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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가 통일 사례로 본 통일방안 연구
  • 한국위기관리연구소
  • 승인 2014.09.0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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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서론

2 장 한반도 통일정책

제 1 절 북한의 통일정책

제 2 절 대한민국의 통일정책 변화와 현 한반도 정세

3 독일과 베트남의 통일과정 분석

제 1 절 독일의 통일과정

제 2 절 베트남의 통일과정

제 3 절 통일 이후 행보

4 장 독일, 베트남의 사레로 본 향후 통일방안

제 1 절 두 사례에서 보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시사점

제 2 절 향후 통일정책 방안

제 5 장 결론

제 1 장 서론

정전 협정 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은 아직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대치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천암함 사태, 연평도 포격도발, 핵실험 등 연이은 도발로 긴장국면을 조성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통일의 길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휴전 이후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 하에 서로의 주도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 60년 간 이나 노력해 왔으나 여전히 대한민국과 북한은 한반도 안에서 동상이몽 상태에 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체제를 구축하여 독재 체제를 굳혀왔다. 그러나 이런 체제는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정상적인 국가로 변모 하게 만들었으며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과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의 통일 방향이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 방안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이미 분단과 통일을 겪은바 있는 독일과 베트남의 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분단국가 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요소가 매우 불규칙 하게 작용한다. 독일의 경우는 분단이후 국제사회와 협력하고 대내적으로도 통일정책을 추진하였지만 동독의 급작스런 붕괴로 인해 서독으로 흡수 통일 되어 버렸고, 베트남의 경우는 미국이 개입하였으나 끝 네 물러나면서 월맹에 의한 공산 통일로 가버렸다. 두 나라 중 어느 모델도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않지만 두 나라의 사례 연구를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통일 후를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됨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위한 목적으로 본 연구에서는 정전이후 북한의 대남 통일 정책을 알아보고 대한민국의 통일 정책 변화 및 현재 한반도 정세를 파악함으로써 현 대한민국의 상황을 확실히 인지함과 동시에 독일의 평화 통일과정과 통일 후 독일이 가진 문제점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가지는 시사점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사례를 들어 서로 다른 체제하의 분단국가가 무력통일을 맞이 하였을때 생기는 문제점들을 독일 통일과 같은 예를 들어 연구함으로써 향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 방안에 대해 논할 것이다.

