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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⑮ 여자학도의용군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승인 2013.03.0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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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도6.25에 뛰어들었다. 사진은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도의용군' ⓒ 한국학중앙연구원 캡쳐

학도의용군의 개념과 활동시기

‘학도의용군’ 이란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지원하여 전투, 전투근무지원 등에 참여하거나 후방에서 공비소탕 및 치안유지, 간호활동, 선무공작 등에 참가한 의용병을 의미한다.

학도의용군들은 196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난 직후부터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의 ‘학생들의 학교복귀 지시 담화’ 가 발표 되는 3월 16일까지 활동했다.

학도의용군의 활약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38도선을 넘어 불법 남침했다. 28일, 수도 서울이 북한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자 학생 2백여 명이 한강을 도하하여 수원에서 ‘비상학도대’ 를 발족함으로써 학도의용군은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강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에 편성되어 한강방어선 전투인 노량진 전투에 참가했다.

한편 7월 4일, 대전에서 약 700명의 학생들이 규합하여 ‘의용학도대’ 를 조직하고 학도병 모집, 보도선전에 나섰다.

그러나 국군의 계속되는 후퇴로 인해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렀다. 이에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가 탄생되었다. 이는 수원에서 철수한 ‘비상학도대’ 와 대전에서 철수한 ‘의용학도대’ 가 통합되어 개편된 것이다.

신탁통치를 두고 한국이 찬, 반탁으로 갈렸던 당시 반탁운동에 앞장섰던 전국학련 간부 출신을 중심으로 ‘전국학련구국대’, ‘대한학도경찰대’ 가 조직되었다. 두 단체는 학생들만으로 구성된 독립부대로써 전방과 후방에 전투와 비전투 임무에 직접 참가했다.

한편 재일교포 학생들도 귀국하여 ‘재일학도의용군’ 을 만들어 참전했다.

▲ 여자학도의용군들의 모습 ⓒ 전쟁기념관 캡쳐

여자 학도의용군

학도의용군은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여학생들도 참전하여 군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군대에 직접 입대하여 계급을 부여 받은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학교 단위별 또는 개인 자격으로 각 전투부대에 입대만 하고 특별히 계급이나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채 학생 신분으로 활약했다.

한편 이들 중 후방지역에서 식량을 보급 하거나 간호사로 참전한 학생들도 있었다.

▲ 6.25전쟁 당시 여자학도의용군들이 입었던 복장, 뒤에는 북한군 군복이다. ⓒ 누리꾼 블로그 캡쳐

전투부대에 참전한 여자학도의용군

1950년 10월 동부전선에서 공격임무를 부여받아 강릉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1군단은 학도의용군을 모집했다.

9.28 서울 수복 이후 복교되었던 강릉지역의 강릉사범학교, 강릉상업고등학교, 강릉농업고등학교, 주문진 수산중학교, 성심중학교 학생들이 제1군단에 학도의용군으로 지원했다.

강릉사범학교에서 남학생뿐만 아니라 제1, 2학년의 여학생 29명과 강릉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여학생 2명 등 31명이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

이들은 1950년 10월 6일 강릉사범학교에 집결했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1박했다. 이후 남자의용군과 별도로 제1군단사령부로 이동하여 군단본부 각 참모부서에 배치되었다.

각 참모부서에 배치된 여자학도의용군은 행정보조업무와 북한실상파악 및 민사활동을 주로 실시했다. 또한 일부 여자학도의용군은 장병 위문활동도 수행했다.

이들 중 최용인(강릉사범학교 여자학도의용군)은 군수처에 배치되어 예하부대에 물자를 보급해주는 업무를 수행하고 다시 정보처로 배치되었다. 이후 주민 위문활동, 민심파악 등을 수행했고 주민들을 상대로 북한의 실상에 대한 교육도 실시했다.

심월섭(강릉사범학교 여자학도의용군)은 정훈부 민심과에 배치되어 북한실정 파악 및 정보수집, 애국가 및 동요보급 등의 업무를 맡았다.

강릉사범학교 여자학도의용군은 제1군단사령부 같이 원산-함흥-성진-주을까지 북진하면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제1군단이 후퇴하자 이들도 흥남부두에서 LST(landing ship tank의 약자. 미국의 상륙 작전용 함정으로 선수문이 열려 선창이나 상갑판에 실은 병력 · 탱크 · 물자를 양륙할 수 있으며 2차 세계 대전 중에 양산되었다.)를 타고 철수했다.

포항에 도착한 후 제1군단이 전선에 투입되자 여자학도의용군은 포항지역의 주민 및 피란민을 상대로 사상교육과 북한실상을 소개하는 등 민사활동을 20여 일간 실시했고 1951년 2월말, 이승만 대통령의 ‘학교복귀령’ 에 따라 여자학도의용군은 해산되었다.

한편 제3사단에서도 여자학도의용군이 활약했다. 강릉여고 재학 중이던 엄영순 등 여학생 20여 명이 포항지구전투(1950년 8월 11일 새벽4시~오후 3시) 에 참전했다. 이어 제3사단이 원산, 함흥까지 북진했을때 이들도 3사단을 따라 북진하여 활동했다.

▲ 6.25때 죽창 들어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선 여학생들 ⓒ 중앙일보 기사화면 캡쳐

단체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참전한 여자학도의용병

한편 개인적으로 참전해 조국을 위해 헌신한 여자학도의용병도 있었다.

금숙희씨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인천 소하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을 당시, 제1사단에 대북방송요원으로 지원하여 대북선전방송을 맡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르자 낙동강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제1사단 12연대로 다시 찾아가 대북방송을 시작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북한군 소대장 이하 45명이 귀순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3년 전쟁말기까지 제1사단에서 대북심리전 임무를 담당한 후 귀향했다.

제7사단에서는 유흥례가 춘천여고 재학 중에 동창생 3명, 춘천사범 여학생 1명과 함께 제7사단 정훈대에 자원입대했다. 방송요원으로 활약했으며 위문공연에도 참가했다.

이들은 제7사단과 함께 개천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했지만 춘천여고생 2명은 끝내 후퇴하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이외에도 헌병학교, 종합학교, 보병학교 등 학교기관에서 식사지원을 담당한 인원 대부분이 여학생들이었다.

이와 같이 확인되지 않는 많은 여학생들이 개인 자격으로 군에 자원하여 행정보조 및 전투근무지원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을 도왔다. (계속)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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