑자기 1926년 6월에 입학한 것으로 변경되었다. 기존의 3월 입학이 6월로 바뀐 것이다.

1961년 김일성 스스로가 밝히지 않으면 화성의숙 입학 날짜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26년 3월에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는 말은 김일성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볼 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1972년 김일성은 앞에서 한 말을 번복하여 자신은 1926년 3월이 아닌 그 해 6월에 화성의숙에 입학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화성의숙은 정의부의 최동오가 1926년 3월에 화전현 관가에 세운 무관학교이다. 또 1926년 3월이라고 한다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도 무송에 있으면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시기다.
김일성은 이 해 초봄까지 소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의부가 1926년 3월에 새로 차린 화성의숙에 김형직이 자식을 입학시키지 못 할 이유는 없는 것이 된다. 또 김일성 자신은 1960년대를 통해 그가 3월에 입학하였다는 주장을 했고, 그 주장을 정식으로 철회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3월에 입학하여 부친이 사망한 6월까지 3개월간 화성의숙을 다녔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 된다.

‘혁명적 가정’의 신화를 위한 김형직의 유언날조와 화성의숙 입학

그런데 70년대에 들어와서 김일성은 자기 부친이 사망한 6월 이후에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 번 회고록은 이러한 왜곡을 더 극심하게 자행했는데 6월부터 4개월가량 화성의숙에 있었다는 것을 김형직, 김일성 우상화 작업으로 과장하고 있다.

이 우상화 작업이란 김일성이 ‘공산주의자’ 이었던 김형직의 ‘유언’을 받들어 혁명투쟁의 길로 나서게 되었고 그 첫걸음이 바로 화성의숙을 입학하였다는 조작이다.

권총 두 자루를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에게 건네준 김형직이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을 믿는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나라와 민족의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라고 김일성에게 유언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김형직은 일개 한방 의원이었다. 자산이 있었으니 민족주의단체 정의부를 재정적으로 도운 것은 사실이다. 자금이 필요했던 정의부나 그 소속인사와 관계를 맺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김형직 자신은 전문적인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런 김형직을 두고 김일성은 보통 애국자가 아닌 ‘공산주의자’ 항일 무장투쟁의 선두주자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가 정말로 부친의 유언을 받들고 투쟁에 나섰다면 화성의숙 이야기를 떠벌렸던 1960년대 초에는 왜 그가 1926년 3월(김형직 사망 전)에 입학했다고 북한 전기작가에게 말했겠는가. 그리고 60년대 말까지 10년 간이나 이 말을 번복하지 않았는가. 1970년대에 자행한 그의 노골적인 왜곡에 쓴 웃음만 나온다.

이러한 왜곡은 1960년대의 북한 정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1967년, 김일성은 해방 전인 1937년에 보천보 습격을 감행한 동지인 박금철 등을 숙청한다.그 후 추진된 것이 ‘당의 유일사상체게 확립’ 이란 김일성 절대화 우상화 작업이다.

민중은 모두 김일성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하고, 그 정책을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실천해서 그의 마음에 들도록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책동은 사실상 김일성 밖에 모르도록 하는 ‘우민정책’, ‘민중노예화’ 책동이었다. 김일성은 자기 자신을 더욱 우상화 하여 민중들을 충실한 노예로 전락시켰다.

▲ 거짓과 날조를 통해 김일성은 '신'이 되어갔다.

이 시기부터 김일성은 마르크스나 레닌, 스탈린 같은 공산주의대가들 보다도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그는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이 사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는 그 근본부터가 다른 사상이라고 선전하기에 이른다.

김일성은 이처럼 마르크스나 레닌을 제쳐 놓은 후 자신의 윗자리에 죽은 자기 아버지 김형직을 올려 놓았다. 김형직으로부터 공산주의를 배우고 그를 계승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는 ‘혁명적 가정’의 날조된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신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김형직의 ‘유언’을 가져와 붙인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김일성의 가계 우상화 날조 작업의 결과 김일성은 설명 하지 못할 문제점을 안게 된다. 김형직이 공산주의자라면 그의 ‘공산주의’는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전수받은 것인가라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은 부친을 1916년에 중국에 ‘파견’하여 손문과 만나게 하거나, 1918년부터 1년 동안 그를 중국동북(만주), 구소련 연해주 등으로 ‘파견’하는 허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명확한 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거짓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황당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김형직)의 유언을 받들어 혁명투쟁에 나선 김일성”이란 허구는 세인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졸렬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정의부가 군관학교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자식을 독립군에 넣으려고 한 부친 김형직에 의하여 1926년 3월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김일성 전기류에서 ‘전학’ 이나 ‘중도 입학’을 일절 말하지 않고 있는것도 그 증거의 하나이다.

김일성은 김형직이 사망한 1926년 6월에 화성의숙을 중퇴했다. 아마도 그 이후에 그는 무송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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