제 2 장 한반도 통일 정책

제 1 절 북한의 통일정책

북한은 1980년 10월 10일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사업총화 보고를 통해 기존의 통일방안과 제안들을 다시 정리한「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 연방제의 구성 원칙과 운영원칙, 10대 시정방침으로 나눌 수 있다1). 고려민주연방제의 특징은 첫째, ‘고려’에다‘민주’를 첨가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 ‘과도적 대책’또는‘당분간’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외형상 완성된 형태의 연방국가라는 점이며, 셋째, 한국에 대해 무장해제에 가까운 선결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며, 넷째, 민족·자주 등의 개념을 이용하는 용어 혼란전술을 포함하여 심리전적인 10대 시정방침을 제시한 점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남한에서의‘군사파쇼통치’의 청산과 민주화 실현이라는 명분으로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파쇼악법의 폐지 및 폭압통치기구의 제거,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의 합법화 및 모든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의 자유로운 정치활동 보장, 민주인사·애국인사들의 석방, 군사파쇼정권의 민주정권으로의 교체 등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로는 긴장상태의 완화 및 전쟁위험의 제거라는 명분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주한미군의 조속한 철수, 조선의 내정에 대한 미국의 불간섭 및‘두 개의조선’조작 책동의 추구 중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고려민주연방제」의 문제점으로는 첫째, 이른바‘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으로서‘남조선혁명론’의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남북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연방제를 하자고 했는데 두 제도에 의한 연방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셋째, 우리말로는‘연방’(Federation)이라고 하면서 영어로는 ‘Confederation’ (국가연합)이라고 표현하는 등 결합형태의 모호성이다. 넷째, 국호·국가형태·대외정책노선 등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통일 이전에 남북간에 실시해야 할 사항들을 연방제가 실현되었을 때의 시정방침으로 제시함으로써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의 실시를 기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째, 연방헌법 등 연방의 형성에 따르는 구체적 절차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의 연방제는 약간의 전술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91년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에 기초한 연방제」를 제기했다.2) “남북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 련방제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제도에 의한 제도통일론은 분렬을 끊임없이 지속시켜 결국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통일은 후대에게 맡기자” 북한이 이처럼 전례 없이 제도통일을 흡수통일로 보고 제도통일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제도통일 후대론’, ‘지역자치정부 권한강화론’(외교권, 군사권, 내치권)을 들고 나온 것은 독일의 흡수통일방식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북한의 통일방안은‘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창설하여 통일을 이루자는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에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의 2000년 10월 6일「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돌 기념평양시 보고회」보고를 통해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의 원칙에 기초하되 남북의 현 정부가 정치, 군사, 외교권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보유한채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최초로 규정하였고, 이 내용은 2000년 12월 15일자 노동신문‘6·15 선언 6개월’ 특집을 통해서 다시 확인되었다. 이후 북한은 2001년 12월 9일자 노동신문과 2002년 1월 7일 평양방송을 통해‘6·15남북공동선언’이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연방제 통일의 당위성에 맞추어 해석하는 변화를 나타냈다. 그러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자, 2002년 5월 30일자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북과 남이 통일방안에 대해 완전히 합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의 통일방안의 공통점을 인식한 데 기초하여 그것을 적극 살려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했다는 의미”라고 해명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의 통일전략은 선 남조선혁명, 후 공산화 통일’노선으로 체계화하여 전개되어 왔고, 주체사상이 북한체제 내에서 유지 되는 한사회주의체제에 의한 조국통일이라는 북한의 전략이 쉽게 변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일성 사후 1997년 6월부터 발표된 김정일의 통일관련 논문 및 서한을 살펴보면, 그 동안 북한은 대남전략 차원에서 남한의 민족통합역량을 저해하는 한편 남한정부를 배제하려는 가운데 기존의 통일전선전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이중적인 적화전술을 구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2002년 10월 북한 핵문제의 대두와 함께 소위 ‘민족공조’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북한은 2003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한반도정세를 ‘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로 규정함으로써 핵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에 맞서 남북이 공동 대처해 나가는 동시에 실리추구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지속시켜 나가기 위한 명분으로 민족공조론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보았듯이 북한의 통일방안은 논리적 차원에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며 북측의 주장을 보편적으로 적용시키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양측의 현실을 인정한다는 남북기본합의서의 기본취지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이 방안은 남북의 사상·제도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연방국가를 형성해 통일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제도가 바뀌는 것을 선결조건으로 요구하는 등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연방정부의 구성방법이나 연방정부와 지역정부간의 관계설정 등에 있어서 비현실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논리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통일방안은 규범적 당위성에 기초한 것으로 남북공통의 가치나 행동양식에 기반을 둔 합리적 통일방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볼 때, 남북 양측의 통일방안은 통일의 당위성·필요성·체제상의 차이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통일의 접근방법과 통일국가의 미래상에 있어서 큰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두 가지 통일방안은 모두 양쪽체제를 유지하면서 남북 간 교류·협력을 제도화 하려는 점 에서 타협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제 2 절 대한민국의 통일정책 변화 와 현 한반도 정세

