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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6·25전시납북자②] 북한의 준비된 납북, 조직적 실행北 “납북자 없고, 자진 월북한 사람만 있다” 정말 그럴까?
  • 김성훈
  • 승인 2018.09.0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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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으로 추산되는 우리 국민을 납치해간 북한은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납북자는 없고, 자진 월북한 사람들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납북자’란 말을 불편해하는 북한 정권을 위해 여당 국회의원들은 ‘납북자’를 ‘실종자’로 바꾸자는 개정 법안을 발의했다.

‘6·25전쟁 납북 범죄’의 총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6·25전쟁 납북은 북한 정권의 주장과는 달리 치밀하게 준비됐으며 조직적으로 실행된 반인륜적 범죄 행위였다. ‘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전시된 내용을 재구성·편집해 ‘납북’의 진실을 전한다.

■ 6·25전쟁 납북자란?

6·25전쟁 납북자(拉北者)란 ‘6·25전쟁 이전에 남한에 거주하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6·25전쟁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에 강제로 끌려가 북한 지역에 억류되거나 거주하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6·25전쟁 중에 북한은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는 다수의 청년과 장년을 북으로 납치해 갔다. 북한 정권은 전쟁 전부터 납북을 계획했으며, 전쟁 발발 직후 조직적으로 납치를 실행에 옮겼다.

북한의 남한 민간인 납치는 북한 체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여 남한 체제의 인력 활용에 타격을 주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려는 목적 등이 혼재돼 있었다. 현재 6·25전쟁 납북 피해자는 대략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납치 이후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다.

납북은 납북자와 납북자 가족들에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가족과 함께 살 권리조차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그리움 속에 살게 했다. 전쟁 후 60년을 훌쩍 넘긴 지금, 이들이 가족의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6·25전쟁 납북자 문제 해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과 함께 6.25남침 및 납북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 준비된 납북, 조직적 실행

북한 정권이 자행한 남한 민간인 납치는 전쟁 전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돼 개전을 전후하여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됐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에 침투해 있던 좌익세포조직과 좌익단체의 협조로 점령조직에 의해 체계적으로 수행됐다는 특징이 있다.

전쟁 개시 2개월 전, 북한 당국은 노동당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남한 점령 후 시행할 정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남한 출신 노동당원·빨치산들을 남한 곳곳에 침투시켜 전쟁 중 후방을 교란할 것과 남한 내 좌익단체에서 전쟁수행 인력을 보충할 것, 무력통일을 은폐하기 위한 평화통일 선전 캠페인을 조직할 것 등의 사항을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전쟁 개시 후 남한에 설치된 인민위원회, 정치보위부, 내무서 같은 점령조직과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려고 조직된 당 외곽의 좌익단체들을 통해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좌익단체들은 북한이 납북 대상으로 삼은 남한 민간인의 상세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납북 대상자의 주요 정보를 제공했다.

북한 정권이 납북대상자를 치밀하게 선별했음을 보여주는 문건들.

■ 치밀한 납북 계획

▲ 북한의 남침 모의 | 납북 준비

북한의 남침 준비는 소련, 중국과의 긴밀한 공조 하에 이뤄졌다. 김일성(金日成, 1912 ~ 1994)은 1950년 초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 ~ 1953)을 방문해 남침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1949년에는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승인을 거부했던 스탈린이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마오쩌둥(毛澤東, 1893 ~ 1976)에게 전쟁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는 것을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했던 것이다.

이로써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전쟁 초기 북한은 빠른 승리를 위한 전시 동원정책을 재빨리 수립했다. 여기에는 해방 직후 북한 당국이 직면했던 각 방면 인재·인력 부족 문제의 해결방침도 포함돼 있었다. 그것은 1946년 7월 김일성이 발표한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 데 대하여’의 담화 내용에서 보듯 남한에서 부족한 인재와 인력을 수급한다는 계획이었다.

▲ 북한의 기습 남침 | 납북의 시작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해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4일 만에 서울을 점령당한 한국군은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6월 28일 새벽 서울 내 한강 다리를 모두 폭파했다. 이로써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서울 시민 대다수가 도시 안에 고립돼 북한의 납북계획에 그대로 노출됐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고립된 남한 인사를 납치·포섭하려는 계획을 즉시 실행에 옮겼다. 서울 외 지역에서도 주민들에 대한 철저한 신원조사를 벌여 포섭·활용할 인사와 격리·구금할 인사를 구분해 관리·통제했다. 또한, 전쟁 수행을 위한 대규모 인력을 남한 청·장년들로 충원하고자 선전·선동 활동을 벌이고, 지원이란 명목으로 ‘의용군’이나 노무자로 동원했다.

▲ 유엔군의 참전과 반격 | 납북의 확산과 북송

북한군은 낙동강에서 더는 남진하지 못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세를 공방전의 양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5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뒤이어 38도선을 넘어 10월 말경 압록강 부근에 도착했다.

전세 변화로 병력 손실이 증가한 북한은 남한 점령 지역 내에서 청·장년층을 대거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점령 기간 각 시설에 구금됐던 이들도 다급하게 북송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인민군은 적대세력으로 분류된 일부 인사와 낙오자, 탈출 시도자 등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이에 납북자들이 구금됐던 장소와 북송돼 가던 길목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한다.

중공군의 개입과 1·4후퇴 | 마지막 전시납북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자 1950년 10월 8일 중국은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고, 같은 달 16일 중공군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19일에는 약 26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한반도로 들어왔고, 전황은 다시 역전돼 북한 인민군이 서울과 경인 지역 일부를 재점령했다.

서울을 재점령한 북한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과 한국군에 협조했던 이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무방비 상태였던 전쟁 발발 직후와 달리 이 시기에는 서울 시민 대부분이 서둘러 피난을 했기 때문에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1·4후퇴’ 이후 납북 피해자 수도 현격히 줄었지만, 피해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납북은 수도권보다는 지방에서 이뤄졌으며, 그 피해자는 북한군 점령지에서 물자 수송 등에 투입됐다가 그대로 납북되거나 빨치산에게 납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기사에서 계속...

[잊혀진 6·25 전시납북자③] 기획납북, 표적이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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