1. 대한민국 통일정책 변화

정전이후 대한민국의 대북 통일 정책은 정권이 바뀜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왔다. 가장 이슈가 된 통일 정책으로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있다. 이 정책은 당시 남북간 긴장완화를 이끌어 내고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막무가네식 퍼주기 정책으로 인하여 실질적으로 북한 주민에 대한 도움 없이 북한정권의 대한 배불리기에 도움이 되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고로 이전의 통일 정책은 제외하고 김대중 정부부터 대한민국의 통일정책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우선적 목표로 설정하고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였다. 화해협력정책은 우리가 먼저 선의를 갖고 남북관계 개선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북한이 스스로 변화의 길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남과 북이 특수 관계 속에서 공존공영하며 협력을 통해 분단 상황을 평화적으로, 통일 지향적으로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인식하에 남북관계 개선에 최대 역점을 두고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다. 2000년 6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남북관계 개선방향과 당면 실천과제 5개항을 담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3)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평화증진과 남북한 공동번영 실현 및 동북아 공동번영 추구를 목표로 하는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목표달성을 위해 첫째,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둘째, 상호신뢰 우선과 호혜주의, 셋째, 남북당사자 원칙에 기초한 국제협력, 넷째, 국민과 함께 하는 정책을 추진원칙으로 제시하였다. 2007년 “10.4선언”을 통해 남북은 상이한 체제에 대한 상호 존중을 토대로 정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 인도주의, 외교 등의 영역에서 통일을 위한 공동사업을 추진할 것에 합의 하였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북한의 변화도 우리 국민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합의 추진된 남북교류협력, 대북지원 등은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이끌어내기에 미흡한 것이었다. 4)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5대국정 지표 중 하나인 ‘글로벌 코리아’ 아래 ‘새로운 평화구조 창출’을 목표로 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4대 핵심과제로 북한 핵문제 해결, 비핵·개방 3000 구상, 한·미 전략동맹, 남북 인도적 문제 해결을 제시하였다. 3월 26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도 2008년 전략목표인 「상생·공영의 남북관계발전」을 위한 3대 목표로 비핵·개방 3000 이행 준비, 상생의 경제협력 확대, 호혜적 인도협력 추진을 제시하였다. 이 중 비핵·개방 3000 구상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과제들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비핵·개방 3000 구상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에 나선다면 10년후 북한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3,000 달러가 되도록 적극 돕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경제, 교육, 재정, 인프라, 복지 등 5대 프로젝트에서 다양한 과제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비핵화와 개방이 선행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비핵·개방 3000 구상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핵무기의 절대불용이라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유연’하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최근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개념은,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 간 신뢰를 형성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 통일 기반을 구축하려는 정책이고 1단계(신뢰구축), 2단계(사회경제적 인프라협력), 3단계(비핵화 진전과 연계한 대규모 지원)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구체적인 추진과제로 우선 ‘신뢰형성을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를 제시했다. “남북간 신뢰는 서로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며 호혜적으로 교류·협력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축적된다”, “북한이 평화를 깨는 잘못된 행위를 한다면 반드시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협력의 길로 나오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신뢰형성이 되면 이어 인도적 문제의 지속적 해결 추구, 상시적 대화채널 구축과 합의정신 실천, 호혜적 교류·협력의 확대·심화, 비전 코리아 프로젝트 등을 다각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금강산 관광사업은 확고한 신변 안전 보장 등을 토대로 재개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 비핵화 문제가 진전되고 남북 간 신뢰가 형성되면 추진할 ‘비전 코리아 프로젝트’는 북한의 자생력 제고를 위한 전력·교통·통신 등 인프라 확충,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 지원과 북한 경제특구 진출 모색 서울-평양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추진 등이라고 제시했다. 이와 함께 ‘통일 인프라 강화’를 위해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며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작은 통일에서 시작해 정치 통합을 실현하는 큰 통일을 지향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 추구’ 과제 달성을 위해 확고한 안보태세 완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다각적 노력, DMZ(비무장지대) 세계평화공원 조성, 정치·군사적 신뢰구축 추진 등을 시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2. 현 한반도 정세
최근 대한민국은 18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박근혜 정부가 출범 하였다. 박근혜 정부 출범 전후 시기는 남북간 충돌과 단절이 최고조에 달하던 기간이었다.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제 3차 핵실험 및 그에 대응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한 제재 결의 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 시키는 과정 이었다. 또한 개성공단은 올해 4월 9일 가동이 중단 된후 근래 들어서야 겨우 재가동을 실시했다. 2013년은 그 어느 때 보다 남북 단절이 철저히 심화된 시기였다.

위기와 단절 속에서 남북한, 미국, 중국은 위기 국면을 진정시키고 대화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한-미 정상회담(5.7), 북-중 고위급접촉(5.22∼24), 북한의 남북한 당국회담 제안(6.6), 남북한 사이의 국장급 실무접촉(6.9∼11), 미-중 정상회담(6.6∼8), 한-중 정상회담(6.27∼28) 등을 거치면서, 서서히 대화 국면이 조성되었다. 남북한은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회담을 7∼8월에 걸쳐 개최하였으며,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 이후에 남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또한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처럼 남북관계의 복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았던 상황에서, 북한은 9월 21일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하였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8월 말경에 한국과 미국의 연합군사훈련(UFG, 8.19∼30) 중 실시된 B-52H 폭격기 출격에 대해 핵 위협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또한 남북한 합의를 ‘원칙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남한 정부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9월 말 이산가족 상봉 연기가 발표되었다. 한편 남북관계가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상황 속에서도 개성공단은 9월 16일부터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 사무처도 9월 30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2013년 10월 초순 현재 나타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한 성격은 이명박정부 시기의 단절․충돌 국면에서 박근혜 정부 시기의 새로운 접촉․협력 국면으로 가는 과도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접촉과 협력이 두드러졌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났던 김대중 정부 초기의 불안정한 국면, 심지어 노무현 정부 초기의 불안정한 국면을 생각한다면, 대립․대결 국면에서 대화․협력 국면으로 가는 과정이 순조롭기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북한 내부에서도, 남한 내부에서도 국면 전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들 (예를 들면,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정책경쟁)이 나타날 것이다.

특히 현재의 국면 전환이 남북관계의 구조 차원이나 남북한 정부의 전략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환을 의미한다면, 불안정성 자체는 결코 부정적 현상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198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가 2000년대 말에 끝난 남북한 사이의 대화․협력 단계를 복원하기 위한 과도기의 난관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6)


제 3 장 독일과 베트남의 통일 분석

제 1 절 독일의 통일과정

1969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사민당-자유당 연정을 시작하면서 ‘신동방정책’을 내세운다. 신동방정책은 ‘접근을 통한 변화’를 기본으로 동독,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정책이다. 신동방정책의 핵심은 동독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었다. 서독은 1민족 2국가를 인정함으로써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기대했다. 동독의 지도자들은 관계 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정권이 인정받길 바랐는데, 서독이 흡수통일의 가능성을 포기하자 서독과의 더 많은 교류를 허용하였다. 동독 역시 서독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얻어냄으로써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시키려 했다.

엄밀히 말해서 독일의 통일은 서독의 흡수통일이다. 동독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결정하여 통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20년 동안의 적극적인 화해협력 정책이 없었다면 동독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동독의 경제는 사회주의권 최고의 복지수준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파탄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서독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마침 서독이 동방정책을 펴면서 자신들을 인정하자 그 대가로 교류와 협력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에 따라 동독인들이 서독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면서 동독의 점진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서독의 동독에 대한 포용정책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독일의 통일에 있어서는 독일 내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전승국의 동의와 주변국의 우려도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독이 동독을 인정하는 태도는 동구권 국가들에게까지도 이어져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 체코의 수데텐 지방 포기,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인정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독일은 과거 나치의 행적을 철저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국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결국 신동방정책의 기본 개념인 ‘다름의 인정’이 독일 내부 관계는 물론이고 동구권 국가들 간의 관계도 발전시켜 통일을 향한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배경은 사민당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이 아니라 그 이전 기민당 아데나워 수상의 ‘힘의 우위’정책이라는 주장이 있다.7) 이들은 먼저 통일의 결과에 주목하는데, 독일의 통일은 동독 주민들의 시위에 의해 동독 정권이 붕괴되었고 또한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원해서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것이라고 한다. 즉 모든 방면에서의 서독의 우월함이 동독인들로 하여금 서독을 동경하게끔 만든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서독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매우 낮았고,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민족주의를 부추긴다고 하여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반대로 동독인들의 서독에 대한 동경은 정권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했다. 이런 점에서 신동방정책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 것이 아니라 분단 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봐야한다.

독일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했다. 그 중에서도 동독을 점령하고 있었던 소련의 태도가 중요했는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독일 통일에 탄력을 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도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완성시킨 소련에 대한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것이다. 미소간의 데탕트 역시 미국의 힘이 더 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미국을 등에 업은 서독 또한 동독에 대해 모든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서독이 지속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고, 힘의 우위에 있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자 주변국들을 설득하기도 더욱 쉬웠던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주장처럼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논쟁 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는 두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새겨야할 것은 독일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일관된 내독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통일의 주역인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콜은 각각 사민당, 기민당 출신이었다. 독일은 정권이 바뀜에도 불구하고 이전 정권의 정책노선을 정치적인 이유로 급선회하지 않았다.

제 2 절 베트남의 통일과정

베트남 통일은 무력에 의한 통일이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통일이다. 또한 계속된 전쟁과 분쟁의 결과 일방에 의한 정복으로 통일이 이루어진 사례이다. 베트남전쟁은 1946년에 시작되어 1975년에 종결된 것으로 30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베트남 모델이 전쟁으로 특징 지워 진다는 것은 1946∼1954년 프랑스군과의 민족해방전쟁, 1956∼1975년 미국의 개입에 대한 2차 해방전쟁 등 계속된 전쟁을 경험한 것과 관련된다.8)

베트남 전쟁 말파리 평화협정에 따라 미국은 1973년 3월 19일 주월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1964년 8월 월맹을 폭격하기 시작한 지 8년반 만에 미국의 월남개입은 종식되었다. 베트남 종식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은 1월 28일 0시를 기해 발효되었으나 첫날부터 4백여건이 넘는 위반사태가 발생, 사실상 전투는 계속되었다. 다만 미국만이 평화협정을 충실히 지키면서 약정된 60일내 미군철수를 강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월남내에 깊이 침투해 있었던 월맹군15만명은 아무런 제재도 없이 월남에 대한 전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평화협정을 통해 소총 한방 쏘지 않고 주월 미군을 조용히 몰아낸 월맹은 베트콩과 더불어 월남 정부군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서 사이공을 점령했고 1975년 4월 30일 10시 14분 월남의 두옹 반 민 대통령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베트남이 공산군에 의해 무력으로 통일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월맹이 월남을 무력으로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첫째로는 월맹의 끈질긴 공산주의 혁명전략전술이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장기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고 2차대전 중 에는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었다. 공산 월맹은 그와 같은 장기간의 외국지배에 대한 베트남인의 외세배척 감정을 월남 공산화에 활용하였다. 월맹은 주월 미군을 또 다른 식민세력으로 몰아붙여 반미감정을 극대화시켰던 것이다.

또 월맹은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이론을 반정부 .반미운동으로 연계시켰다. 월맹은 베트남의 고질적 빈곤과 부패의 책임을 유산계급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착취로 돌렸다. 이렇게 해서 월남의 무산계급은 물론 종교인 언론인 교사 까지도 반정부. 반미 데모에 앞장섰고 월맹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월남적화의 두번째 이유로는 월남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빼놓을 수 없다. 월남정부는 부패했고 무능 하였으며 독재 일변도로 일관하였다. 그러한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패망해야 했던 것은 당연 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남패망 직전 벨기에의 ‘르솨르’지의 사설 한 토막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사설은 “티우나론놀 정권같은 부패 무능 독재 정부는 돈과 무기를 갖고도 게임 시작부터 지고 말 것이 확실했다”고 역설 하였던 것 이다. 아닌게 아니라 54만명의 미군, 7만의 연합군, 60만의 자체병력, 세계 최첨단의 미군무기, 1천 4백억 달러의 지원비등을 갖고서도 월남은 패망하고 말았다. 내부적으로 썩어갔기 때문이다.

월맹 무력적화통일의 세번째 대목으로는 미국개입의 정당성 상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개입은 마치 프랑스 식민세력의 후계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더욱이 미국은 2차대전 후 5년만에 터진 한국전에 미국 젊은이들을 파병하여 비전투임무수행 중 사망자를 포함 5만 4천여명의 생명을 잃은데 이어 월남 정글에 또다시 투입, 적지 않은 희생을 초래하였다. 미국인들은 부패한 독재정부를 위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죽어야 하고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난 달러를 쏟아 넣어야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결국 미국의 월남전 확대는 이 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반전시위를 불러 일으켰다. 월남전은 최악의 인기 없는 전쟁으로 전략되고 말았다.

월남적화의 네번째 이유로는 공산측의 속임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월맹이 서명한 ‘베트남전 종식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에 의하면 분명히 베트남 통일은 평화적 방법과 쌍방 간의 협의와 합의를 거치도록 명기되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월맹은 미군이 이 협정을 믿고 60일 이내에 모든 주 월 미군을 철수 시키자 평화적이 아닌 무력으로 협의와 합의가 아닌 무조건 항복으로 월남을 통합해 버렸다.

제 3 절 통일 이후 행보

1. 독일
독일 통일이 20여년 지났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독일 통일은 실패작이라고 할 수 없다. 1989년과 1990년에 걸쳐 독일은 국가 전체가 희열에 휩싸였다. 일부 전문가들이 독일 정치인들에게 단기과정 통일과 그 비용에 반대하는 조언을 제시했으나. 당시 헬무트 콜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수년 내에 동독에서 ‘번창하는 풍경’이 전개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희망이 솟아올랐으나 독일 통일은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결과가 되었다. 서독뿐 아니라 전체 독일 국민들이 막대한 통일비용과 동독경제 재건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생활여건 평준화 또한 달성되지 못했으며 이는 앞으로도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서독 내에서도 생활여건 수준은 천차만별이며 경제적 격차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여건 수준은 독일 통일의 성공여부를 평가하기에는 올바른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일 통일은 동서독 국민 모두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독일이 1990년에 통일된 주권국이 되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통일로 인해 현재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경제대국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국가 분열양상이 지속되고는 있지만, 독일 국민 전체의 통일에 대한 자부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 상생 발전의 희망이 엿보인다. 경제적으로도 독일 통일은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아직 변혁이 진행 중인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과 동독의 현재 사회경제적 발전 양상의 격차가 그간 놀라울 정도로 벌어져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독의 체제를 신속히 도입함으로써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동독에 대한 투자자 들과 소비자들의 신뢰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안정화되었다. 이는 동독경제의 재건에 매우 신속히 착수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어 동독에 커다란 혜택으로 작용했다. 동유럽 시장은 붕괴되고 있었던 반면 신속히 유럽연합에 가입한 독일은 서유럽의 공개 시장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서독의 복잡한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단일시장 내의 경쟁에 부딪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동독 재건의 과도기에 수많은 오류와 실수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 야만 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은 매우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독은 현재 아직 변혁기에 있는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슬로베니아를 제외하고는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단연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동독 재건에 쓰인 이른바 ‘통일비용’의 대부분이 서독으로 다시 환원되어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에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동독은 성공적인 변혁을 이루어낸 한편 서독은 통일로 인한 과도한 비용부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동독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복지 혜택도 상당한 수준이다. 이제 동독 주민들은 통일된 국가의 자유시민이며 동독의 인프라와 문화유산은 대부분 재건되었다. 평균수명 등 여타 사회적 거시지표들도 매우 양호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물론 동독에는 향후 많은 과제가 남아있지만 독일 통일은 단연코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9)10)

2. 베트남
통일 후 사회주의 경제를 도입하고 자본주의의 모든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베트남은 결국 86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도이모이’(혁신) 정책을 채택했다.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에 문을 연 것이다. 95년에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도 재개했다. 도이모이 정책은 외국인 투자를 불러오는 등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받았다.95년 9.5%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은지난해 4.8%로 뚝 떨어졌고 96년 최고 90억달러에 육박했던 외국인 투자도 99년에는 14억달러로 격감했다. 이처럼 외국인 투자가 감소하는 것은 베트남의 개혁이 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지난해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마무리 짓고도 최종 단계에서 조인을 연기했다. 무역협정이 조인됐다면 수출도 크게 늘어나고 외국인 투자도 늘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공산당의 사회장악이 약화되고 국가지배체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지도부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외국 투자가들로선 베트남의 개혁정책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베트남 정부는 사회주의와 자주독립노선을 유지하면서 경제 개방에 의한 경제개발도 계속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주의와 경제 개방이 양립하기 힘들다는데 있다. 개혁을 택할 것이냐 보수를 택할 것이냐 베트남은 지금 생존을 위한 심각한 교차점에 서 있는 것이다.

전쟁은 실제로 끝났지만.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경제를 통한 미국 등 서방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지향적 이다. 그러나 전쟁 후 태어난 젊은이들은 이들과 다르다. 베트남이 잘 살기 위해서는 세계경제로 진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젊은이들은 미래지향적이다. 과거지향의 지도층과 미래지향의 젊은이들 간에 경제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가치를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도 점점 커지고 있다. 남쪽은 외국인 투자도 많고 그런대로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북쪽은 상대적으로 경제가 더 어려운 형편이다. 베트남정부는 북쪽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남쪽에의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북부지역을 살리기 위해 남부지역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통일이 됐다고 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과 북은 대립은 계속되고 있고 실제적인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면한 국민성, 높은 교육열 등 베트남의 가능성만은 무한하다는데 많은 베트남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은 베트남만큼 잠재적 가능성과 현실과의 괴리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전 후 100만명 이상이 베트남을 빠져나갔다. 40만명 가량은 ‘재교육’ 명목 아래 수용소에 보내졌고 140만명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베트남남부의 ‘신경제구역’에 강제이주당한 뒤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똑같은 전쟁 참전군인 유족이지만 남베트남 군인의 유족들은 얼마 안되는 연금마저 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베트남의 한 언론인은 “1975년에 지리적으로 남북이 통일됐고 76년에 법적으로 통일국가를 세웠지만 정서적으로 완전히 통일이 되려면 수십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지적, 그만큼 남북간 감정의 골이 치유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난민(보트피플)문제도 심각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적·종교적 자유를 찾아 무작정 배에 몸을 실어 망망대해로 떠났던 이들에게 세계는 동정적이었다. 상당수가 홍콩, 태국,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 등지의 난민촌을 거쳐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 호주 등에서 재정착했다. 그러나 80∼90년대 경제난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세계의 시선도 냉정해졌다. 이들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부분 본국으로 이송됐다. 되돌아온 이들을 끌어안고 베트남이 경제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가 최대의 과제다.11)


제 4 장 독일, 베트남의 사례로 본 향 후 통일 방안

제 1 절 두 사례에서 보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시사점

1. 독일
동독주민들이 동독을 버리고 서독과의 통합을 선택한 것은 서독이 동독주민들이 가장 동경하는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서독은 선진적 민주제도, 풍요한 경제, 안정된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우월한 서독의 존재는 동독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공산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환멸을 심화시켜 동독주민들이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서독에의 편입을 선택토록 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또 미국이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하고, 영·불·소 3개국이 독일통일을 결국 수용하게 된 것도 독일이 부강하고 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우리도 북한주민들의 동경대상이 되고 국제적으로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이다.

서독정부가 국내외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을 고수한 것이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첫째, 국내의 반대와 소련의 중립화 유혹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친미·친서방 노선을 지속함으로써 소련과의 화해와 통일시 미국의 지원확보가 가능했다. 둘째,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동독을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동서독 국민들이 통일열망을 버리지 않도록 했다. 셋째, 동독의 항의와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본법 제23조 영토조항과 제116조 국적조항을 유지하면서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함으로써 동독혁명과 독일통일의 발판을 만들었다. 넷째,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 시 “대가 없는 지원불가”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동독의 정책변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다섯째, 동독정부와 사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를 유지함으로써 동독 공직자들의 도덕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통일 후 동독공직자의 재임용심사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공산국가와의 관계에서는 ‘힘의 우위’가 뒷받침되어야 협상에 의한 문제해결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이 소련과의 긴장완화와 전략무기 제한협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전략방위구상(SDI)을 통해 소련을 압박한 것이 주효했다. 서독도 확고한 친서방 노선을 통해 힘의 우위를 견지한 것이 소련, 동독과의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1979년 소련이 동독과 체코에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을 때 서독정부가 국내외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나토의 이중결정”에 따라 중거리 핵 미사일의 서독배치를 수용함으로써 1987년 12월 소련이 미국과의 중거리 미사일 협정체결에 응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적대적 상대와의 교섭은 선의와 호의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적극 추진하면서도 대 동독 지원이 동독 공산정권 강화에 기여하지 않을지 여부를 신중히 고려했다. 아울러 동독에 경제지원을 할 때에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는 등 전략적 고려 하에서 교류·협력을 추진했다. 특히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서독정부가 취한 여러 가지 조치들은 서독 정부가 전략적 고려 하에 유연성을 가지고 대 동독 정책을 추진해 왔음을 보여준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콜 총리는 모드로우의 「조약공동체」제의가 통일압력 회피와 경제지원 확보를 위한 기만전술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에서 이 제안의 수용의사를 밝혔다. 모드로우의 제안을 구실삼아 서독사회에서 금기시 되어 오던 통일문제논의를 자연스럽게 공식화하려는 의도였다. 콜 총리는 1989년 12월 모드로우 동독 총리와의 드레스덴 회담에서도 같은 의사를 밝히면서 적극적인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동독이 자유선거를 결정한 후에는 동독의 간곡한 요청과 사민당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경제지원을 거부함으로써 동독이 통일에 응하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콜 정부가 한 번도 동족애의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전략적 고려 하에 동독과의 교섭에 임했던 것이 신속한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사례는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전략적 고려 하에 유연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통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부시대통령은 1989년 5월 이후 독일통일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함으로써 콜 총리가 그 해 9월 이후 공개적으로 통일을 거론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동독혁명으로 독일통일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미국은 2차 대전 전승국들이 독일통일을 수용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이 초기부터 독일통일을 적극지지한 것은 2차 대전 종전이후 서독이 친서방·친미 기조 하에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지속해 온 데다, 통일이 가시화 되자 미국의 제시조건을 주저 없이 수용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도 우리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핵심우방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콜 총리의 확고한 의지와 적극적 노력은 동독주민의 절망과 분노를 통일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반도 통일에는 독일보다 훨씬 큰 위험과 희생이 수반될 것 이므로 확고한 의지와 결단력,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국가지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독일의 경우 통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통일의 기회가 그렇게 빨리 도래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더욱 없었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콜 총리도 통일에는 4-5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독이주민의 폭증, 동독경제의 붕괴, 동독주민의 조기통일 요구, 소련의 개혁정책 후퇴 가능성 등 급격한 정세변화로 신속한 통일을 추진함으로써 일부 시행착오 과정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동독주민의 자유의사에 따라 통일이 이루어졌고, 동서독 주민간에 적대감이 없었고, 서독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그간의 교류·협력 과정에서 동독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고, 유능한 관료조직의 뒷받침이 있어 큰 무리 없이 통일작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역사발전 과정에는 의외성도 많다는 점을 감안,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한편, 통일기회가 갑자기 도래할 가능성에 대비, 사전에 통일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다.

독일은 준비 없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통일기회를 맞아 통일 후 여러 가지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후유증은 이미 분단 시 에 잉태된 “분단후유증” 또는 “사회주의 실험의 후유증”이어서 후유증 없는 통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경제를 회생시킨 후 점진적인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단기간이 길어지고 남북한의 경제격차가 심화될수록 통일 후 유증은 더욱 증폭될 것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통일후유증이 두려워 점진적 통일을 추구하거나 후유증 없는 통일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보다는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국민적 의지를 결집하여 신속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통일비용이 곱절 이상 든다 해도 나는 단 1초도 통일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민당 출신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총리의 언급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12)

2. 베트남
베트남의 통일이 부여하고 있는 특성은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상대로 하여 이뤄진 공산주의 통일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베트남의 통일은 두 체제로 분열되어 전쟁을 수행한 하나의 민족이 공산정권의 사회주의 혁명 전략 전술에 의해 폭력으로 통일 되었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통일은 월맹에 의해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추진된 공산주의혁명 전략 전술의 효과라고 볼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전략전술 수행에서 활용하였던 점은 베트남의 장기간에 식민통치 역아이다. 공산월맹은 바로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외국 지배를 통해 각인된 베트남인들의 외세 배척 감정을 적절하게 월남 공산화에 활용 하였다. 더욱이 주월 미국을 또 다른식민 세력으로 규정하여 월남인의 반미감정을 극대화 시켜 대결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통일 후의 베트남이 제시하는 시사점은 민족에 의한 통일 과정에서 통일 후 민족간, 지역간 갈등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통한 통일은 배제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을 지속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 통합 문제가 국가 발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제이제 난제로서 존재 하고 있음은 통일 후 베트남의 행보에서 살펴 본 바 있다.

또 다른 시사점은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통일은 배제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도이모이 정책 이후의 전 과정을 통찰 하였을 때 베트남 발전의 변화 핵심방향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체제라는 점이다. 물론 베트남 정부가 기존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의 위상을 전제하며 사실상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접근은 발전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인간 본연의 모습과 동떨어진 한계성을 띠고 있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을 철저하게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나 지배자는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몰락 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 하고 있다. 어떠한 체제가 아무리 자유민주주의 이상을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그 체제가 군사 독재로 전락하고 부정부패로 민심이 이반하면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도 무력 했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이런 면은 대한민국 차원에서 성찰하고 대응해야할 사례이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북한이 현재 처한 인권 유린의 독재 내지 부패성과 무원칙적 무능성 측면이 부합함을 알수있다. 아무리 강력한 독재체제 일지라도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면 결국에는 몰락 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진리를 입증하기 때문이다.13)

제 2 절 향후 통일 정책 방안

향후 대한민국의 효과적인 통일 정책 수립에 있어서 독일-베트남 통일 사례를 통해 되짚어볼 사안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이 위의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 이미 통일을 이룬 독일에서 조차도 조국을 통일로 이끈 효과적인 정책이 무엇이었나에 관해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힘의 우위” 정책에 의해 자연스럽게 통일을 이루었는지 “동방정책” 이 통일을 이끌어 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 은 정권이 바뀌어도 독일은 이전 정권의 정책을 대한민국에서 늘 되풀이 하듯이 급선회 함 으로써 통일 대상 국 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였다.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 앞에서 정치권이 여야 할 거 없이 한 방향을 바라 본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통일 정책 수립에 있어서 정권이 꼭 참고 해야만 할 상황임이 분명하다.

통일에 있어서 주변국의 역할은 또 하나의 열쇠이다. 대내적으로의 정책도 중요하지만 대외적으로 국제적인 협력 관계 또한 무시 할수 없는 큰 요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에 있어서 최근 박근혜 정부의 외교를 통한 남북관계 대화 무드조성 움직임은 매우 괄목할만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최근 핵실험에 여러 차례 성공하여 핵무장의 가능성을 농후하게 품고 있다. 이는 독일이나 베트남 사례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변수의 출현이며 북한의 핵문제 해결이 앞으로 한반도를 둘러 싼 국제관계의 키포인트가 될 것이 확실하다.

통일 후 독일과 베트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사안인 민족간, 지역간 갈등 현상은 현재 엄청난 차이로 벌어져 있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제, 문화적, 이념적 갈등은 두 나라의 사례보다 더욱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베트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민국 주도하의 통일에서도 보트피플과 같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북한주민들이 안 생긴다고 확신 할 수는 없다. 긴 세월의 분단 후 통일은 예상치 못한 변수들의 발생을 야기할 것이다. 이는 통일 후에 발생하는 국가적 문제들과 그것을 전담해 해결 할 수 있는 국가기관의 설림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통일을 위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통일 이후를 위한 정책의 설립도 중요함이분명하다.


제 5 장 결 론

얼마 전 이산가족 상봉을 엿새 앞둔 90대 할아버지가 별세 했다. 북한에 있는 딸과 60 여년 만에 재회 할 예정이었다. 상봉을 앞두고 방송사와 의 인터뷰 촬영을 하는 중에 의식장애 와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킨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녘에 있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은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들 중 43%에 이른 다고 한다. 이도 현 추세대로 라면 3년 내에는 절반을 넘길 것으로 예상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주 있는 것 도 아닌 이산가족 상봉 참석자 수는 전체 신청자 수의 0.07%밖에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통일에 대한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14) 그들은 북한과 특별한 관계가 없고 혹 북에 친척이 있더라도 사실을 잘 모를뿐더러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자라 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니게 되었지만 한민족이라는 북한은 정작 갈수가 없기 때문에 북한이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우리가 의식 하든 의식하지 못하던 간에 통일 문제란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이처럼 독일과 베트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단의 비극 속에 있는 대한민국이 통일로 나아가야할 방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독일통일에서는 대한민국에 적합한 통일 모델을 다수 발견 할 수 있었고 베트남의 통일에서는 이념의 대척점에 있는 북한에 대해 통일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두 모델 모두 통일 후 에는 분단 휴우증 발생 문제가 도출 되 그 부분에 대해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을 세움에 있어 고심해야 할 부분임을 느끼게 해준다. 비록 대한민국과 북한의 통일 정책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정전협정 후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무력충돌과 정치적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정부차원의 통일을 위한 정책수립은 항상 중요 사안을 차지하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중요 평가지표로서 확인되고 있다. 그만큼 통일정책은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정책이 더 효과적이었고 남북 분단을 고착화 시켰나 하는 시시비비가 있지만 이는 대한민국이 통일로 나아가는 진통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통일정책을 더욱 가다듬어 반드시 조국 통일을 이룩해 다시는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과 갈라섬이 없는 통일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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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8149

동국대학교 산업시스템공학과
황 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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